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국제사회의 비난과 후계구도 논란을 돌파하기 위해 입헌군주제로의 변화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 ||
김동현(69·미국명 통 킴) 고려대 연구교수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지난 27년간 미국 국무부에서 한국어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한미외교와 북미외교의 현장에 늘 함께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91년부터 올해 1월까지 북한만 17차례 방문한 전력이 있다.
그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 북한 내부의 권력 승계가 김 위원장의 차남인 김정철로 굳어지고 있다는 외신 보도와 관련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은 체제 유지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겠지만, 3대째 대를 잇는 충성을 강요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오고 있는 까닭이다.
지난달 29일 오전. 고려대 우당교양관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자와 마주한 김동현 교수는 “지난 2000년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 위원장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김 위원장이 직접 태국식 입헌군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미 국무성 통역관의 신분으로 들었던 내용인 만큼 이 자리에서 자세한 내용을 함부로 언급하기는 곤란하다”면서 “하지만 당시 김 위원장의 언급 외에도 그동안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 고위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말할 수는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절대 권력자인 김 위원장이 입헌군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은 주목을 끌 만했다. 특히 최근 김 위원장의 후계자 구도 문제가 이슈로 부각되는 시점에서 더욱 그랬다. 입헌군주제는 이미 지구상에서 영국 일본 스웨덴 스페인 등 많은 민주화된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이지만 김 위원장이 이를 언급했다는 점은 다소 생뚱맞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김 위원장이 태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언급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존하는 제도 가운데 태국이 그나마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예로 든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라며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왕이 모든 것을 통치하는 과거 조선왕조식의 왕조체제를 내세워도 할 말은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지금의 북한에 대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왕조 국가”라고 단언했다. 그는 “내가 만들어낸 용어이긴 하지만 지금의 북한은 ‘유교적 민족주의 군주국가’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북한의 통치 이념은 유교적 사상이다. 김 위원장의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에 대한 효(孝)가 통치 바탕에 큰 축을 이룬다”라고 말했다. 그는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될 때 북한에서 ‘우리는 우리식대로 사회주의를 한다’고 말한 것 또한 그 우리식은 바로 유교적 전통을 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국제 사회에서 현재 북한이 가장 비난받고 있는 세 가지로 핵 문제, 인권 문제와 더불어 독재 세습 체제를 꼽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북한의 공식적인 왕조국가의 천명은 최소한 세습 체제에 대한 대외적인 비난은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도 있다는 논리가 생긴다. 또한 왕조체제는 세습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후계 구도 논란이 벌어질 소지도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김 위원장은 자신의 아들 세대에 가면 아버지나 자신과 같은 절대적인 카리스마가 지속되기 힘들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면서 “따라서 자연스럽게 세습이 이어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내가 김 위원장을 만나보면서 받은 느낌으로도 그는 현재 북한의 생존 자주노선이 과거 외세침략을 빈번히 당한 한반도의 역사, 조선왕조의 역사가 걸어왔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고 밝혔다.
일부 북한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미 북한은 실질적인 군주체제를 정착시켜 나가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기동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자신이 발표한 글을 통해 “김 위원장에게 필요한 자신의 후계 덕목 가운데 으뜸은 그가 아버지에게 했던 것과 같이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이며 그런 의미에서 당연히 후계자는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미 2세로의 한 차례 세습을 경험한 바 있는 북한 체제에서 3세로의 세습은 오히려 훨씬 더 쉬울 수 있다. 이제 북한 주민에게 세습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됐다”고 밝히고 있다.
80~90년대에 걸쳐 약 13년간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있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얼마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용어를 써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 위원장과 후처격인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3남매를 언급할 때 반드시 ‘왕자’ ‘공주’라는 호칭을 썼던 것. 그는 “김 위원장은 첫째 아들 정철 왕자보다는 둘째 아들 정운 왕자를 더 아꼈다. 식사를 할 때에도 자신의 좌우에 정운 왕자와 공주를 앉혔다”라고 표현했다.
황장엽씨 역시 김정일 가족을 얘기할 때 가끔씩 왕조를 연상시키는 용어를 자주 구사하고 있다. 그는 후계 문제와 관련한 한 인터뷰에서 “후계자는 왕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가 되게끔 되어 있다. 여자가 떨어져 나가면 태자는 갈릴 수밖에 없다. 김정일에게서 성혜림이 떨어져 나가고 고영희가 확고히 자리를 굳힌 순간부터 태자는 김정남이 아니라 김정철로 확정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해온 북한 사회에서 과연 이 같은 왕조국가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다소 견해가 엇갈린다.
김 교수는 “최대 결정권자는 김 위원장이다. 그가 하겠다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그가 장악하고 있는 국방위는 군부보다 훨씬 위에 있는 가장 강력한 통치기구”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 역시 북한의 현 체제에 대해서 불만이 큰 만큼 어떤 식으로든 체제의 변화 혹은 최소한 정책의 변화만이라도 희망하고 있다”는 말로 무언의 지지를 보낼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했다.
한편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현재 북한이 처한 위기 상황을 감안해 볼 때 당장 입헌군주제와 같은 혁신적인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그는 “현재로서는 오히려 기존의 강력한 수령체제를 보다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 위원 역시 “향후 북한 체제가 안정되고 순조롭게 풀려가면 궁극적으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며 가능성을 남겨뒀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