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6년부터 94년까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서의현 전 원장이 최근 국보급 문화재를 은닉한 혐의로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 또다시 잠적했다. 사진은 총무원장 시절 모습. | ||
지난 7월 대구지검 특수부에서 수사를 받아온 서 전 원장은 수사 과정에서 추사 김정희가 쓴 일로향각 현판, 금강경 등 수백점이 넘는 국보급 문화재를 개인적으로 빼돌린 혐의가 입증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발부됐다. 그러나 서 전 원장은 지난 11월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곧바로 종적을 감춰버렸다.
서 전 원장이 다량의 국보급 문화재를 개인적으로 은닉하고 있다는 제보가 검찰에 접수된 것은 지난 7월 중순경. 제보 당사자는 오랫동안 서 전 원장의 상좌(제자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로서 그를 최측근에서 보필해온 S스님.
대구 지역의 일부 스님들에 따르면, S스님은 올해 3월 이후 스승인 서 전 원장이 공금 횡령 등을 빌미로 사법 당국에 자신을 여러 차례 고소하자 결국 서 전 원장의 비리를 폭로하고 정면으로 맞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 전 원장이 고소한 사건만도 10여 건. 이 중 S스님을 상대로 제기한 두 건의 고소 사건은 무혐의 결정이 났으며 나머지는 현재 재판 진행 중이거나 수사 중이라는 게 지역 불교 관계자들의 얘기다.
S스님의 제보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검찰은 제보 접수 후 곧바로 서 전 원장의 거처로 예상되는 곳을 압수수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이 압수수색한 곳은 네 곳. 검찰은 서 전 원장이 거처했던 경북 상주 성불사와 총무원장 시절 비서였던 L씨의 평창동 집, 그리고 서 전 원장의 부인이라는 의혹을 받는 C씨 소유의 서초동 모텔, 무속인으로 불교계에서는 ‘애기보살’로 알려진 여성 P씨 소유인 제주도 농장을 같은 날 동시에 압수수색을 펼쳤다고 한다. 제주 농장은 서 전 원장이 과거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별장을 인수해 만든 것이라는 후문이 돌기도 하다.
압수수색 결과, 성불사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쓴 일로향각 현판 1점 등 국보급에 버금가는 불교 문화재들이 대거 나왔다. 한 번으로 부족해 한 차례 더 압수수색을 펼친 결과 일로향각을 비롯, 부처님이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구품탱 1점, 석가모니 탱화 1점과 금강경 필사본 2권과 대정신수대장경, 족자, 고려 시대 목판 8점 등이 발견됐고, 조선 광해군 때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귀의 시집도 압수품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 농장에서는 관세음보살 목불상과 옥불상이 압수됐다. 이들은 각각 대구 동화사와 옥포 유가사에서 보관해오던 문화재로 알려졌다.
L씨의 평창동 집에서는 고서적과 서화, 조사영정(유명 대사들을 그린 영정) 등이 발견돼 압수됐다. 서초동 모텔에서는 문화재가 발견되지 않았다. 압수품 대부분은 대부분 영천 은해사와 대구 동화사에 보관 중이던 문화재인 것으로 전해졌다. 서 전 원장은 69년부터 77년경까지 은해사와 동화사 주지를 지낸 바 있다.
▲ 경북 상주 성불사에서 발견된 추사 김정희가 쓴 일로향각 현판(위). 성불사는 99년 이후 서 전 원장이 주로 거처했던 곳이다. 아래 사진은 역시 성불사에서 발견된 석가모니 탱화. 성불사에서는 두 번의 압수수색을 통해 각종 탱화와 고려시대 목판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발 | ||
이들 압수 문화재는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치가 상당히 크다는 게 불교 관계자들의 말이다. 한때 지역 언론들이 이 압수품들 대부분이 모조품이나 복사본이어서 문화적 가치가 없다고 보도했으나 압수품 가치를 감정한 일부 교수들과 전문가들의 발언을 일부 언론이 잘못 이해하면서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보도된 것으로 전해진다.
서 전 원장이 구속영장 발부 단계에서 잠적하자 검찰도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수백점이 넘는 귀중한 문화재를 여러 곳에 은닉한 것이 압수수색 과정에서 드러나는 등 구속 사유가 명백함에도 신병 확보도 하지 않은 채 4개월간 수사를 끈 것은 검찰도 뭔가 눈치를 봐야 했던 탓 아니냐”는 반응마저 나오고 있다.
한편, 속리산 S사 주지를 지낸 한 스님도 “서 전 원장에게 사찰을 빼앗겼다”며 소송을 제기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문은 더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구 지역 불교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스님은 지난 99년 S사 인근 부지 매입 등으로 발생한 부채 대금 20억원을 서 전 원장이 갚아주는 조건으로 개인 사찰인 S사를 넘기기로 했으나 서 전 원장이 5억원만 주고 강제로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사찰을 접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86년부터 94년까지 총무원장직을 연임까지 했던 서 전 원장은 총무원장 재직 시절 불교계 내에서 벌어진 갈등의 중심에 항상 있던 인물이다.
재단 운영과 관련, 그는 임기 중에도 주먹과 돈, 그리고 권력의 힘을 빌려 파행적으로 종단정치를 해왔다는 의혹을 숱하게 받아왔다. 뿐만 아니라 종단 재산을 개인적으로 은닉했다는 의혹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여비서에게 상습 성폭행 혐의로 고발까지 당했다. 또한 대처(승려가 부인을 두는 것)를 금지하는 법을 어기고 부인과 아들을 두었다는 의혹도 제기되는 등 사생활 문제에서도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그를 둘러싼 이 같은 여러 미스터리가 서서히 잊혀지는 과정에서 수십년간 서 전 원장을 모셔왔다는 측근 스님이 스승과 정면으로 맞서자 불교계는 그야말로 폭풍전야다. 10여 년 전 불교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사실 공방이 펼쳐진 서 전 원장의 과거 비밀과 94년 잠적 이후의 행각들이 과연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로 불거지고 있는 것.
일단 이번 파문이 있은 후 서 전 원장에게 불만을 가져왔던 일부 불교계 인사들이 연쇄적으로 서 전 원장과 얽힌 갈등을 법적으로 문제제기하겠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어 사태 추이 여하에 따라서는 제2의 서의현 파동이 다시금 불교계 전체를 몰아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구=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