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14일 APEC 참석차 방한한 아소 다로 신임 일본 외상. 사진공동취재단 | ||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은 최근 이 같은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제 강점하 한국인 강제 징용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분노하고 있다. 아소 외상의 집안이 소유하고 운영해온 아소광업이 한국인을 강제 징용한 수많은 일본 기업 중에서도 가장 가혹하게 조선인들을 다뤘다며 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느냐며 치를 떨고 있다.
최근 아소 외상의 망언이 있은 후 한국 정부와 관련단체들은 아소광업의 한국인 강제 징용 실태에 관한 자료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소탄광을 운영한 아소광업의 후신인 ‘주식회사 아소’는 관련 자료가 없다며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
각종 자료와 관계자들의 연구 결과 등을 토대로 일제 강점하 아소탄광 한국인 징용자들의 참상을 살펴본다.
“1994년 여름, 동료가 탄층에 부딪혀 쓰러졌다. 탄광이 운영하는 병원에 데려갔더니 의사가 일부러 상처를 냈느냐, 꾀병이 아니냐며 그의 배를 때렸다. 그는 나흘 후 죽었다. 항의하자 자신의 주의부족으로 다친 것이라며 공상(公傷) 처리를 해주지 않았다.”
“동료의 고환이 부었는데 술에 취해있던 일본인 노무 담당자가 치료해주겠다며 면도칼로 그 부위를 잘라버렸다. 잘린 사람은 결국 사망했다. 노무 담당자는 그를 철로에 올려놓고 자살로 위장하려 했다. 이 문제로 파업을 벌인 조선인 광부들은 체포됐지만 노무담당자는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경북 달성군 옥포면 출신의 장손명씨(1911년생·작고)가 생전에 회고한 아소광업의 기억은 지옥도에 다름 아니다.
장씨의 회고는 일본인 르포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책 <잊혀진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1989년 일본 출간)에 생생히 담겨있다. 장씨에 따르면 탄광에서 곧 죽을 것 같은 중상자라도 한국인은 본인의 주의부족이라며 책임을 전가, 공상처리가 되지 않았다. 구타로 죽은 한국인들의 경우 유족이 오기 전에 시신을 화장하거나 매장해 증거를 없앴다. 갱도내 사망보다 갱도밖 사망이 보상금이 더 적은 점을 악용해 갱도내에서 사고로 사망하더라도 무조건 밖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 제대로 된 보상도 하지 않았다.
장씨는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면서도 “유감스럽지만 거기서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죽었는지 지금도 실태를 모른다”고 말을 맺었다.
하야시가 쓴 또다른 책 <청산되지 않은 쇼와>(1991년 출간)에는 1936년 아소탄광 갱내에 불이 나자 갱도 끝에 한국인이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갱도를 폐쇄시켜 25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집단 질식사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식민통치 시절 일본에 의한 강제연행은 1930년대 말부터 본격 시작됐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자국 내 노동자들이 전장터에 내몰리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진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아소광업은 1920년대부터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한국인 노무자를 활용했다. 노동력이 뛰어나며 무엇보다 임금을 적게 주고도 혹사시킬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1932년에는 각종 인권유린을 견디다 못한 한국인 광부들이 파업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 파업의 여파로 아소탄광은 경영위기에 처할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 노동자를 다루는 ‘노하우’를 익힌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전문가들은 당시 탄광 징용자들의 삶을 죄수들의 ‘다코베야 노동’으로 표현한다. 다코베야 노동이란 노역자들을 낙지잡이 어망에 가둔 것처럼 꼼짝 못하게 한 뒤 죽도록 일만 시킨다는 뜻이다.
아소탄광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드러내놓고 한국인 노동자 징용에 나섰다.
하야시는 “아소탄광은 당시 한국에 살던 일본인을 노무 담당자로 채용, 연행대상을 샅샅이 조사해 온갖 거짓말과 협박을 통해 끌고 온 뒤 돈도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도망자를 붙잡기 위해 특별고등경찰까지 동원했다”고 전했다.
아소탄광의 노동조건이 열악했음은 후쿠오카현 당국의 내부자료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재일본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후쿠오카의 40여 개 탄광에 강제징용된 한국인 연행자는 모두 11만3천61명으로 이중 51.7%인 5만8천4백71명이 혹사 등을 견디다 못해 달아났다. 특히 아소탄광의 경우 연행자 숫자가 7천9백96명으로 단일 탄광으로는 가장 많았고 도망자 역시 4천9백19명(61.5%)로 1위였다. 사망자도 56명으로 가장 많았다.
문제는 이 같은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소탄광이 입을 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9월부터 일제강점 시절 조선인을 강제 징용했던 기업 1백8곳에 대해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 여름에는 이 중 7개 기업들이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한 일부 조사내용을 한국측에 통보한 데 이어 유골이 안치돼 있을 만한 전국의 사찰 등을 대상으로 추가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의 이 같은 조사가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당장 일본 정부가 조사대상으로 삼은 1백8개 기업 중 7개 기업만이 협조 자세를 보였을 뿐 1백1개 기업은 자료가 없다고 버티고 있다. 아소탄광 역시 일본정부의 조사에 묵묵무답인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측은 최근 일본정부에 아소탄광을 직접 거명하며 조사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한 상태다.
박용채 재일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