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26 추도식 때의 박근령 이사장. 오른쪽은 책 <일송정…>에 실린 만주국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의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 | ||
정치싸움을 법정다툼으로 끌어들인 이는 둘째 딸인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지난해 2월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 주장을 다룬 책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당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을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어 올해 2월에는 전현준 전 <말>지 대표도 추가로 고소했다.
박 이사장이 아이필드 출판사 유연식 대표와 김 관장을 형사고발하면서 문제 삼은 책은 중국 조선족 학자 류연산 씨가 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였다. 이 책이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을 묘사했다는 주장이었다. 저자인 류 씨는 현재 중국 국적을 가진 학자인 탓에 대신 책을 출판한 출판사 유 대표와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준 김 관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를 바라본 출판계와 학계에서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강한 소송”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책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고 해서 추천사를 써준 이까지 고소하는 예는 거의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 특히 당시 김 관장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으로 있었고 곧 발표하게 될 친일자 명단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는 점에서 “소송이 압박용 카드가 아니겠느냐”는 분석도 제기됐다. 같은 시기에 박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 씨가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영화 제작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 역시 같은 차원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박 이사장 역시 지난해 검찰 조사에서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하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처럼 피고소인들이 허위사실을 적시한 책자를 발간하는 것은 책임이 크다”며 “처벌을 원한다”고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뜨거운 감자’를 떠안게 된 검찰로서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고소인과 피고소인들 간의 원만한 합의를 유도했지만 고소인인 박 이사장 측은 완강했다. 검찰은 지난해 말 김 관장을 무혐의 처리했고 유 대표는 불구속기소했다. 외견상으로 볼 때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모양새’를 택한 것이다.
검찰이 기소한 유 대표의 혐의는 ‘허위사실 유포죄’였다. 박 전 대통령의 1940년 신경 육군군관학교 입교 이전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 허위로 판명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송정…> 저자 류연산 씨와 박 이사장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류 씨는 ‘박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부대에 입대하여 1939년 8월 24일 대사하 전투에 참전하는 등 항일연합군 토벌에 나섰고 그 공으로 부대 추천을 받아 신경 육군군관학교(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박 이사장은 “선친은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의무교직복무기간인 3년이 될 때인 40년 3월까지 문경소학교에서 근무하고 그해 4월 만주의 군관학교에 입학했다”며 “이 같은 사실은 조갑제 씨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와 정운현 씨의 <군인 박정희> 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소학교 교사 시절인 39년에 만주에서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박 이사장 측은 40년 3월에 사임을 했다는 문경소학교의 학적부 기록과 함께 당시 제자들의 증언 등을 제시하고 있고 유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교사로서의 기록은 39년 상반기까지만 나와 있고 6월 이후는 기록이 없다”며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부대 복무 기록을 제시하고 있는 중국 안도현 정치협상회의 문사판공실에서 발간한 <안도현조선족역사발자취총서(1)>와 국내의 육군본부 자료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소송 제기와 그에 따른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29일 1차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포함됐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 장교를 지낸 사실만으로도 사유가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한나라당의 박 대표는 “그들(명단 발표자)도 언젠가는 자신들이 저지른 왜곡에 대해 평가받을 날이 있을 것”이라며 선친이 친일 명단에 포함된 데 대해 불쾌감을 표출했다.
박 이사장은 제1 야당 대표로 행동에 한계가 있는 언니를 대신해 한층 강경하게 몰아붙였다. 올해 2월에는 시사월간지 <말>의 전현준 전 대표를 추가로 고소한 것이다. 선친의 친일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주변에서는 “언니인 박 대표가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는 것에 비해 박 이사장의 거침없는 행보는 선친을 그대로 닮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두 사람 간의 미묘한 경쟁 구도에서 보다 강경한 박 이사장이 주도권을 잡은 듯하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이에 대해 전 전 대표는 “<일송정…>보다도 훨씬 앞서 문제를 제기했던 본지에 대한 소송을 뒤늦게 갑자기 제기하는 것이나 보통 언론 소송의 수순인 언론중재위 중재 등을 거치지도 않고 바로 고소한 것을 보면 다분히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전 전 대표에 대한 검찰 조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 논란이 소송으로 비화되자 얼마 전 김세균 정현백 등 진보적 학자 152명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공인에 대한 논란을 사적인 명예훼손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비역사적”이라는 의견서를 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2차까지 진행된 유 대표에 대한 추가 공판이 최근 고소인 측의 사정으로 연기되면서 박 이사장 측의 강경 입장에 변화가 생긴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하지만 박 이사장 측의 변호인은 “이미 작년에 제기된 소송인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법원에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체크해봐야겠다”며 여전히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과 학계 출판계 주변에서는 이번 소송이 일회성에 그치지는 않을 사안이라는 데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소위 ‘박정희 향수’와 박 대표가 유력 대선주자로 계속 남아있는 한 오히려 더 가열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