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목을 매고 숨진 채 발견된 이수일 전 국정원 제2차장의 빈소가 호남대에 차려졌다. 유족과 수사 관계자들은 그의 자살을 ‘우발적’이라 보고 있지만, 석연찮은 행적들이 또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
그는 검찰이 수사중인 ‘국정원 불법 도·감청’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난 10월4일 이후 세 번이나 검찰에 불려가 도 감청 의혹과 관련된 조사를 받았다. 15일에는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신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됐다. 유족들과 언론들은 그가 신 전 원장의 구속에 책임을 느끼고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자살을 결심하면서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점도 그렇지만 두 전직 원장의 구속직후라는 자살시점은 너무나 절묘하다. 강압수사 의혹을 받고 있는 검찰은 그의 자살로 입지가 좁아지면서 수사를 일시 중단했고 그동안 숨죽이던 DJ정부 시절 인사들은 참았던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그의 자살로 불법 도·감청수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부검결과 이 전 차장의 사망원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외부 타박상이나 위장 내 독극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팀은 “타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실상 수사를 종결했다.
그는 최근 국정원의 불법 도·감청 사건의 핵심 당사자로 수차례 검찰의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그의 상관이었던 신건 전 국정원장은 불법 도·감청을 지휘 혹은 방조한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 도청수사팀은 “이 전 차장이 세 번에 걸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구속된 신 전 원장의 혐의와 관련해 상당히 의미 있는 진술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신 전 원장의 구속을 보며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심경을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근거해 유족들과 수사관계자들은 그가 신 전 원장의 구속에 대한 책임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자살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우선 그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사망 현장에는 자살 전후의 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종이 한 장 없었다”는 게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계자의 설명. 이와 관련 자체 조사에 나섰던 국정원측은 “과묵하고 신사다운 그의 성격을 고려할 때 만약 자살을 생각했다면 구차하게 유서 같은 것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공직과 정보기관의 고위직에 올랐던 그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될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한 마디도 안 남겼다는 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 경찰은 그가 자살 직전 누군가와 전화를 한 이후 갑자기 자살을 결심했을 것으로 보고 전화기록 등을 확인했다. 그러나 단서는 찾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그의 사망시간을 추정하기 위해 전화기록을 분석했다. 확인결과 그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부인이었고 그 전에도 대학 관계자 등과 전화를 한 것 이외에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의 자살 전 행적도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비서실장과 직원 문상 계획을 잡는 등 3~4건의 약속을 잡고 있었다. 사망한 20일 오후에는 국정원 광주지부 관계자들을 만날 계획이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유족들과 수사관계자들은 그의 죽음이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우발적으로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오래전부터 자살을 계획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그가 두 번째 검찰소환을 받은 11월3일 이후 몰라보게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는 측근들의 진술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호남대의 한 관계자는 “10월4일 조사를 받은 이후에는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던 총장님이 11월3일 두 번째 조사를 받고 오신 이후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상당히 우울해 하셨고 말수도 줄었다”고 말했다. 또 “이때부터 혹시 총장님이 자살을 생각하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11월3일 검찰의 조사내용이 어떤 것이었는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가 자살에 사용한 빨랫줄의 구입경위도 ‘계획된 자살’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총장 관사 베란다에 설치된 빨래봉에 흰색 나일론 끈을 매달아 자살했다. 끈은 매듭이 없이 삼중으로 묶었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관사의 다용도실 붙박이장에서 그가 목을 매는 데 사용한 것과 같은 나일론 끈 10m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 끈은 평소 관사에 없었던 것이었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파출부도 “처음 보는 끈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수사를 담당한 경찰 관계자는 이 끈에 대해 “구입한 지 2주일가량 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자살을 위해 구입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집안에서는 이전에 이런 끈을 쓴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만약 그가 자살을 위해 이 끈을 오래전에 구입한 것이라면 두 전직 국정원장의 구속에 충격을 받아 순간적으로 자살을 결심했다는 그간의 추측은 신빙성을 잃게 된다. 그의 자살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두 전 원장의 구속과는 직접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최근 검찰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전 차장이 “2002년 대선당시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등이 공개했던 국정원 도청 문건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다소 황당한 분석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에 협조했던 과거 전력이 검찰조사에서 드러나자 자살을 결심했던 게 아니냐”는 추측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한다.
그의 자살시점도 의문을 남기고 있다. 실제로 그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부터 한참 물이 올랐던 국정원의 도· 감청 수사는 제동이 걸렸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20일부터 사실상 검찰의 수사가 중단됐다. 비록 4일 만인 24일 검찰이 수사재개를 선언하고 나섰지만 다소 맥이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여론을 등에 업고 일사천리로 수사를 진행하던 검찰도 그동안 숨을 죽이던 안팎의 비난이 터져나오면서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압수사 의혹까지 불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이 제대로 된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겠는가”는 내부의 우려가 커지고 있을 정도다. 대검측이 “수사과정에서 강압이나 가혹행위 등은 전혀 없었다. 그의 죽음과 관계없이 수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사실상 수사는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
검찰을 향한 정치권과 언론의 공세도 거세지고 있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곳은 민주당이었다. 21일 분향소를 방문한 민주당 최인기 의원은 “검찰의 수사에 문제가 없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친북적인 활동을 공공연히 해 온 강정구 교수를 불구속 지휘했던 현 정부가 도주의 우려도 없고 남북관계 개선에 공을 세웠던 두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 수사하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김대중 대통령 당시의 도·감청문제만을 문제 삼고 있는 검찰이 무리한 수사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죽음으로 코너에 몰린 열린우리당측은 “수사결과를 지켜보자”는 신중함을 보이면서도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며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도·감청 수사 당사자들도 분노하고 있다. 두 전직 원장과 김은성 전 차장 등이 식음을 전폐했다는 소문도 나오고 있고 국정원의 도 감청 사실을 시인해 왔던 전직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진술을 번복할 것이란 소문도 번지고 있다. 그의 자살이 가져온 파문이 예상외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의 자살은 국정원과 DJ 정부측 인사들에게는 하나의 탈출구로, 수사를 맡고 있는 검찰과 사실상 이 문제를 방관해 온 현 정부에게는 족쇄가 되고 있는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광주=한상진 기자 sjin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