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국땅에서 살해된 뒤 ‘간첩’으로 몰렸던 수지 김. | ||
야당이 주식회사 ‘패스21’ 윤태식 회장의 전방위 로비에 대해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언론이 그걸 받기 시작하면서 속칭 ‘윤태식 게이트’란 용어가 신문을 장식했다. 윤태식이 파멸하면서 그의 돈을 받은 청와대와 언론계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로부터 주식을 받고 전전긍긍하는 몇몇 기자의 상담을 해 주기도 했다. 그 무렵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청와대경호실 직원 구속’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패스21 게이트’에 연루된 첫 번째 구속사건의 내용이 이렇게 보도됐다.
‘수지 김 살해 사건으로 구속된 윤태식씨의 주식로비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은 29일 전 청와대 직원 송창규씨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송씨는 윤태식에게 접근해 “경호실이 패스21 제품을 도입할 수 있도록 동료에게 부탁해 주겠다”며 이 회사 주식 2백 주를 공짜로 받고 3월에는 1천5백만원을 추가로 받은 혐의다.’
나는 여론무마용으로 피라미부터 잡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법은 거미줄이었다. 힘센 동물들은 거미줄을 끊고 지나갔다. 한 가지 더 의문점이 있었다. 윤태식의 살인을 은폐해준 배후는 안전기획부라는 것이었다. 그런 막강한 기관의 비호를 받았는데도 어떻게 살인 공소시효가 완성되기 몇 달 전에 일이 터졌을까라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정상에 오를 무렵 엉뚱한 날벼락을 잘 맞았다. 그것도 알 수 없는 경쟁자의 모략이나 제보로 말이다. 수천억대의 벤처기업 회장님이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이 되어 뉴스 화면에 수시로 뜨고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구속된 청와대 경호과장 송창규의 변호를 맡게 됐다. 이제 사회적 폭풍의 장본인이 된 윤태식을 증인으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윤태식 게이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살펴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 청와대경호실 경호과장 송창규는 태권도로 단련된, 군살 하나 없는 날카로운 눈매의 사십대 초반 남자였다. 깔끔한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대학 갈 형편이 되지 못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특전사령부의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호원으로 차출됐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까지 다섯 명의 대통령을 모신 경호실의 터줏대감이 됐다. 경호원의 삶이란 사회와 차단된 철저히 고립된 생활이었다. 관사에서 경호원들끼리만 모여 살았다. 외부인과의 접촉에 항상 주의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후부터는 그와 같은 원래 있던 경호원들은 찬밥 신세였다. 야당총재 시절부터 개인경호를 하던 사람들이 청와대를 점령하고 대통령의 잠자리까지 옆에서 지켰다. 그들의 허락 없이는 경호실 간부도 대통령 옆으로 가기 힘들었다. 사십대 초반이면 경호원으로서의 수명은 거의 끝났다. 경호과장이면 백 없이 올라간 직급으로는 다 오른 셈이었다. 사회로 나갈 생각을 하니 주먹 이외에는 특별히 살아갈 기술이 없었다.
2000년 1월24일 아침 9시30분경. 경호과장인 그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새천년 벤처인과의 만남’ 행사장을 마지막으로 점검중이었다. 전시품 속에 혹시 폭약은 없는지 아니면 수소 같은 위험물질을 사용하는 기계는 없는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오늘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하는 것은 벤처회사인 ‘패스21’의 윤태식 회장이었다. 여러 개의 회사가 전시품을 냈지만 대통령은 이미 윤 회장 회사 전시품 앞에 서게 계획되어 있었다. 청와대에서 벤처기업인을 초청할 때도 이미 윤 회장이 사전에 결정되어 있었다. 수석비서관이나 경호실장 정도의 거물에게 사전 로비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윤 회장은 벤처 신화를 주도하는 인물이었다. 경호과장은 얼마 전 인터뷰하던 윤태식 회장의 흥분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윤 회장은 이렇게 말했었다.
“저희 회사 주식을 세계에서 최고 가는 주식으로 만들겠습니다. ‘패스21’ 하면 세계적인 보안전문회사로 통하는 세상이 분명히 오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가 컴퓨터 산업을 일으켰다면 저희 ‘패스21’은 컴퓨터 산업의 완결점인 보안문제를 해결했다고 자신합니다.”
깐깐하다고 소문난 <매일경제>에서는 그의 말이 다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국의 모토롤라와 홍콩의 스타TV, 프랑스의 알스톰사 등 세계 굴지의 기업에서 전자상거래인증과 관련된 제휴 제의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윤 회장의 경력도 특이했다. 동북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홍콩 중문대에 유학해서 중국어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딴 후 국내에 들어와 영화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유학 시절 친하게 된 홍콩배우 주윤발의 조언으로 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그는 영화를 보면서 지문에 관련된 기술개발에 강한 의욕을 가졌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송창규의 부하인 청와대 경호원들 사이에서도 벤처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윤태식 회장이 가지고 있는 상장하기 직전의 주식만 사두면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 주식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윤태식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과도 이미 만났고 또 비서실이나 경호실과도 긴밀한 관계였다. 경호과장인 그는 사회에서 성공한 그런 인물과도 이제는 사귀고 싶었다.
벌써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서 30명가량의 사람들이 행사장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윤 회장을 부자로 만들어준 패스21의 지문인식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제가 패스21의 회장입니다. 잠시 설명을 드려도 좋습니까?”
뒤에서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다. 눈이 선해 보이는, 인상 좋은 사십대 남자가 서 있었다. 윤태식 회장 같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교만기도 없어 보였다.
“제가 개발한 지문인식기는 생체 알고리즘을 가지고 지문을 인식합니다. 생체 알고리즘이란 땀구멍의 삼각형구조를 가지고 사람을 구별하는 기술이죠. 이 기계는 절대로 해킹을 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경호과장은 겸손한 윤태식 회장의 태도에 놀랐다. 행사 다음날 신문에는 윤 회장이 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는 장면이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
며칠 후 윤태식 회장으로부터 송창규 경호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청와대 비서실이나 경호실 고위층과도 잘 통하는 윤 회장이었다. 굳이 경호과장인 그를 만나지 않아도 어떤 일이든 처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성공한 사람은 고위직뿐 아니라 아래 실무자도 섬세하게 잘 챙기는 것 같았다. 그는 윤태식 회장을 코리아나 호텔의 일식집에서 만났다. 경호원 생활 청산을 얼마 앞둔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연줄이 될 만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경호원 생활에 신물이 났다. 비번인 날도 관사에서 대기상태로 있어야 했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면 그림자같이 항상 붙어다녀야 했다. 어느 칼바람 부는 겨울이었다. 그날따라 대통령이 골프를 쳤다. 골프장 외곽의 나무들 뒤에 경호원들은 눈에 띄지 않게 서 있어야 했다. 대통령경호에서 적당주의는 없었다. 몇 시간을 정물같이 서 있다 보면 온몸이 뻣뻣이 굳고 얼음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가족도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사는 것 같았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대통령이 바뀌면 경호실장도 경호원들도 새로운 사람들이 밀물같이 들어왔다. 그는 연줄이 없었다. 정권이 바뀌면 모두 한자리를 얻어 썰물같이 나가는데 그는 그냥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네 명의 대통령을 모시면서 정말 힘들게 경호과장까지 올랐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더 찬밥신세였다. 오랜 야당생활을 하던 김대중 대통령의 사적인 인맥은 막강했다. 대통령도 그들을 더 믿었다. 이번에는 좀 심했다.
몇몇 경호실 간부들은 시간만 나면 외부인들과 접촉했다. 관사에 살면 아내를 통해 또 아이들을 통해 앞집 뒷집의 삶이 낱낱이 알려졌다. 앞집 누구는 강릉에 갔다올 때 백에 돈을 가득 싣고 오더라는 얘기도 들렸다. 그는 얼마 전에야 경호원 생활 20년 만에 변두리에 주택 한 채를 샀다. 그것도 신용금고에서 비싸게 융자 받은 돈을 보태서 구한 집이었다.
그는 윤태식 회장과 저녁을 먹으면서 서로 살아온 얘기를 했다. 윤 회장이 말하는 인생역정은 감동 그 자체였다. 윤 회장 역시 어려운 가정형편에 중학교를 중퇴한 후 신문팔이 등 온갖 직업을 거치며 고생을 했다고 했다. 윤 회장은 직업군인 생활을 한 그와는 달리 아이디어가 풍부한 것 같았다.
윤 회장은 처음에 위폐계수기를 개발했다고 했다. 돈을 세면서 동시에 위조지폐를 가려낸다는 기계였다. 윤 회장은 중국의 푸동지구 주상복합건물 분양사업에도 손을 대 재미를 보았다고 했다. 한때 부도가 나서 감옥생활을 한 것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감옥 안에서도 컴퓨터 관련서적을 읽으면서 은행보안업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출소 후 윤 회장은 지문인식기술을 개발하고 있던 회사에 참여했다고 했다. 1999년경 그는 주식회사 ‘패스21’을 설립했다. 시연회 때 능숙하게 브리핑하기 위해 지독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벤처회사는 이벤트 만들기와 홍보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윤 회장은 회사의 기술 연구 분야, 재무관리, 주식운용과 홍보 분야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새벽 두세 시에도 직원들에게 전화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했다고 했다.
그가 개발한 지문인식기술은 2001년 12월29일 발명특허를 얻고 국내은행, 정보통신부, 철도청 등에 납품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윤태식이 말하는 사업 세계는 또 다른 우주였다. 몇 번을 만난 후 윤 회장이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했다.
“청와대 담당자에게 지문인식기를 소개하는 기회를 주면 우리 기계를 무상으로 달아주면서 설명할 텐데….”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서로 마음이 열렸다. 송 과장은 자신이 빚진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뭐 그렇게 비싼 신용금고 이자를 쓰고 있어? 내가 거래은행에 싼 대출을 소개해 줄게. 그리고 부인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줘. 우리 회사에서 곧 증자가 있는데 그때 2백 주 정도 배정하도록 할게.”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그 주식 때문에 윤태식 게이트의 첫 번째 희생양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