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고속철도 공사에 대한 건설사 입찰담합이 적발돼 역대 건설사 담합 과징금으로는 최대 규모인 4355억 원이 부과됐다. 이번 입찰에서 탈락했지만 여러 군데에 들러리를 서 과징금 순위 3위에 오른 현대건설의 사옥.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사다리타기, 뽑기, 주사위 굴리기….’
엠티 때 하는 게임도, 아이들 놀이도 아니다.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건설사 간부들이 모여서 한 일이다. 판은 ‘역대급’이다. 게임을 통해 선정된 업체는 총 3조 5000억 원에 달하는 호남고속철을 ‘나눠 먹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공정위가 공개한 호남고속철 담합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지난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한국철도시설공단은 184.5㎞에 달하는 호남고속철 공사 발주를 한다. 발주가 시작되자 국내에서 손꼽히는 건설사들이 모두 달라붙었다. 참여한 곳은 28개 건설사.
가장 많은 13개 공구는 최저가 낙찰제를 적용했다. 3개 공구에는 대안방식을, 차량기지는 턴키방식으로 발주를 냈다. ‘대안’이란 정부의 원안과 달리 입찰자가 별도로 마련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건설사가 제시하는 대안은 기본 방침은 같지만, 정부설계보다 기능이나 효과가 뛰어날 때만 인정된다. 또한 예정 가격이 정부가 제시한 것보다 낮고 공사 기간은 짧아야 한다. ‘턴키’는 시공자가 설계와 시공을 모두 담당하는 방식이다.
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건설 불경기. 혼자만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상황. 건설사들은 곧바로 담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최저가 낙찰제는 담합 자체가 어렵다. 고려 항목이 가격밖에 없는 까닭에서다. 어떤 업체가 어떤 가격을 쓰는지에 따라 공사를 따내는 업체가 달라진다. 한 업체가 불쑥 나와 적당한 가격을 내버리면 다른 업체들이 담합에 공을 들여도 끝이다.
최저가 낙찰제가 담합이 어려운 이유는 입찰에 참여하는 업체가 너무 많다는 것에도 있다. 턴키방식은 입찰에 참여할 때 설계가 고려 항목에 들어간다. 낙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설계에 건설사는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건설사가 입찰 참여를 위해 설계에 들이는 돈만 한 건에 30억 원에서 많게는 50억 원에 달한다. 입찰에 실패하면 설계에 들인 이 돈은 모두 날아간다. 그래서 턴키방식의 입찰에 참여하는 기업이 적게는 2개에서 많아도 5개 정도다. 건설사 서너 개 업체가 담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최저가 낙찰제는 설계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참여하는 기업이 적게는 10개에서 많게는 25개에 이른다.
최저가 낙찰제는 담합이 성립하기도 어렵지만 모든 업체의 입을 막는 것도 쉽지 않다. 한 업체라도 탈락에 불만을 품고 공정위에 신고라도 하게 되면 담합이 적발되기 때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그동안 최저가 낙찰제 담합 건이 많지 않았던 이유는 최저가 낙찰제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호남고속철 담합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치밀했다. 최저가 낙찰제에 해당하는 13개 공구에 참여한 28개 건설사, 즉 모든 공구에서 모든 업체가 담합에 가담했다. 문제는 참여한 건설사는 28개지만 공구는 13개뿐이라는 점이다. 모두의 입을 막기도 어렵고 그 중 불만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시장을 주도하는 주요 7개 업체, 소위 ‘빅7’이 주도한 이번 담합의 얼개는 이렇다.
지난 2009년 12월 4일 광주 송정역에서 열린 호남고속철도 기공식. 사진제공=청와대
대림산업, 대우건설, 삼성물산, SK건설, GS건설, 현대건설, 현대산업개발의 빅7을 A그룹, 그보다 규모가 작은 5개 업체를 B그룹, 그보다 더 규모가 작은 12개 업체를 C그룹으로 나눴다. 이렇게 나눈 3개 그룹에 A그룹에는 5개 공구, B그룹에는 4개 공구, C그룹에도 4개 공구를 맡을 수 있게 했다. 각 그룹에 배정된 공구에 어떤 기업이 들어갈지는 추첨으로 정했다.
입찰에 참여한 28개 건설사 중 A, B, C그룹에 끼지 못한 건설사와 그룹에 들어갔지만 추첨에서 떨어진 회사들은 들러리에 서는 것으로 합의했다. ‘들러리’는 낙찰을 위한 투찰이 아닌 담합이 표 나지 않게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총 28개 업체 전체가 담합에 참여하게 됐다.
빅7으로 이뤄진 A그룹 중에서는 당시 시공능력평가액 1위였던 현대건설과 3위였던 대우건설이 탈락했다. 호남고속철 담합의 독특한 점은 빅7의 ‘양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빅7가 먼저 공사를 따낸 후 나머지를 추첨으로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호남고속철은 모두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빅7도 희생이 필요했고 그에 따른 희생양이 추첨을 통해 1위와 3위 업체인 현대건설과 대우건설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최저가 낙찰제는 사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가격이 가장 저렴한 업체가 선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 너무 낮으면 부실 공사의 위험이 있다. 공사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장 낮은 가격을 제출한 기업을 제외하고 최저가로 입찰한 기업을 선정한다. 따라서 담합 때는 건설사들끼리 금액을 조정해 겉으로 보기에는 티 나지 않게 만들면서 추첨을 통해 선정된 기업이 낙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들러리가 꼭 필요하다. 들러리에만 참여하는 기업에도 이유는 있다.
최저가 낙찰제에서 선정된 기업이 해당 공구를 전부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공구의 일정 부분을 지분으로 해서 들러리로 참여한 기업에게 나눠준다.
13개 공구 낙찰 예정 기업은 1차 입찰일인 2009년 9월 22일 이전에 발주처 예정 가격의 76%에 맞추기로 합의했다. 경쟁이 없어지자 실제로 낙찰된 금액은 그보다 더 높게 형성돼 78.53%선에서 낙찰됐다. 2011년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최저가 낙찰제에서 낙찰가는 발주처 예정 가격의 73%선에서 결정되는 것에 비춰보면 약 7.5% 정도(73%를 100으로 산정시) 비싼 값에 낙찰 받은 셈이다.
현대건설은 비록 추첨을 통해 빅7에 할당된 공구에서 탈락했지만 들러리로 서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했다.
현대건설은 13개 공구 이곳저곳에 들러리로 참여했다. 그런데 과징금은 들러리로 선 횟수만큼 누적돼 부과된다. 기업이 과징금을 낼 수 있는 여건도 고려한다. 그래서 법정관리 기업이나 워크아웃(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작업) 중인 기업은 과징금을 경감 받는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현대건설은 ‘최악’의 경우가 된 셈이다.
시공능력 평가액 1위 기업인 현대건설은 들러리로만 참여했음에도 과징금 380억 원이 부과됐다. ‘4-1공구’를 받은 삼성물산, ‘3-3공구’를 받은 대림산업에 이어 과징금 액수 3위에 해당한다. 역시 과징금을 부과 받은 한 건설사 관계자는 “공구 하나도 못 맡은 현대건설이 과징금을 세게 부과 받은 것에 대해, 현대가 직접 말을 하지 않아도 업계에서는 측은하게 보는 시선이 있다”고 전했다.
대안공구에서 ‘1-2공구’는 삼성물산이 SK건설에 상호 간 투찰가격을 정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고, 나중에 참여한 경남기업에 투찰 가격을 정하여 통지하기도 했다. ‘2-3공구’에서는 현대건설이 동부건설에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 실행률, 투찰률, 투찰 방침 등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턴키방식의 차량기지 공사에서는 대림산업, 대우건설, 삼성물산의 직원들이 광화문역 근처 카페에서 모여 ‘사다리타기’를 했다. 사다리타기로 각 사의 투찰 액수를 정한 것이다. 이후 각 회사는 사다리타기를 통해 정한 대로 하는지 각 사 직원들이 참관 하에 투찰했다.
턴키방식은 담합의 유혹이 더욱 크다. 건설사가 턴키에 입찰하기 위해 준비하는 설계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건설사가 들러리로 참여하면 낙찰 받은 기업은 입찰할 때 발생한 설계비의 일부를 보전해주고 지분도 나눠주기 때문에 턴키방식이 담합 유혹이 크다”고 말했다.
처음 호남고속철 의혹을 제기해 과징금 부과를 이끌어 낸 이미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 관계자는 “담합은 내부 고발이 없으면 적발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적발했을 때 일벌백계 해야한다”며 “이번 과징금은 비록 사상 최대라고는 하나 호남고속철 건 이외에 담합으로 축적해온 이익에 대한 처벌 차원에서도 부족하고, 앞으로 있을 담합을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생각해도 부족하다”고 밝혔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과징금 ‘폭탄’ 맞은 건설업계의 항변 “원인 제공자는 발주처” 과징금은 부과 이후 60일 이내에 납부해야 한다. 이번 호남고속철 담합 건과 관련해 과징금을 납부해야할 건설업계는 울상이다. 비교적 과징금 규모가 큰 A 건설업체 관계자는 “과징금 액수가 심하다. 너무한다고 생각한다”며 “행정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다 낼 수는 없지 않느냐”며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 선처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D 건설업체 관계자는 “건설경기도 어려운데 과징금 액수가 과다하다”며 “지난 23일 국회에서 건설사 사장들이 입찰 담합에 대해 선처를 구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것을 믿고 공정위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조금은 (징계 수위를) 낮춰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미경 의원실 관계자는 “그것은 20년 전부터 하던 이야기”라며 “지금 와서 바꾼다는 말을 한들 그 말에 진정성이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호남고속철 전체 공사비 3조 5000억 규모에 과징금이 4354억 원가량으로 대략 12%를 넘는다. 담합으로 높아진 금액이 약 7.5%라고 생각한다면, 과징금의 규모가 적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건설사 담합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과징금 산정 기준도 도마 위에 올랐다. 공정위는 공식으로 산출한 과징금 부과액에 현실적 납부 능력과 시장과 경제 여건을 고려해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쉽게 말해 돈이 많은 기업은 돈을 더 내고, 돈이 적은 기업은 조금 줄여줬다는 것이다. 워크아웃 기업이나 법정 관리 기업 중에는 전액 탕감된 곳도 있다. 이에 대해 A 건설업체 관계자는 “장사 잘하는 기업이 죄인도 아니고 열심히 영업이익을 올리면 과징금 액수만 높아지는 것 아니냐”며 “그럼 워크아웃 기업이나 법정관리 대상 기업은 계속 담합을 해도 되는 거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번 과징금 부과로 인해 담합이 줄어들 것으로 보는 건설업체는 많지 않았다. B 업체 관계자는 “우리는 이번 과징금 부과를 계기로 담합을 안 하겠다”고 말하며 선처를 구했다. 하지만 업체 관계자들은 제도 개선부터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A 건설업체 관계자는 “호남고속철처럼 큰 공구를 시공할 수 있는 업체는 많아야 10개 정도다. 그런데 13개 공구를 한 번에 발주하면 담합하라는 소리 밖에 더 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C 건설업체 관계자는 “제도 개선을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는 못하지만, 학계와 정부 관료들이 머리를 모아 개선된 제도를 만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도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공정위는 과징금을 부과하는 곳”이라며 “발주하는 정부 각 부처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답했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