▲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공소시효 만료 4개월여를 앞둔 가운데 김가원 교수가 사건 관련 실화소설을 출간해 또 한번의 세인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2년 와룡산 유골 발굴 장면. | ||
유골 발견 당시만 해도 이 해묵은 숙제는 곧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타살됐다’라는 법의학자들의 소견까지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지금까지 범행 도구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시 이 사건은 세인들에게 서서히 잊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개구리 소년 사건은 범행 발생 14년 6개월 만에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있다. 공소시효 만료를 4개월여 앞두고 공소시효를 연장하자는 움직임과 함께 한 심리학 교수의 실화 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가 출간된 것이 그 계기였다.
이 소설의 저자는 지난 12년 동안 끈질기게 이 사건을 추적, 96년 1월 실종 소년의 아버지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던 우석대학교 김가원 교수. 그는 당시 경찰을 동원해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의 집 화장실과 마당에 아이들의 사체가 있을 것으로 보고 직접 파헤치기까지 했으나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KAIST에 재직중이던 김 교수는 결국 명예훼손으로 피소돼 벌금형을 받았고, KAIST에도 사표를 제출했으며, 한국심리학회에서도 제명당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그후 10년 동안 여전히 이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지난 96년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을 소설 형식으로 정리해 내놓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에서 그는 몇 가지 의혹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주장한 의혹은 이 사건을 취재했던 많은 기자들이 제기했던 의혹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수도 있을 세 가지 의혹을 집중적으로 추적해본다.
#실종 두 달 후 한 아이에게서 걸려온 전화내용은 조작된 것인가
사건 발생 두 달 후인 1991년 5월31일. 실종된 아이들 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 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당시 아이의 부모나 주변 사람들은 “아이의 목소리가 맞다”고 진술했고 녹음테이프는 정밀 수사를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내졌다.
녹음된 내용은 “여보세요”(아이 엄마), “엄마”(아이), “너 ○○니?”(아이 엄마), “응”(아이), “ 어딘데?”(아이 엄마), (수화기 내려놓은 소리) 였다.
김 교수는 자신의 실화 소설에서 “아이의 부모는 처음부터 국과수에 녹음테이프 원본을 보내지 않았으며 국과수에서 다시 원본을 보내라고 요청해 2차 조사를 했지만 그 역시 원본이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녹음테이프 두 개가 다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통신 전문가의 도움으로 대화 중간의 통화 중 ‘뚜뚜’하는 소음까지 정밀 분석한 결과, 1차로 보내진 자료는 먼저 전화를 끊었던 아이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앞부분의 소리가 삭제돼 있었고, 반대로 2차로 제출했던 자료는 아이 엄마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뒷부분의 소리가 삭제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또 당시 그 녹음이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수사기록을 직접 봤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나와 함께 그 수사기록을 봤던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모 월간지의 이아무개 기자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결과적으로는 그 녹음테이프 하나로 인해 ‘아이들의 실종이 내부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설이 원천 봉쇄됐다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전했다.
한편 이 사건을 담당한 성서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이 같은 조작설에 대해 “당시 그 전화는 장난 전화로 밝혀졌다”며 일축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장난 전화였다면 ‘장난 전화’였다고 기록하지 왜 ‘조작’이라고 기록했겠느냐”고 반문해 양측이 판이한 입장차를 보였다.
▲ 와룡산 전경. | ||
유골발견 하루 전날인 2002년 9월 25일 모 신문사로 “와룡산에 가면 큰 무덤 같은 흔적이 있는데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이 묻혀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라”는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유골은 바로 다음 날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갔던 한 시민에 의해 발견되었고 제보자의 주장대로 유골이 발견된 지점 바로 위에 분묘를 이장한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이 정체불명의 제보자에게 당시 이목이 집중됐었다.
경찰은 제보자 정아무개씨(40)를 상대로 조사를 벌였지만 제보 경위에 대해서 횡설수설하자 정신이상자라며 단순 해프닝으로 조사를 종결됐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며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잊혀졌던 사건이다. 그런데 전남 목포에 산다는 사람이 산의 이름을 정확하게 대가며 유골 매장지를 제보할 수가 있는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제보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사건 초 ‘평떼기’ 수색으로도 못찾은 아이들…과연 살해된 후 옮겨졌나
2002년 9월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은 실종 당시 전국적으로 연인원 30만여 명을 동원해 수색했던 곳이었다. 한 평 단위로 쪼개 수색하는 일명 ‘평떼기’ 수색이 이루어졌고, ‘선원지’를 비롯한 인근 저수지의 물도 전부 빼내 사체가 있는지를 확인했던 곳이다. 당시 경찰은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 대한 수색이 소홀했다”고 밝혔지만 일부 경찰들은 “산을 그렇게 샅샅이 뒤졌는데 지금에서야 발견된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법의학팀의 유골 감식 결과, 경찰이 발굴 당시 추측한 ‘자연사’를 뒤집고 ‘타살’ 결론이 내려지면서 소년들이 살해된 후 옮겨진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런 정황은 놀랍게도 사건 발생 처음부터 “애초 아이들은 아예 산에 가지도 않았다”며 타살 가능성을 제시했던 김 교수의 주장을 상당부분 뒷받침한다. 김 교수는 “96년 당시의 내 판단(실종 어린이의 한 아버지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고 밝히면서도 “유골이 발견된 첫날에는 사체가 4구였다가 다음 날 1구가 추가로 발견됐다는 점, 머리카락과 유골의 일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사체가 2차 장소로 이동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사체는 처음부터 5구였던 것으로 안다”며 사실과 다른 내용을 주장했다. 현재 경찰은 이 사건의 기초 사실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