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열린우리당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 장면. 정동영 의장, 김근태 의원, 한명숙 전 장관 등이 손을 맞잡은 채 기뻐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런 역사적 함의를 담고 있는 17대 국회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먼저 탄핵안 처리 결과가 초미의 관심사다. 열린우리당은 탄핵 처리가 정국 정상화의 기본 전제요소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문제가 처리된 뒤에 본격적인 여야의 대화와 타협이 있을 전망이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도 관심을 모은다. 오는 10월 또는 내년 4월에 열릴 재보궐 선거도 중요한 정치적 고비다. 각 당의 당선자 수에 따라 자칫 여대야소의 구도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 각 당의 정책공조 방향도 눈여겨볼 대목. 마지막으로 4년 중임제를 선호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개헌을 두고 한목소리를 낼지도 관심사다. 17대 총선 그후 ‘5대 궁금증’을 점검해 본다.
△탄핵안 처리=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여야 간의 입장은 탄핵안 가결 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수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케 했고 총선에서도 탄핵에 대한 심판론이 주효해 열린우리당의 승리를 가져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국회의원 1백93명이 찬성한 이 정치적 결정에 대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쉽게 그 명분을 포기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는다.
열린우리당은 야당에 줄기차게 탄핵안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사실상 ‘재신임’을 받은 것인 만큼 더 이상의 탄핵심판 절차 진행은 무의미하다는 것. 그래서 탄핵 가결 장본인들이 스스로 대통령 ‘궐위상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이에 대해 동조음을 내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표는 “헌재로 넘어간 일이므로 헌재의 판단을 기다리고 존중해야 한다”면서 “다른 문제로는 얼마든지 (정동영 의장과) 만날 수 있으나 헌재의 심리에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탄핵을 얘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총선 뒤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헌재 결정을 기다리자’고 응답한 사람이 52.4%에 이르렀던 것도 한나라당의 주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탄핵 정국의 최대 피해자인 민주당도 한나라당과 비슷한 입장이다. 하지만 이낙연 의원 등 일부 호남지역 당선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에 우호적이고 탄핵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밝힌 터라 기존 입장의 변화도 예상된다. 민주당 구주류와 지역구 당선자 사이에서 탄핵안 처리를 두고 거리감이 커지고 있는 게 민주당 입장 선회의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헌재는 정치권 안팎에서 기각 결정 ‘압력’을 받고 있지만 원칙적인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헌재가 탄핵 결정을 17대 국회 개원 이후로 늦출 경우 소추위원 구성 및 재판 진행상의 어려움 등이 있기 때문에 탄핵 결정은 16대 국회가 끝나기 전까지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헌재가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탄핵취하 논의에 대해서도 재판부 내부에서 검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히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민주당·자민련 운명=새천년민주당은 창당 4년 4개월 만에 존폐의 기로에 섰다. 1백80만 당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배출한 전통의 민주당이었지만 탄핵 역풍에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 한때 3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제1당을 넘볼 때도 있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7.1%의 정당지지율을 얻었을 뿐이다. 지역구 5석에 비례대표 4석의 미니 정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 지난 15일 투표권을 행사한 노무현 대통령.청와대사진기자단 | ||
과연 이 두 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먼저 둘 다 호남과 충청에 주요 기반을 둔 정당인데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지역 맹주’ 자리를 뺏겨버려 더 이상 정당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있다.
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당내 개혁은 뒷전이고 지도부간의 권력다툼에만 빠져 민심 이반을 자초했다. 더욱이 한나라당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호남 민심을 등한시한 채 한나라당과 공조해 탄핵안을 가결시킨 것이 당의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3김 시대가 종막을 고하는 시대적 공감대를 읽지 못하고 DJ 정서에 호소해 표를 얻으려던 당 지도부의 구태의연했던 선거운동 방식도 문제였다.
민주당은 이낙연 의원 등 지역구 당선자들이 탄핵 철회에 동조하고 노 대통령과의 우호적 관계를 내세워 열린우리당과의 통합을 주장할 수도 있다. 이때 김종인 손봉숙 비례대표 당선자 등과의 마찰이 예상되는데 결국 ‘좌장’ 격인 한화갑 의원의 선택이 당의 앞날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자민련도 ‘김종필 1인 체제’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응이 결국 몰락을 가져왔다. 차기로 떠오르는 이인제 의원도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라 자민련은 자칫 지역구 의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재보궐 선거=“총선 위에 재보궐이 있다.” 17대 총선이 끝난 뒤 정치권에서 돌고 있는 얘기다. 이번 총선에서 불법 선거에 따른 선거 무효 판결이 16대보다 대폭 늘어날 전망이라 재보궐 선거에서 자칫 현재의 여대야소 구도가 뒤바뀌게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다. 열린우리당의 의석이 과반수에서 단 2석만의 여유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니다.
먼저 선거 사범에 대한 검찰의 입장은 강경하다. 송광수 검찰총장은 지난 4월19일 총선 선거사범에 대해서는 다른 사건에 우선해 최대한 신속하고 엄정하게 수사하도록 일선 검찰에 특별 지시했다고 한다. 지난 16대 총선의 경우 당선무효가 선언된 후보는 서울 종로의 정인봉 의원 등 모두 11명이었다. 15대 총선 때는 6명, 14대 총선 때는 당선무효 후보가 아예 없었다. 하지만 이번 17대 총선에서는 예전과 상황이 크게 다를 전망이다.
17대 총선은 불법 선거 적발 건수가 16대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다고 한다. 총선 당선자 2백43명 가운데 53명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 수사중이라고 한다. 당선자의 배우자와 선거사무장 등 8명도 입건 상태다. 이 중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고발한 24건 정도는 그 혐의가 매우 위중해 당선 무효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선거관리위원회도 엄격한 회계 실사 작업을 통해 불법 사범을 밝힐 예정이어서 당선자들은 더욱 가혹한 법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처지다.
또한 총선 전 일반 형사사건으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당선자도 7명이나 돼 이들의 사법 처리 여부에 따라 몇 개 지역구에서는 재보궐 선거가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여러 가지 경우를 모두 계산한다면 30여 개의 지역구 정도는 당선 무효에 따른 재보궐 선거가 실시될 전망이다. 이 정도의 의석 규모라면 현재의 여대야소 구도를 뒤집기에 충분한 수다.
△5당 시대 정책공조=17대 국회는 열린우리당이 책임여당으로서 그 역량을 시험받는 실질적인 첫 무대가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에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 정국을 주도해나갈 전망이다. 하지만 무조건 강경책만을 구사할 경우 야당의 역풍에 밀려 16대 국회처럼 정국이 또 다시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이 중심이 되는 각 당의 정책 공조도 중요한 관심거리다.
▲ 개표과정을 지켜보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원장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시사주간지공동취재단 | ||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도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이 손을 내밀어야 할 ‘우군’으로 분류된다. 또한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여당 독주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원활한 국회운영을 위해 민주노동당과의 전략적 공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진보세력과 손잡는 것이 자칫 보수세력에 ‘불안정’ 이미지와 함께 색깔론 시비에도 휘말릴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총선 전 일부 지역구에서 열린우리당 후보와 민주노동당 후보 간의 공조가 모색됐으나 결국 무산된 것도 이 같은 우려가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당의 정체성이 모호할 정도로 이념의 분화가 심화돼 ‘잡탕’ 소리까지 들은 열린우리당이 선명 야당을 강조하는 민주노동당과 얼마나 이념적인 보조를 맞출 수 있을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에 공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는 “필요하다면 어느 당과도 정책공조를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두 당도 사안에 따라 ‘야당끼리’ 공조를 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한나라당 소장파 일부에서는 당의 정체성을 전통 보수에서 중도 보수로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어 사안에 따라 민주노동당과도 협조가 가능할 전망이다.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은 “17대 총선의 뜻은 우리 사회에 진보라는 이념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전통 보수이긴 하지만 이제는 중도쪽으로 그 대역을 더욱 넓혀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임제 개헌론=앞서 각 당의 공조를 살펴보았지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한 배를 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안이 개헌 문제다. 먼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3월 중순 “이번 총선에서 4년 중임제 개헌을 공약으로 제시하는 방안을 당내에서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비록 이 뜻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박 대표 또한 4년 중임제가 평소 자신의 지론이라고 밝힐 정도로 개헌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다.
열린우리당의 입장은 좀 복합적이긴 하지만 중임제 개헌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2월 총선 10대 핵심 공약사항에 중임제 개헌론을 넣었다. 2007년 12월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실시하고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추진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당시 공약이기도 했기 때문에 승계해도 괜찮다는 판단하에 애초 핵심공약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 정동영 의장의 지시로 황급히 중임제 공약을 빼버렸다. 정 의장은 “이번 선거에서는 낡은 정치세력과의 싸움에 온 힘을 집결할 것이며 총선 전에는 개헌론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당시 대선자금 수사 국면에서 개헌론이 쟁점화되는 것이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개헌론은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총선 뒤 다시 재점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 의장이 당시 “총선 전에는 개헌론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4년 중임제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를 반영한다. 이 문제는 당리당략을 떠나 한국 권력 구조의 개편이라는 대의명분에 두 당이 합의한다면 전격 성사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