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군부의 쿠데타 당시 피해자 뒤에 숨어 자신도 큰 피해자인 양 처신한 육본 수뇌부들도 역사의 가해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오른쪽 사진은 끝까지 진압을 주장했던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과 드라마 <제5공화국>의 한 장면. | ||
12·12쿠데타가 발생한 지 26년이 되는 지금. 그럼에도 여전히 논란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군 주변과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이분법적 사고로만 판단하는 것은 안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즉 “무조건 나쁜 가해자와 무조건 억울하기만 한 피해자 양측만 존재하는 단순한 형식논리는 역사의 교훈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12·12쿠데타에 있어서 통상적으로 가해자란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신군부를 말한다. 이들을 반란군이라고도 부른다. 피해자는 그 반대편에 섰던 진압군 세력을 일컫는다. 하지만 진정한 피해자는 신군부에 의해 연행된 정 총장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끝까지 진압을 주장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까지 이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뒤에 숨어 마치 자신들도 큰 피해자인 양 처신하는 당시 육군 수뇌부들은 또 다른 역사의 가해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여기에는 당시 군 통수권자였던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장관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쿠데타 세력인 신군부 측은 지금도 여전히 “12·12는 정 총장 연행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사고”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향해 병력 출동을 시도한 육본 수뇌부에 대해 “그들이 반란군”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들의 목소리 뒤에는 ‘치밀하게 계획되지 않았던 12·12 하나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무능한 군 수뇌부’란 비수가 감춰져 있다.
일부 육군의 전·현직 장교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이 신군부의 하극상 반란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12·12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 군을 지탱하고 있던 육본 수뇌부가 무엇을 했는지 제대로 된 책임규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그것.
마지막까지 진압군의 군 병력 출동을 주장했던 장태완 전 사령관 역시 “반란군임을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육본 수뇌부와 최 대통령, 노 국방장관 등 군 통수권자들도 역사 앞에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내 책임도 통감한다”며 동감을 밝혔다. 정승화 전 총장과 정병주 전 사령관은 이미 고인이 됐다.
소위 ‘진압군’으로 일컬어지는 육본 수뇌부의 당일 행적은 한마디로 우왕좌왕 그 자체였다. 육본 수뇌부는 정 총장의 불법 연행이 벌어진 12일 오후 7시반 이후 급히 육본 지하벙커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8시경에 이미 지금의 사태가 전 사령관에 의해 저질러진 명백한 하극상에 의한 반란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군 지휘체계상 참모총장 유고시 육군의 지휘권을 갖게 되는 윤성민 차장은 “전두환이가 한 짓이야. 그를 잡아야 해”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9시경 피신해 있던 노재현 장관이 육본 벙커로 왔다. 군의 지휘부가 모두 모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신변 문제에 더 급급했다. 반란군이 공수부대 등의 실병력을 움직인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이다. 이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자는 것부터 먼저 합의했다. 노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등은 연합사가 있는 미8군으로 향했다. 윤 차장 이하 육본 수뇌부들은 장태완 사령관이 있는 수경사로 옮겼다. 진압군의 대열이 이원화된 것이다. 여기에 군 통수권자인 최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와 함께 여전히 삼청동 총리공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휘체계도 없이 완전히 우왕좌왕, 사분오열된 셈이다.
▲ 1980년 당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왼쪽)이 최규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
그는 “26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또다시 거론해야 하는 자체도 이젠 슬프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장성들은 지휘관으로서의 상황 판단 능력도 제대로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치 사태 이후에 자신의 행동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어떻게 비춰질지를 걱정하는 듯했다. 대세가 신군부 측으로 기울어지자 ‘늦었다’ ‘역부족이었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개탄했다.
12·12쿠데타 당일과 그 이튿날의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지금도 노재현 장관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는 군 내부 사정에 어두운 최 대통령을 대신해서 사실상 군의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최 대통령도 마지막까지 모든 결정을 노 장관의 뜻에 의존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노 장관이 제대로 된 상황 판단만 했어도 사태를 미연에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의견이 일치한다.
12·12 당시 합참본부장이었던 문홍구 예비역 장군은 “최 대통령은 12·12 당일 노 장관의 행동에 대해 상당히 섭섭해 했다고 한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10시간 동안이나 정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해주지 않고 버텨주었는데 노 장관이 자신의 복안이 있다면 무언가 조치를 취했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불만이었다고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역시 진압군 측이었던 윤흥기 전 9공수여단장은 “12·12의 책임은 노 장관 같은 사람을 참모총장에도 모자라 국방장관까지 시킬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의 군인사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윤성민 차장에 대한 비난도 쏟아진다. 사태 초기만 해도 그는 전군에 비상전화를 걸어 “총장이 유고중이니 이제부터 명령은 내가 직접한다”고 시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 역시 모든 책임을 대통령과 장관에게만 미룬 채 “불가항력이었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김진기 당시 헌병감은 “윤 차장은 노 장관의 병력 동원 불가 방침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총장 연행에 대한 것이지 신군부의 반란 움직임까지 무대응하라는 것은 아니었다”면서 “윤 차장은 당시 신군부의 명백한 반란이라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현장의 지휘관으로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고 비난했다.
당시 중정부장 서리였던 이희성 장군 또한 13일 새벽 2시반경 신군부 측에 의해 ‘차기 육참총장’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실제 12·12쿠데타 이후 최 대통령에 의해 정 총장에 이은 새 계엄사령관으로 전격 임명됐다. 그런 의혹 때문인지 진압군 측에 섰던 일부 장성들은 그날 이 장군이 보인 행태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장태완 전 사령관은 “최 대통령도 역사적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재가도 없이 일개 소장이 계엄사령관인 육군 대장을 불법 연행했다면 이는 명백한 하극상에 의한 반란임을 뻔히 알 수 있음에도 국방장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은 것은 군 통수권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며 “설사 장관이 없으면 참모차장이나 수경사령관을 찾아서 상황을 보고받고 ‘조기 진압하라’는 한마디 명령만 내렸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었다”고 아쉬워했다.
12월12일 밤과 이튿날 새벽 육본 수뇌부 장성들이 보인 어정쩡한 행적에 대해 장 전 사령관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12·12 당시 나를 포함한 군 장성들은 대부분이 5·16 쿠데타 때 영관급 장교들이었다. 쿠데타군을 진압하려다 이후 반혁명분자로 몰려 군복을 벗어야 했거나 진급에 불이익을 받은 동료들을 많이 목격했다. 경험에 따라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취한 군장성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