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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지김 | ||
한동안 그는 촉망받는 기업인이자 거액의 재산을 가진 기업 회장이었다. 지금은 살인죄가 확정된 기결수였다. 게다가 강금실 법무장관은 감옥에 있는 그에게 다시 43억 원의 구상금 청구를 하고 있었다. 그건 또 다른 경제적 사형선고였다. 난 그의 살인죄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판결문을 보면 판사가 이미 살인으로 결론지어 놓고 부족한 증거를 억지로 조립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하얗게 햇빛의 폭포가 쏟아지는 아스팔트광장 동쪽 구석의 사동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철컹” 하고 쇠빗장을 열었다. 동굴 같은 음습한 복도가 나왔다. 곰팡이 냄새가 공기 속에 가득했다. 2층 구석의 유리박스 안에 펑퍼짐한 얼굴의 윤태식이 앉아 있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구상금 청구사건 때문에?”
그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요. 그냥 먼저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서 왔어요.”
법정에서는 그의 진짜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진실을 밝힌다고 하지만 때로 법정이란 참 위선적인 장소였다. 높은 법대 위에서 붉은 주단 등받이 앞에 검은 법복을 입은 판사들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했다. 검사는 공소장이란 시나리오를 빈틈없이 밀어붙이는 배우였다. 다른 의견이 들어갈 여지가 바늘끝만큼도 없었다.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승부욕과 거기에 걸린 돈만이 중요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부자연스러운 무대장치 속에서 모두들 진실과는 다른 말들을 뱉어내곤 했다. 진실과 오롯한 감정들은 한바탕 법의 굿판이 끝난 후에 고개를 내밀곤 했다.
사실 난 그에게서 폭행치사 정도의 냄새밖에 맡지 못했다. 직업상 살인범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들에게는 독특한 빛깔과 냄새가 있었다. 킬러에게서는 원인 모를 서늘한 퍼런 기운이 감지됐다. 난 살인범들의 눈동자들을 살피곤 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건 살인 초보자들의 행동이었다. 노련한 인간백정은 표정도 눈빛도 감출 수 있었다. 난 그들의 눈동자 수레바퀴 가운데의 작은 구멍을 열심히 보곤 했었다. 악령의 검은 실루엣이 그 속에서 나를 비웃는 걸 느끼곤 했다. 인간에겐 또 다른 감지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윤태식이 나를 한참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완전히 망가진 인생이에요. 뭐 굳이 밝히지 못할 일도 없고 숨길 게 아무것도 없죠.”
그가 팔짱을 낀 채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하기야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정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검사가 폭행치사나 상해치사로 하면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에 그래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어요.”
담당검사가 진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다.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윤태식의 원망을 희석시키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일환인지도 모른다. 그가 계속했다.
“사실 수지가 성질이 대단했어요. 그래서 더러 부부싸움을 했죠. 그날도 다퉜는데 수지가 발칵 화를 내면서 제가 잡고 있는 손을 확 뿌리치고 뛰쳐나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벽 모서리에 이마를 박고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침대 끝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부딪쳤어요. 그런데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제가 놀라서 뺨을 때려보기도 하고 물을 컵에 따라서 먹여봤어요. 거품을 뿜으면서 눈동자를 하얗게 부릅뜨더니 완전히 늘어지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면서 벽에 부딪친 게 아니라 그가 무언가 들고 때린 건 아닌지 상상했다. 여자가 성질이 강했다면 되게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또 술에 취했다면 그렇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검시보고서에 나타난 상처의 크기를 떠올릴 때 그의 말은 언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아직은 순진한 이십대였고 더구나 거기는 낯선 외국이 아닙니까. 저는 수지가 일단 죽은 걸로 알고 겁이 확 났죠. 말도 안 통하는데 바로 잡혀서 사형을 당할 것 같았어요. 순간 떠오른 게 창살에 끈을 묶어 수지가 자살한 것처럼 만들자는 거였죠. 사실은 거기서부터 잘못됐어요. 저는 목매서 자살한 걸로 하기 위해 끈으로 수지의 목을 졸랐죠. 끔찍한 모습이 보기 싫어서 베갯잇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에 했어요. 그리고 수지를 끌고 창살 밑으로까지 갔어요. 그런데 끈을 창살에 묶어 보니까 이게 도저히 길이가 맞지 않는 거예요. 당황해서 미처 그 계산을 못한 거죠.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다음은 누군가 침입해서 수지를 살해하고 침대 밑에 시체를 숨긴 걸로 꾸몄죠.”
그 말은 사실 같았다. 쌍꺼풀 진 커다란 눈은 겁이 많게 생겼다. 그러나 그는 너무 이기적이고 잔꾀만 앞서 있었다.
“수지가 죽을 무렵은 저희가 만난 지 3개월밖에 안 되던 때였어요. 스물일곱에 홍콩으로 혼자 간 제가 하나님같이 기댄 사람이 수지였습니다. 사실 제가 왜 그 여자를 죽이겠습니까? 저는 나이도 많은 수지를 여왕같이 모시고 수지 역시 나를 하인 정도로 여긴 게 사실이었죠. 기댈 데 없는 저는 그 여자한테 최선을 다했죠. 그런 내용들은 당시 필리핀 가정부나 수지 친구 현옥에게 물어보면 당장 알아요.”
살인의 동기가 석연치 않았다. 살인자는 동기범이었다. 그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밝혀져야 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살인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 꿈을 가지고 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수지는 거기에 필요한 징검다리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가 북괴에게 납치될 뻔했다고 한 거짓말이 많은 사건의 또 다른 시작이 되었다.
“왜 북한 공관원에게 납치될 뻔했다고 거짓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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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검찰 조사를 받으며 윤태식이 작성한 진술서. 수지 김 사망 당시를 적었다. | ||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고 하면 아무도 확인을 못할 것 같았어요. 막연한 생각에 그렇게 잔머리를 굴렸는데 결국 그런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 엄청난 결과가 돼 버렸어요.”
순간 그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현지 안기부 요원들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그들은 쉽게 속지 않는 사람들이다.
“저를 인수한 요원이 종이를 내주면서 납치될 뻔했던 과정을 쓰라고 했어요. 제가 미리 구상한 시나리오대로 간단히 두 장 써 줬죠. 조총련을 등장시키고 북한 사람도 나오게 했죠. 안기부 요원은 자기가 그 진술서를 가지고 잠시 나갔다 올 테니 호텔 방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쉬고 있으라고 했어요. 난 초조하고 불안했죠.
잠시 후 그 안기부 사람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다른 북한 전문가들하고 같이 내 진술서를 검토했는데 이상하다는 거예요. 자기들이 볼 때 내 진술서 내용이 전혀 북한 애들 공작스타일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서 나한테 하나씩 차근차근 묻기 시작했죠. 찾아온 그 사람들이 한국말을 했냐 아니면 일본말을 썼느냐고 물어요. 일본말을 했다고 둘러댔죠. 그랬더니 그러면 한국말은 알아듣더냐고 다시 물어요. 그래서 한국말을 알아듣더라고 적당히 대답했더니 그러면 조총련이 틀림없을 거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속으로 전 뜨끔했죠. 그렇게 한 부분 한 부분 저에게 자세히 확인한 다음에는 진술서를 쓰게 했어요. 다시 쓰면 안기부 요원은 그 진술서를 가지고 나갔어요. 갔다 와서는 북한공작원의 수법은 이런데 이 부분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지적하면 저는 눈치를 보면서 그게 맞다고 했죠. 그러면 그 사람은 진술서를 다시 고치게 하고 그걸 가지고 가서 다시 검토하고 돌아왔어요. 부족한 부분이 점점 보강되면서 진술서 내용이나 양들이 자꾸만 불어났죠.”
그렇다면 안기부 요원이 윤태식에게 속았다는 얘기일까? 왜 그랬을까. 안기부 측은 실적을 올리고 싶은 직업적 욕심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윤태식은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하는 절박한 입장이었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냥개보다는 생명을 걸고 도망하는 노루가 더 빠를 수 있었다. 윤태식은 당시의 상황을 계속 생생하게 얘기해 주었다.
“다음날인가 싱가포르 정부 수사관이라는 사람이 왔어요. 그 사람은 내가 정말 북한대사관에 갔는지 확인해야겠다면서 자기들 관청에서 입수한 북한대사관 사람들 사진을 내 앞에 늘어놓았어요. 당신이 만난 사람이 누군지 찍어보라는 거였죠. 나한테 진술서를 받던 안기부 요원이 통역을 하면서 도와줬어요. 내가 적당히 찍어줬는데도 별 문제는 없었어요.
그리고 2~3일 대사관에서 잤는데 서울에서 안기부 부국장이 왔어요. 부국장은 나하고 직접 얘기를 해보더니 도대체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는 북한의 공작 패턴을 다 아는데 네 말은 틀리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날 혼내지는 않았어요. 난 진땀을 흘리면서 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말하는 북한의 공작을 옆에서 열심히 들으면서 ‘아 그런 거구나’ 하고 배워 나갔죠. 그걸 외워서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자꾸만 진술서를 바꿨어요. 밥 먹고 계속 그 짓만 했어요.
그래도 부국장이라는 사람은 내가 쓴 진술서를 보고는 ‘왜 이렇게 말이 안 맞냐? 차라리 하나로 통일해서 쓰라’고 잔소리까지 했어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진술서만 쓰다가 보니까 볼펜 한 자루가 다 닳아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나도 북한 공작에 대해 박사가 됐죠. 그래서 머리를 가다듬고 최종적으로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썼어요.”
“그러면 현지에서의 기자회견은 어떤 거였어요?”
내가 물었다. 그건 정말 중요한 사항이었다.
“<중앙일보> 기자가 찾아왔더라고요. 내가 기자한테 꾸민 얘기를 줄줄 했어요. 기자가 알았다고 하면서 그냥 가더라고요.
다음날인가 태국으로 갔어요. 대사관 사람들이 부국장하고 저를 호텔로 데리고 갔어요. 호텔에서 부국장이 저보고 조금 있다가 사람이 올 테니까 전같이 설명해 주라고 했어요. 부국장이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한 남자가 왔어요. 진술서에 쓴 그대로 말해줬죠. 연합통신 기자라고 하더라고요. 부국장은 목욕을 하고 나오더니 서울 가면 헷갈릴지도 모르니까 예행연습을 해보래요. 그러면서 도중에 미국대사관을 찾아갔었던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지만 안기부 요원들이 나를 시켜서 조작된 가짜 기자회견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던 거 같아요. 어쩌면 속아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요.”
기자회견은 결국 안기부의 조작만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엄상익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