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 막내딸 윤형씨가 자살한 지 10여 일이 지났지만 ‘진실’은 여전히 장막 속에 갇혀있다. 사진은 지난 2000년 1월 부친 이건희 회장의 서울대 명예경영학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윤형씨. | ||
처음 윤형씨의 사망원인이 교통사고로 발표된 직후 기자는 1백50명이 넘는 뉴욕 거주 언론인 및 교민, 학생들과 전화나 메일로 접촉했다. 접촉 결과, 윤형씨 자살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전무했다. 더구나 그 주는 추수감사절 연휴가 끼어 있던 탓에 여행을 떠난 교민들은 기자의 전화를 받고 처음 충격적인 비보를 접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지난 11월23일을 즈음해 국내 한 언론의 뉴욕지사 기자만이 윤형씨의 자살 사실을 제일 먼저 확인했으며, 26일에서야 한 통신사 뉴욕특파원에 의해 자살 소식이 처음으로 기사로 전해졌다.
윤형씨의 사망이 자살에 의한 것으로 밝혀진 이후에도 그 내막을 보도 내용 이상으로 자세히 알고 있는 교민들은 전혀 없다. 윤형씨가 다녔다는 뉴욕대 슈텐하르트(Steinhardt) 캠퍼스의 학생들은 물론 뉴욕의 교민 학생들도 믿기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도 “아는 바 없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관심은 증폭되고 감출수록 오히려 진실이 아닌 이야기들까지 나돌고 있다. 윤형씨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 그간 알려지지 않은 소문과 뒷이야기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 서서히 나와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저 풍문 수준의 얘기도 있지만 사망 배경을 그럴싸하게 뒷받침할 만한 매우 구체적인 내용도 일부 들린다. 특히 주목할 점은 윤형씨 사망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 이제 윤형씨와 가까웠거나 안면이 있던 사람들 입에서까지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관심의 초점은 이렇다. 첫째, 윤형씨가 왜 일주일 동안 방에서 두문불출한 것일까? 무엇을 그렇게 고민했을까? 둘째, 윤형씨를 처음 발견한 남자친구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새벽 3시에 왜 그 집을 찾아갔는가? 셋째, 남부러울 것이 없는 윤형씨가 왜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했을까? 아직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들에 대한 소문과 진실을 정리해봤다.
자살 원인은?
윤형씨의 사인이 교통사고가 아닌 자살로 밝혀지자 삼성측 주변과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이 회장 부부가 막내딸과 남자친구로 알려진 신아무개씨의 결혼을 반대했던 점을 유력한 배경으로 추측했다.
일부에서는 윤형씨가 부모가 반대하는 남자와 교제를 했으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부모가 미국에 도피 유학을 시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가 뒤따라 미국에 건너가 교제를 계속하는 바람에 가족들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나돌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혼 반대로 인한 심적 부담감만이 아닌 또 다른 동기가 얽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현지 언론 관계자나 심리학자 등은 단순 결혼 문제보다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윤형씨를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뉴욕 현지의 한 언론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러한 말을 전했다. “윤형씨 주변을 취재해보니 그간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속으로 많은 고민을 했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윤형씨가 가장 속상해했던 부분은 미국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절하되고 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실제 윤형씨는 한국에서만큼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최고의 딸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아니었다. 여기에 갑작스럽게 바뀐 생활 패턴에 대한 부담감, 가족과 떨어져 이역만리에서 홀로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외로움, 그리고 결혼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신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심리적 상태에 이르지 않았겠느냐는 게 윤형씨를 멀리서 지켜본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자살이 단지 우발적인 충동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추측이 가능한 셈이다. 이와 관련, 항간에서는 오래 전부터 윤형씨에게서 이상 징후가 보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떠한 방법들을 동원해서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과거’가 윤형씨에게 몇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3~4년 전 윤형씨가 잘 따랐던 남·녀 선배들과 함께 윤형씨를 만난 적이 있다는 A씨는 윤형씨의 자살은 미리 예고됐던 것이라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윤형씨 사망 소식을 듣고 자살임을 직감했다는 A씨는 “윤형씨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윤형씨가 예전에도 힘든 고비를 2~3번 넘긴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고 전했다. 결국 오래전부터 상당한 심적 고민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눈발이 흩날리던 지난 1998년 2월, 윤형씨(오른쪽)의 고교 졸업식에서 모친 홍라희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미소를 머금은 채 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
처음 윤형씨의 시신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신아무개씨의 신상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이 일고 있다. 신씨는 윤형씨의 사망 의문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신씨와 미국에서 윤형씨가 사망하기 직전 어떠한 일이 있었으며, 왜 신씨가 새벽 3시에 윤형씨 집을 방문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유서 존재 여부도 신씨만이 알 수 있는 사안이다.
인터넷상에서는 신씨의 신상과 관련한 각종 소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씨는 지난 2003년 윤형씨가 싸이월드 홈페이지에서 공개적으로 밝힌 남자친구. 정확한 신상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삼성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신씨는 K대 체육교육학과 98학번으로 재학중에는 학교 스키 동아리에 가입,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공익 근무 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하며 나이는 27세로 전해진다. 일본에서 고교까지 졸업한 덕에 일본어에 상당히 능통하며 졸업 전까지 거주지는 서초동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씨는 학교생활보다는 동아리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스키 동아리의 한 학생은 “스키 동아리 회원들은 부유층 자제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랬는지 일반 학생보다는 자기들끼리 훨씬 친하게 지냈다”고 전했다.
윤형씨와의 교제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아리 내에서 퍼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K대 내에서도 공개 데이트를 즐겼으며 겨울에는 이들 커플이 친구들과 함께 H스키장을 찾아 스키를 자주 즐겼다는 게 동아리 친구들의 말이다.
신씨 집안과 관련해서는 말이 엇갈린다. 동아리 학생에 의하면, 신씨로부터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업을 한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라고 한다. 이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한때 신씨가 L그룹과 관계가 있다는 등의 얘기가 돌았으나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신씨가 새벽 3시 윤형씨의 집을 방문한 사실을 놓고도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새벽 3시에 여자 친구의 집을 방문할 정도며 이 시간에 아파트 경비원이 문을 열어줄 정도라면 그동안에도 집을 자주 오간 상당히 친밀한 사이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따라서 신씨는 단순한 발견자 이상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갖는다.
자살의 심리학과 윤형씨
정신분석학자들은 자살의 방법에 따른 심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우선 자살의 방법 중 음독은 비교적 죽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적은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음독은 아직도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되며 숨지기 전에 발견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믿음이 뒤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반면 투신 자살은 매우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자살을 생각했다기보다는 자살 직전 충동적인 생각에 이끌려 뛰어내리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을 매 자살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오랫동안 자살을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계획된 죽음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윤형씨의 경우도 이런 정황이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자살 일주일 전부터 두문불출했다는 것이나 그 전에도 몇 번 이상징후가 친구들에 의해 감지됐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는 윤형씨가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민을 해 왔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른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일반인들이 볼 때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이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자신을 옭아매는 제약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한 정신분석학자는 “과거 왕족 중에서도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신분적 제약을 못 이겨 일탈행동을 한다든가 불행해진 경우를 동서양을 막론하고 찾아볼 수 있다”며 “특히 현대와 같은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인위적인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과거보다 더욱 힘든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윤형씨의 고민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녀의 죽음을 단지 흥밋거리로 삼는 것은 곤란하지만 그녀가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괴로워했던 문제를 모르는 척 그냥 덮어두는 것만이 그녀를 위하는 것인지는 한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