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영은 64강전에서 이세돌 9단을 떨어뜨리며 기세를 올리더니 32강전에서 우리 이태현 5단(24)을 따돌렸고 16강전에서 중국의 강호 퉈자시 9단(23, 2014년 제18회 LG배 우승)을 꺾어 큰 박수를 받았다. 안국현은 32강전에서 중국의 리캉 6단(27), 16강전에서는 중국의 중견 왕시 9단(30)에게 이겼다.
22일의 32강전에서 저우루이양 9단을 제압했던 안성준 5단(23)이 다음 상대 장웨이제 9단(23)에게 걸려 8강에 못 올라간 것이 아까웠다. 저우루이양은 2013년 백령배에서 초대 우승을 차지했고 올해 2월에 끝난 제18회 LG배에서는 준우승했던 실력자이고, 장웨이제는 2012년 제16회 LG배 우승자. 또 지난해부터 과감하고 독특한 실험을 시도하면서 다시금 왕년의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목진석 9단(34)은 32강전에서는 타오신란 6단(27)을 비교적 제쳤으나 추쥔 9단(32)에게 져 아쉬움을 남겼다. 8강의 나머지 한 자리는 중국의 90후 세대의 한 사람, 커제 4단(17)에게 돌아갔다. 커제는 중국의 왕야오 6단(31)을 물리쳤다.
세계대회가 열렸다 하면 우승을 도맡아했던 우리가 8강의 절반 정도 차지한 걸 갖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전후좌우 사정이 크게 달라지고 급해졌으니 이해할 만하다. 공교로운 것은 LG배 16강전 직전 국가대표-상비군 발대식이 있었는데, 한동안 중국에 밀리기만 하던 우리가 그때부터 갑자기 힘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둑은 ‘고도의 정신적 게임’이어서 승부에 임하는 마음 자세의 한 귀퉁이를 제대로 퉁겨 주기만 해도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타날 수 있다. 국가대표-상비군 체제가 즉효를 보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한국기원 주변은 사뭇 고무되어 있는 분위기다.
박정환과 김지석, 쌍두마차가 특히 든든하다. 지금 같이만 활약해 준다면 예전의 이창호 9단을 닮아갈지 모른다는 것. 그 시절 이창호 9단은 정말 믿음직스러웠다. 누구와 둬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유리하면 그대로 슥 밀어붙일 것 같았고, 불리해도 전혀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차분히 따라가 언젠가는 흐름을 뒤집을 것이고 종국에는 최소한 반집은 이길 것일 테니까. 바둑인들에게 그건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박정환과 김지석은 중국의 정상급과 엇비슷하다고 여겨졌는데, 최근 두 사람의 바둑을 보면, 이제는 중국의 톱 스리를 넘어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국가대표-상비군의 전력분석관 김성룡 9단의 말이다. “그래서 정상급 대결은 걱정이 없어요. 다만 중국의 ‘90후 신예’ 중에서 커제라는 친구가 물건 같아요. 기재도 뛰어난 것 같고, 나이도 어려서 요주의 인물이에요.” 위에서 말한 이번 백령배 8강 진출자 커제를 가리키는 것. 평소에 컴퓨터 2대를 켜 놓고 인터넷 바둑으로 스파링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요즘은 김지석이 돋보인다. 입단하면서부터 차세대를 예약한 ‘황태자’로 불린 것과는 달리 꽤 오랫동안 결정적 도약이 없어 ‘엄친아 황태자’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2012년 12월 결혼 후 상승일로다. 심리적 안정이 컸다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치열한 수읽기로 난타전을 벌이는 것이 주특기였는데, 최근엔 유연성이 가미되어 폭넓은 대국관으로 판을 이끌어 가는 솜씨가 일품”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싸우지 않는 전략으로 상대를 요리한다는 것. 이번 32강전의 바둑도 그랬다.
이광구 객원기자
백령배 흑 류싱 7단 / 백 김지석 9단 ‘동문서답’의 수로 싸우지 않고 승리 <1도>는 김지석-류싱의 중반전 장면. 백은 집이 많고 흑은 모양이 크다. 흑1은 공격개시. 하변 백 들이 위험해 보인다. 탄력은 좀 있지만, 모양은 박약하다. 백은 과연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그런데 백2, 동문서답이다. 검토실이 찬탄했다. “참 좋은 발상이다!” 흑이 백 들을 한 수로 잡지는 못할 것 아니냐.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보겠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 공격하는 쪽은 곤혹스럽다. <2도> 흑1로 여기를 이었다. 그러자 백2로 나가 한 번 더 물어보고 흑5를 보고는 6으로 기수를 돌린다. 흑7은 불가피한 수비. 백이 선수를 잡았다. 흑이 A에 잇는 것은 소용이 없다. 백B로 젖히면 그만이니까. 백8, 이번엔 이쪽을 움직여본다. 흑9, 선택의 여지가 없다. 끊어야 한다. 그러자 백10, 여기를 다시 물어본다. 포인트는 바로 이 끊음이었다. <3도> 흑1, 막아야 한다. 흑은 여기서도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자 백2로 같이 끊고 4, 6을 선수한 후 8, 이런 곳은 관절에 해당한다. 아플 수밖에. 그래서 가령 흑1로 8 자리에 늦춘다면 백도 2로 뚫지 않고 그냥 3으로 들어가고 A로 넘어갈 것이다. 이건 실리가 너무 크다. 또 백6 때 흑7로 응수하지 않으면 백B가 있다. 백B에 흑이 버티는 수는 잘 없어 보인다. <4도> 흑1부터 7까지는 일직선. 백은 돌아와 8의 곳을 끊는다. 흑9~13으로 수가 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5도> 백1~흑8로 정리하고 중앙으로 날아간 백9, 중앙 흑돌을 걷어 들인 백9, 여기가 백이 우하귀에서 움직일 때부터 점찍고 있던 작전의 종착점이었고 검토실을 숨죽이게 했던 김지석의 원모심려였던 것. 하변을 포기하고 좌중앙도 버렸지만, 우하귀 쪽에서 번 것도 있겠다, 백9, 11, 17은 그를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도> 백2 때 흑은 왜 <6도> 1로 여길 잇고 버티지 않았을까. 그게 백의 그물에 걸리는 길이라고 한다. 백은 2를 던져 놓고 4로 끊는다는 것. 패다. 흑5로 따내면 백6을 팻감으로 쓰고 8로 패를 딴다. 흑9로 나가면 백10으로 단수. 흑11로 따면 백12로 팻감을 쓰고 되딴다. 흑15로 이으면 백16. 흑은 패를 견딜 수 없다. 백은 A, B 등이 다 팻감이다. 흑이 패를 지면 바둑도 물론 끝이다. 8강전은 9월 16일, 중국 꾸이주(貴州)성의 수도 꾸이양(貴陽)에서 열릴 예정이다.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