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여자가 나하고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나?’
김 기자는 불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김일성 사망과 관련해서 여자 무속인 심진송을 취재해 유명하게 해 준 일이 있었다. 신정 전후는 사실 기사가 없는 때였다. 그는 이런 때 슬쩍 그 기사를 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사를 다시 줄이고 정리해서 데스크에 슬쩍 내밀었다. 위에서는 그게 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수지 김의 죽음이 세상에 처음으로 문제화됐다.
2000년 1월 초순경 서울방송의 남 피디는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의 다음 소재를 뭐로 할까 고심하고 있었다. 이 세상 속에 은밀히 파묻혀 있는 음습한 일들을 파헤쳐 대중이란 태양 아래 내놓는 것이었다.
그는 대담하고 유능한 피디였다. 엄청난 사이비교단의 내막을 파헤치기도 했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가고 방송국이 온통 광신도에게 포위되었어도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칭 새로 나타난 구세주라는 도망간 교주를 카메라 팀을 데리고 지구 끝까지 추적했었다. 광신도 청년들의 살생부에 그의 이름이 제일 윗줄에 오르기도 했었다. 나는 그 이단교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로 남 피디를 만나 협력하기도 하고 법정에 그를 증인으로 불러 신문을 하기도 한 사이였다.
남 피디는 그 무렵의 신문기사나 주간잡지들을 들춰보고 있었다. 우연히 <주간동아>의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87년 당시 윤태식 납북미수 사건에 의혹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뭔가 사건이 될 것 같은 직업적 예감이 들었다.
그는 바로 김완민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의 얘기를 들었다. 남 피디는 이어서 죽은 수지 김의 가족들을 만났다. 가족들은 윤태식이 수지 김을 죽인 것 같다고 호소했다. 그는 홍콩에 사는 수지 김의 친구 전화번호를 얻어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는 특파원을 통해 윤태식이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로 향하기 전날 밤 집 근처의 호텔에서 잔 사실을 발견했다. 집을 놔두고 근처의 호텔에서 잔 게 이상했다. 그리고 그 전날이 수지 김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날 중의 하나였다.
싱가포르 대사관 쪽의 당시 외교관으로 일하던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 봤다. 당시 기사들은 윤태식이 직접 한국대사관으로 갔다고 했었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당시 윤태식을 미국대사관에 가서 인수해 왔다고 했다. 남 피디는 13년 전 당시 발표된 기사와 사회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그리고 관련된 인물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수지 김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 87년 당시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 관계자, 홍콩주재 한국영사관 관계자, 일간지 홍콩특파원들을 만나 사건을 확인해 갔다. 홍콩특파원이었던 한 사람은 당시 안기부에서 나온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기사를 썼다고 했다. 당시 영사를 하던 사람은 윤태식이 거짓말을 하고 안기부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서 윤태식을 영웅으로 만들어 줬다고 했다. 당시 싱가포르 대사는 자기는 그 사건에 대해 대답할 입장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윤태식이 납북될 뻔했다는 주장은 쇼 같더라고 덧붙였다.
홍콩의 수지 김과 친하던 이웃이나 친구들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수지 김이 간첩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남 피디 일행은 윤태식과 수지 김이 살던 아파트에 가 보았다.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들어가려고 하니까 입구에서 수위가 완강히 제지했다. 13년 전에도 경비가 그랬었다고 했다. 관련자들은 윤태식의 납북미수 사건은 그의 자작극이고 그가 수지 김을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공무원인 당시 대사나 영사들도 같은 의견들이었다.
홍콩경찰의 생각도 같았다. 그들은 13년간이나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있었다. 홍콩경찰은 수지 김의 남편 윤태식을 유일하고 강력한 용의자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수지 김이 죽은 날 윤태식이 필리핀 파출부가 집으로 오지 못하게 열쇠를 받아갔던 것과 싱가포르로 떠나던 날 집에서 자지 않고 근처의 호텔에서 잤던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홍콩경찰 당국은 윤태식의 기자회견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단정했다. 윤태식을 미국대사관에서 인수했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다. 홍콩경찰 당국의 강한 단정에 오히려 남 피디가 당황할 정도였다.
결국 윤태식이 사건의 열쇠일 수밖에 없었다. 남 피디는 윤태식 회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윤태식은 국정원에서 허락을 해야 자신이 응할 수 있다고 했다. 남 피디는 국정원에 정식으로 협조요청을 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단호히 거절했다.
누군가 방해공작을 시작한 것 같았다. 예정된 관련자들의 인터뷰가 어려웠다. 남 피디는 방송사 간부들로부터 정보기관에서 프로그램 내용을 묻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여러 차례 어떤 내용이 방송될 것인지를 정보기관원들이 묻더라는 것이었다. 유혹도 있었다. 마지막에는 법원에 방송금지가처분이 신청됐다.
뭔가 있었다. 처음 수지 김 사건에 대해 기사를 쓴 김완민 기자는 군사정권하에서 수지 김이 억울한 희생양이 된 것 같다고 했었다. 그 의견이 맞을 것 같았다. 윤태식과의 인터뷰를 생략한 채 그냥 그대로 방영을 하는 쪽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방송 직전에 수지 김의 옛날 친구 현옥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했다. 그렇게 방송이 나갔다.
2001년 10월 24일 서울지검 1101호실. 고석홍 검사가 두 번째로 윤태식을 불러놓고 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윤태식은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성공한 벤처기업인이었고 거부가 된 사람이었다. 힘들게 검거를 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바로 전에 윤태식이 담당변호사를 만나 상의를 한 것 같았다.
“변호사 잘 만났어요?”
검사가 물었다.
“잘 만났습니다.”
“좋습니다. 이제부터 물읍시다. 살인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실 없습니다.”
“홍콩에 살던 수지 김의 집에 살았죠?”
“방 하나 거실 하나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 집인데 그 집 거실에 세 들어 살았었습니다.”
“수지의 외모나 성품은 어땠어요?”
“얼굴이 예쁘고 참한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지와 결혼하고 바로 혼인신고까지 했었죠? 좋아서 결혼한 건가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점이 결혼의 요인이었나요?”
검사가 물었다. 그 말에 윤태식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한때 제가 좋아해서 결혼한 여자고 또 이제는 망자인데 검사님이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좀 듣기 거북합니다.”
윤태식이 불평했다. 서기는 대화와 상황을 그대로 묘사했다.
“어떻게 가까워지게 됐죠?”
검사가 물었다.
“어느 날 저녁 수지가 술에 좀 취해 거실에서 자고 있는 저에게 자기 처지를 한탄하면서 울기에 제가 위로해 줬습니다. 그러다가 친해졌습니다.”
윤태식은 87년 1월 9일 기자회견시 하던 얘기들을 유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즉 조총련 계통의 사람들이 수지를 데려다가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안기부가 연습시켜서 익숙한 내용들이었다. 이미 검사는 그걸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답변이 막힐 때면 윤태식은 안기부에서 작성한 서류들이 있는데 그걸 봐야 기억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검사는 집요했다.
“수지가 살던 아파트 경비원들은 일본인들이 당시 수지를 데려가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하던데요?”
이미 방송사나 검찰이 현지에서 확인한 사항이었다.
“글쎄요….”
윤태식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은 수지는 잠옷차림이었는데 조총련이나 일본인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입고 있었을까요?”
언론과 검찰은 이미 실체를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윤태식이 마지못해 대답한 것 같았다. 검사가 계속했다.
“그러면 죽기 직전까지 아주 가까운 사람하고 있었다는 소리네요.”
“….”
윤태식은 점점 대답이 궁해지는 것 같았다. 안기부에선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까지 대비해서 하나하나 답변을 연습하지는 않았다.
“죽은 수지는 베갯잇이 씌워진 채 목 졸려 죽었던데 살인전문가인 북한공작원이 그렇게 어설펐을까요?”
검사의 질문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베갯잇을 덮었다는 것은 면식범이라는 얘긴데 어때요?”
“모른다니까요.”
“처가 죽었고 남편이 종적을 감추었다면 용의자 1호로 의심을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조사를 받는 게 아닙니까?”
윤태식이 발끈하는 것 같았다.
“수지 김이 진짜 북한 공작원이 맞아요?”
검사가 핵심을 파고들었다.
“저는 모릅니다.”
“당시 수지는 집세도 5개월을 내지 못하고 돈 꾸러 다니기 급급했는데 공작원이 뭐 그래요?”
검사는 확신을 가지고 서서히 그를 몰아갔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윤태식씨는 평소 사이가 나빴던 수지와 싸움 끝에 뭔가 둔기로 머리를 때려 실신시키고 그 후에 끈으로 목을 졸라 죽인 게 아닌가요?”
“그건 검사님의 추측이겠죠.”
“수지와 동거할 때 부부관계가 어땠어요?”
“저는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서로 살려고 노력한 건 사실입니다.”
“수지가 나이 많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윤태식 씨에게 고분고분 행동하지 않았죠?”
검사가 유도했다.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한테 아주 잘해줬으니까요.”
“수지의 성격이 거칠거나 싸움을 잘 한다거나 속인다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수지가 과거에 어땠는지는 몰라도 저에게는 잘해줘서 부부관계가 좋았습니다. 말싸움 한 번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면 부부싸움을 하면서 때린 적도 없어요?”
“그런 적 없습니다.”
윤태식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