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씨는 결국 며칠이 지나지 않아 친자 확인 유전자 감식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한번 시작된 아내에 대한 의심은 꼬리를 물었고 남들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느니 아내 몰래 친자 확인 검사를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유전자 감식업체 코젠 바이오텍 관계자는 “친자 확인 유전자 감식 의뢰는 주요 업체별로 한 달에 30여 건에 이르는데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후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한다”며 “남성들의 경우 친자 확인을 결심하게 되는 가장 큰 계기는 아이와 닮지 않은 것을 스스로 고민해 왔다거나 주위의 부추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혼전 또는 혼외 정사가 확산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과 더불어 혼전 임신으로 결혼을 앞당긴 경우가 많아 아이가 태어나면 ‘정말로 내 자식이 맞나’ 확인을 해보고 싶은 남성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 4~5년 전에 비해 약 20%까지 증가했다는 분석이다. 주 고객층은 30대 남성으로 의사나 벤처 회사 사장 등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고학력 소지자가 많고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에 민감한 젊은 남성들이다.
한 유전자 감식업체 관계자는 “의뢰 건수 중 80~90%는 친자로 확인된다”며 “결과가 나온 후 ‘괜한 의심을 했다. 아내에게 더 잘 하겠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자 확인을 의뢰했다가 아니라는 결과에 괴로워하는 고객들을 보면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전했다. 업계 관계자들에게서 기억에 남는 사례들을 들어보았다.
얼마 전 한 업체에 환갑을 넘긴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찾아왔다. 친자 확인을 의뢰하는 주 고객은 젊은 남성들인데 의외의 경우였다. 알고 보니 이들은 부부는 아니었다. 이 커플의 사연은 이랬다.
이 60대 남성은 젊은 시절 지방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됐고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혼자 내려온 탓에 마침 그 지역에 살고 있던 후배 부부 집을 자주 들르게 됐다. 그러나 후배 부인은 남편에게 자주 매를 맞고 살았고 그때마다 위로해 주다 보니 어느 새 정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분위기에 취한 두 사람이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후 파견 근무가 끝나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됐지만 1년 후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후배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혹시나 자신의 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각자의 가정이 있었던 탓에 20여 년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다. 그러다 최근 둘 다 배우자가 사망하면서 뒤늦게 친자 확인을 하게 된 것이었다. 결과는 친자. 이 60대 남성은 “아들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뒤늦게 딸을 얻었다”며 무척이나 흡족해 했다고 한다.
반대로 친자가 아니었던 경우 혼자서 아이를 키우던 30대 미혼모의 사연도 기구했다. 이 여성은 40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고 몇 년 동안 혼자서 아이를 키워오다 최근에야 친자 확인을 의뢰했다. 상대 남성은 병원 진단 결과 무정자증이었고 유전자 감식 결과 역시 친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이 여성은 아직도 ‘그 사람의 아이다’라고 생각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2005년 1월 이후 임신 중 친자 확인이 법으로 금지되기 이전에는 대학생 커플들의 친자 확인 의뢰도 많았다고 한다. 이 경우 결과는 반반. 남자가 “내 아이가 아니다”라고 책임을 회피하다 친자로 확인되는 경우 그 자리에서 여자 측으로부터 면박을 당하기도 하고, 반대로 여자가 당당하게 “네 아이가 맞다”며 친자 확인을 의뢰했는데 친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면서 조용히 자리를 뜨는 사례도 있었다.
최근 한 업체를 찾은 20대 초반의 남성은 헤어진 여자 친구가 2년 만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며 친자 확인을 의뢰했다가 결과가 나온 순간 애 아빠가 돼 버렸다고.
결혼한 부부들의 경우에는 “의처증 때문에 못 살겠다. 이 자리에서 억울함을 풀겠다”며 부부가 함께 내방하는 경우도 있고 혼전 임신으로 마지못해 결혼을 했다가 아기가 태어난 후 바로 친자 확인에 들어가 아닌 것으로 나오면 바로 이혼 절차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우진 유전자 연구소의 황춘홍 대표는 “최근에는 단순히 내 아이가 맞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검사를 하는 것보다 이혼 소송 과정 중에 위자료, 양육권, 호적 정리 등에 필요한 법적 서류를 만들기 위해 친자 확인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기일보>에 따르면 지난 10일에도 수원지법에 이혼과 함께 양육비 등의 위자료 5000만 원을 요청했던 30대 여성이 남편의 요청으로 이뤄진 친자 확인 유전자 감식에서 친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결혼이 무효화되고 오히려 1000만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게 된 사례가 있었다. 이 같은 법원의 판결은 최근 들어 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현장에서 다양한 사례를 접하는 유전자 감식업체 관계자들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자를 의심하는 경우도 보았다고 전한다. 빈번한 사례가 바로 아이의 혈액형에 관한 문제. 업계 관계자는 “고객들이 제일 의아해하는 경우가 자녀가 부모로부터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을 가지고 태어난 경우인데, 혈액형 돌연변이의 경우 유전자는 일치해도 혈액형이 다르게 나올 수 있다”며 “이 경우 결과가 잘못 나온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고객들이 종종 있다”고 전한다.
또 친자 확인과는 별개로 배우자의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의뢰하는 사례도 있는데 연구소로 들어오는 여자 및 남자 속옷이 그것을 증명해준다고 한다. 아내의 경우 남편의 속옷에 피가 묻어 있으면, 남편의 경우 아내의 속옷에 정액 비슷한 분비물이 묻어있으면 불륜을 의심한다고.
업계 관계자는 “이는 서로의 생리 현상을 잘 모르는 데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고 말한다. 한 번은 남편의 속옷에 묻은 혈흔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려는 아내와 ‘억울하다’며 함께 온 남편이 결과를 듣기 위해 함께 연구소를 찾았다. 유전자 감식결과 그 혈흔은 치질에 걸린 남편의 것.
반면 여성의 신체와 생리 현상에 무지한 남편들은 종종 아내의 속옷을 보고는 불륜을 의심, 유전자 감식을 의뢰하곤 한다고 한다.
자유로운 성문화로 인한 배우자의 불륜과 그 의심이 빚어낸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