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의 변명이 그대로 조서에 기록된 듯했다. 검사는 범행에 직접 관계 없는 듯한 광범위한 상황들부터 물어나갔다. 그림으로 치면 뭔지 모를 원경부터 그린다고 할까. 안기부에서 그에게 주입한 시나리오도 기록됐다. 거기 나와 있지 않은 윤태식의 즉흥적인 변명도 씌여 있었다. 빠져나가려는 윤태식 머릿속의 윤곽이 거의 담겼다 싶은 조서가 작성된 뒤부터는 그동안 내뱉어진 하나하나의 말들을 음미하듯 확인 작업이 시작됐다.
검사는 서류 한 장을 윤태식 앞에 내놓았다.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 그의 말 그대로 교도관이 적어 놓은 ‘수용자분류심사표’였다. 학·경력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동북고졸, 삼사관학교 77년 졸업, 대위예편.’
검사는 죽은 수지의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미 윤태식의 거짓말을 반박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진술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 경력 진짜 맞아요?”
검사는 이미 알면서 질문했다.
“아닙니다.”
윤태식이 대답했다. 검사는 분류심사표의 뒷장을 들췄다.
“여기 보면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이 있는 걸로 써놨던데 헬기 조종할 줄 알아요?”
“모릅니다. 제가 헬기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서 거짓말했습니다.”
“수지에게 보안사 대위 출신이라고 했었다면서요?”
“보안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위 예편했다고 했습니다.”
“사관학교 반지를 끼고 다녔다고 하던데 맞아요?”
“남대문시장 금은방에서 반지를 구했었습니다.”
“경제신문의 기사들은 윤태식씨가 홍콩의 중문대학교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걸로 보도했는데 그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중문대학교로 중국어를 배우러 다녔다고 말했는데 기자들이 자기 맘대로 기사를 쓴 것 같습니다.”
“안 해도 될 데서까지도 왜 그런 거짓말들을 했죠?”
검사가 아픈 곳을 찔렀다.
“제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다 보니까 저 자신이 진짜 동북고를 졸업하고 사관학교를 나오고 대위로 예편한 것 같이 믿어져서 그렇게 했습니다.”
거짓말도 여러 번 하면 스스로도 그렇게 착각할 수 있다. 안기부는 그를 세뇌하려고도 계획했었다.
“필리핀 가정부의 진술은 수지가 죽기 전날 그 집에 갔을 때 수지의 얼굴이 부어 있더라고 하던데 때려서 그런 거죠?”
“아닙니다. 저는 동거 기간 내내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습니다.”
“죽기 전날 저녁인 87년 1월 2일 저녁 때 그 집에 있었어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수지 친구, ‘예쁜이 박’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 알죠?”
“이름은 모르지만 아파트 가까이에 수지와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번 수지를 따라 그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진술하기를 마지막으로 수지와 함께 그 집에 있었던 1월 2일 저녁 7시경 윤태식씨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 걸 봤다고 하던데 어때요?”
“그 여자가 착각하고 다른 날 얘기를 했던 겁니다.”
“그 여자의 말은 그날 저녁 윤태식씨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고 하는데 어때요?”
“창백해 보일 일이 없었어요. 나 참.”
검찰서기는 윤태식이 그 말을 하는 순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피식 웃더라고 기록했다. 윤태식의 진술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오래전의 일이라 정말 희미합니다. 제가 당시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는 기억이 생생할 때였으니까 그 자료들을 참고하시면 정확할 겁니다.”
안기부 요원들이 만든 공작시나리오를 말하는 것 같았다.
“윤태식씨는 87년 1월 초순 당시 방콕과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셨죠? 그 내용이 뭐였죠?”
검사가 그 부분을 일단 물었다.
“그러니까 87년 1월 2일 저녁을 먹은 후였는데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때 일본말을 하는 삼십대 남자 세 명이 수지를 찾아 저희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수지와 거실에 들어가 얘기했고 저는 그때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수지가 저를 보고 담배와 음료수캔 몇 개를 사오라고 해서 집 근처 편의점에 갔다 왔는데 모두 없어졌다는 얘기였습니다.”
“당시 인근 편의점에서 음료수 캔 몇 개를 샀다는 거죠?”
검사가 지나치듯 사소한 사항을 물었다.
“그렇습니다.”
“여기 홍콩경찰이 아파트를 조사한 실황조사서를 보면 음료수 캔이 없던데….”
검사는 작은 거짓말부터 지적하고 있었다.
윤태식의 대답이었다.
“사오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없는 거 아닐까요?”
“….”
윤태식이 순간 침묵했다. 검사는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
“아파트 경비원도 수지가 다른 남자들하고 나가는 걸 목격하지 못했다고 홍콩경찰에 진술했는데요.”
아파트 입구는 하나였고 경비원이 항상 외부 손님을 체크하는 시스템이었다. 은밀한 침투가 아니면 경비원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윤태식이 몰리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윤태식이 자포자기한 듯한 대답을 했다. 검사가 물었다.
“가까운 편의점에 갔다 왔더니 수지와 함께 이상한 남자들이 모두 없어졌더라 이런 주장이죠?”
“사실이 그렇습니다. 집에 돌아오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수지와 그 사람들이 나가서 근처 호텔의 커피숍에서 얘기하나 보다 생각했어요. 밤 12시까지 기다렸어요. 그래도 수지가 오지 않아 근처 호텔을 찾아보고 돌아와 전화를 기다렸죠. 그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자정이 넘도록 수지가 오지 않으면 경찰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죠?”
“다음날 그 남자들이 다시 저를 찾아와 서툰 한국말로 남편이니까 수지가 차용한 돈을 변제하라고 했습니다. 수지는 돈이 없어 싱가포르로 먼저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보고 싱가포르에 가서 돈을 꿔준 사람에게 차용증을 쓰고 수지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싱가포르에 갈 때 필리핀 가정부로부터 열쇠를 받은 이유가 뭐죠?”
검사는 가정부가 시신을 발견할 수 없도록 한 점을 찔렀다.
“문을 열어놓고 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열쇠를 받아 아파트 문을 걸고 가려고 했습니다.”
윤태식의 방어였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날 밤 집 근처의 호텔에서 잤던데 왜 집을 놔두고 굳이 동네에서 잤을까요?”
윤태식은 그 이유를 대지 못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해서는 어떻게 했죠?”
“공항출구 쪽에서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던 이십대 여자를 만났습니다. 주소가 적힌 메모를 저에게 주면서 택시를 타고 거기로 가면 수지를 만날 거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죠? 정말 돈 문제라면 바로 윤태식씨를 데리고 가면 됐을 텐데.”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그 주소로 갔죠. 북한대사관이었습니다. 정문 앞에서 멈칫하니까 전날 본 여자가 안에서 나오더니 거기 수지가 있다면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수지가 거기 있다니까 어쩔 수 없이 들어갔죠. 그곳 사람들이 저보고 스위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망명하라고 했습니다. 망명 이유도 만들어 줬습니다. 야당정치인에게 자금을 대주다가 압박을 받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호텔방을 잡아줬습니다. 로비에는 북한대사관 남자 두 명이 지켰죠. 방에서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북한에 가면 어떻게 되나 하고요.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호텔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살펴보니까 그 남자들이 없었어요. 현관 앞에 택시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얼른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수지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어요?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또 수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북한대사관 안에도 들어갔는데?”
“당시 수지의 가족에게 연락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후 수지 가족에게 연락한 적이 있어요?”
“없습니다.”
“수지의 변사체가 발견된 후 윤태식씨는 그 인수도 거절한 것으로 되어 있던데?”
“당시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어 경황이 없었습니다.”
“목숨까지 바치면서 사랑했다는 여자의 시신을 홍콩당국의 행정처리에 맡겨놨다 이 말이죠?”
“당시 제가 돈도 없었고 시신을 인수하더라도 어떻게 처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수지의 시신이 발견됐다면 북한공작원이었다는 그간의 누명을 풀어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
윤태식은 말이 없었다. 검사는 홍콩에서 얻어온 수사자료 중 수지 김의 사체 사진을 윤태식 앞에 내놓았다. 순간 윤태식이 고개를 돌렸고 이후 말수가 줄어들었다고 검찰서기는 조서에 썼다. 검찰서기는 그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숨을 쉬더라고 당시 상황을 조서에 묘사해 놓고 있었다.
윤태식의 거짓말은 너무 허점이 많았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거짓말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윤태식이 북한대사관에 들어갔던 상황에 대해 북한은 북한대로 자기들의 방송 등을 통해서 보도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윤태식이 찾아온 뒤) 북한대사관은 평양에 윤태식의 망명을 받아주어도 되는지 문의했다. 그리고 평양으로부터 망명을 받으라는 회신을 받았으나 윤태식은 그날 오후 1시경 대사관에서 지정한 장소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윤태식은 자신이 이혼한 경력이 있고 두 딸이 있다고 말했지만 수지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었다.’
윤태식은 진짜 북한으로 갈 수도 있었던 것 같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