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8월 도쿄 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됐다 생환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최근 공개된 외교문서만 갖고는 사건의 전모를 규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 ||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는 거의 대부분이 박정희 정권 때로 집중됐고, 특히 유신 이후인 72~74년의 내용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1백91건 1만7천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전량 입수,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채 묻혀 있었던 외교가 비화들을 끄집어냈다.
■김대중 납치사건
이번 문서 공개로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이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지만, 기대만큼 명확히 진상을 규명할 만한 파격적인 내용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문서 속에 숨어있던 눈여겨 볼만한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납치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73년 8월10일 김씨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윤석헌 외무차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한 비화도 발견됐다. 윤 차관은 거절 이유로 “현재로선 이 여사가 일본에 가더라도 일본의 수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김씨가 나타나면 그때 보내주겠다”고 밝혔다. 대신 그는 “일본 공안당국에서는 양일동 김경인씨에게 국내 귀국을 늦추고 수사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이 여사도 이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에 협조토록 해달라고 권고해주기 바란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 여사는 “남편이 나타나면 일본에 갈 필요도 없지 않느냐. 양일동 김경인에게는 말하기도 싫다”며 전화를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측이 김씨의 신변 안전 문제에 상당히 신경을 쓴 부분도 자주 눈에 띈다. 김씨가 국내로 돌아온 직후인 8월14일 우시로쿠 주한 일본대사는 윤 차관에게 “일본은 김씨가 무사해서 안심하고 있다”며 “현재 김씨는 자유롭게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윤 차관은 “그렇다. 그가 국내외 기자회견을 한 것으로 보아 자명하지 않은가”라며 다소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국은 이 같은 표현이 부적절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지우고 “그가 국내외 기자회견을 두 번이나 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완화된 표현으로 고쳐놓고 있다.
8월27일에도 일본측은 “신문기자에 의하면 김씨가 현재 집에 없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우리 정부는 “김씨는 현재 집에 건재해 있다”고 답했다.
11월2일 김종필 총리와 다나카 총리의 회담에서는 김씨에 대한 노골적인 비토가 언급되기도 했다. 김 총리가 “김씨가 일본에서 벌인 (박정희 정권 반대)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일본이 철저하게 대응해 줬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표하자 다나카 총리는 “사실 우리도 김씨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대응을 못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본에서 내쫓았을 때 미국으로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김 총리가 “일본에서 내쫓기만 하면 된다”고 답했고, 다나카 총리도 “그렇게 하겠다. 그런 자는 일본에게도 매우 곤란하다. 그런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했다.
■경무대와 주미대사 교환문서
제1공화국 때인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직접 지시한 외교문서 목록이 48년 만에 공개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비록 1958년 한 해에 결쳐 보낸 것에 대해 제목만 언급되어 있지만, 당시 한·미 관계의 주된 관심사와 비화들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
‘한국군 감축 관련 백선엽 장군 미국 파견 교섭 건’(1.10), ‘국군 감축 반대를 위해 이 대통령의 주미대사 앞 대미활동 지시 서한’(1.14), ‘이 대통령의 주미대사 앞 배미친공 가능성과 미 국무장관의 친일정책 비판’(9.3), ‘UN 총회 한반도 문제 불상정 시도 저지 훈련’(10.15), ‘독자적 통일 성취 방안에 관한 양 대사 의견 문의’(11.4), ‘중공군 북한 철수 계기 한국 통일을 위한 UN 및 미국의 강력한 지원 모색 필요성 역설’(11.29) 등의 제목으로 볼 때 역시 안보문제가 가장 주요한 현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배미친공 가능성’과 ‘독자적 통일 성취방안’은 이 대통령의 대미 외교적 카드로서 주목된다.
이밖에도 ‘미국 유학생 귀국 기피 현상 관련, 이 대통령의 양 대사 앞 서한’(1.16), ‘원조 관련 한국 관리의 부정 행위에 관한 미의회 청문회’(3.13), ‘프란체스카 여사 개인 비밀 일기장 출판 저지 경위 설명’(5.14) 등 당시의 세태와 일반 국민들에 알려지지 않은 권력층의 비화들이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
■독도에 대한 미국의 견해
1965년에 미국 해군 해양국이 우리 정부에 보내온 독도 문제와 관련한 공문 한 장은 당시 독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나타내는 자료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공문 내용을 보면 미 해군 해양국은 우리 외교부에 “독도 등대 명칭에 대한 미 국무성의 방침에 의거, 자국 간행 등대 표기에 종래 ‘다케시마’ 등대로 표기된 것을 ‘독도’ 등대로 정정하기로 결정하였다”며 관련 공한을 보내왔다.
▲ 2004년 3월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북측의 유성근씨(오른쪽)가 친형 유창근씨를 만났다. | ||
이승만 정권의 몰락은 외교가에서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번 공개 문건 가운데 1960년 6월11일 주일대사 대리 명의로 외무장관 앞으로 송달된 ‘유태하 전 주일대사에 관한 보고’는 그 대표적인 예.
4·19로 이 대통령이 하야하자 당장 양유찬 주미대사와 유태하 주일대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특히 일본내 교포 사회에서의 유 대사에 대한 반감은 극도로 심각했다. 심지어 암살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위협을 느낀 유 대사는 4월30일 사퇴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변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주일대사관에 유 대사에 대한 비리 관련 자료를 요구했고 이에 대한 자료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갔다.
이에 따르면 ‘지난 5월30일 유씨의 가재도구가 두 대의 트럭으로 포장회사에 의하여 모두 옮겨진 바, 이는 망명의 표시로 보인다. 국제 관례에 따라 유씨가 일본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6월30일까지다. 유씨는 미국에 6백만불에 달하는 사재를 가지고 있다 한다. 이 막대한 재산은 부정축재에 의한 것이라 한다. 유씨는 앞으로 20일밖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사위 부부가 살고 있는 미국에 망명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재미교포들 중에도 유씨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결국 그가 망명한다면 월남(베트남)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보고서는 유씨에 대한 자체 조사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유씨는 재산문제를 포함한 모든 의혹에 대해서 전면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성근 주독노무관 실종
1973년 독일 외교관으로 나가 있던 유성근씨 가족이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결국 북한으로 간 사건은 당시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외교관이 한국에 모든 가족들을 놔둔 채 갑자기 북한으로 넘어간 이 사건은 아직도 자발적 귀순인지, 북한에 의한 납치인지 그 전모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동안 잊혔던 유씨는 지난 2004년 3월 금강산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에서 형 창근씨와 근 30여 년 만에 백발이 다된 70대 노인으로 눈물의 상봉을 했다. 하지만 관심을 모은 것과는 달리 유씨는 자신의 북한행이 자발적이었는지, 강제 납북이었는지에 대해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에 당시 사건에 대한 외교 자료가 공개됐는데, 이를 통해서도 명쾌한 답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볼 때 자발적인 행동으로 보인다”는 독일 경찰 당국의 조사 발표에 우리 정부는 “공작원의 꼬임이나 협박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확실하다”고 강하게 반박하며 맞서는 내용의 문서들로 가득하다.
이런 가운데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실종 당시의 목격자 증언이 외교 문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관심을 끈다. 이에 따르면 ‘4월5일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에 독일 프리드리히가(동베를린과의 접경지점으로 서베를린 마지막 지점)의 정거장 아래층 정류장에서 유성근 부부와 젖먹이 및 6세의 딸이 있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팔에 안겨 있었다. 유씨 가족은 정류장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후 그들은 외국인 출구로 나갔다. 그들은 거기에 서 있던 행렬 밖에서 약 15분 동안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 그 옆에 있는 서독인을 위한 출구로 옮겨갔다. 거기서 유씨 가족은 몇 분을 기다렸다. 거기서 곧 유씨 가족은 다시 행렬을 따라 외국인을 위한 출구로 갔다. 거기서 다시 그들은 10~15분 동안 서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동독 경찰은 유씨 가족 쪽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젖먹이를 가리켰다. 말로 서로 교환했는지 알 수가 없다. 동독 경찰은 유씨 가족을 출구를 통해 사람들의 행렬 쪽으로 안내했다. 거기서 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구체적 정황이 담긴 실종 직전의 마지막 목격담이 알려지면서 최소한 유씨 가족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납치된 것은 아님이 드러났다. 하지만 주독 한국대사관은 “그래도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유씨가 갑자기 북한에 넘어갈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꾐이나 협박으로 건너갔거나 혹은 실수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재현 주미 공보관장 망명
1973년 6월 워싱턴 정가에는 한 한국인 외교관의 정치적 망명 사건이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초대 주미 한국대사관 공보관장이었던 이재현씨. 73년 6월6일 주미대사는 본국의 외무장관에게 ‘긴급’ 문건을 발송했다. 이재현 공보관장이 사표를 제출하고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주미대사관 측은 미국 현지 언론 보도를 인용해 ‘부하 직원 2명이 귀국 명령을 받고도 이에 응하지 않아 본국으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한 데 대해 자신이 귀국하면 신변안전에 위협이 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사직은 그 이튿날 곧바로 정치적 망명으로 돌변했다. 그는 미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더 이상 한국 정부의 대변자로 일할 수 없다. 나는 독재와 횡포가 통치하면서 거짓 공보를 전파하고 한국이 자유국가와 같은 인상을 보여주도록 요구되어 왔다”며 자신의 처와 네 자녀를 그의 정치망명 요구의 결과를 볼 때까지 비밀장소로 데려가겠다고 밝혔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주미대사와 외무장관은 한국 정부의 이미지 실추를 염려하며 시종 대책마련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미 국무성 역시 “미국도 문제를 조용히 다루겠다. 이씨가 미국 체류 의사를 표명했으므로 한국 대사관에서 그의 선택을 방해하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며 파문이 확대되는 것을 꺼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 이 사건은 국내 언론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채 ‘동아일보’ ‘한국일보>의 미국 현지 판에서만 보도됐다. 당시 유신 체제에 대한 한국의 국제적인 여론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이 공보관장의 정치적 망명은 한국 정부에게는 큰 악재였다. 한국 정부의 이씨 처리 문제에 대한 고민의 일단은 외교부 미주국의 ‘대책’ 문건에 잘 반영되고 있다.
여기서는 ‘본건은 신속한 시일내에 조용히 종결시킴이 가장 요망됨. 재미 교포의 여론이 반정부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도해야 함. 이재현의 직무수행 정신상태 등 개인문제에 관한 비난 성명은 오히려 그에 대한 동정심을 야기하고 문제를 더욱 확대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임’이라고 적고 있다.
사건을 쉬쉬하고자 했던 우리 정부의 노력과 미국의 협조로 이 사건은 조용히 이씨의 망명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씨는 미국에서 유신을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활동하다가 지난해 7월 일리노이주에서 79세로 별세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