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나는 추운 겨울을 한국문학전집들을 읽으면서 보냈었다. 그중에 소설가 정을병의 <개새끼>들이라는 작품도 들어 있었다. 소설가 정을병은 1934년 경상남도 남해 출신이다. 성자가 되기 위해 1955년 한국 신학대학에 다니다 궤도수정을 했다. 학교 근처에 살던 김말봉이라는 여류작가를 통해 김동리 문하에 들어가게 됐다. 그의 종교가 신학에서 문학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평생 소설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소설을 위해선 직업이나 학벌 등 그 어떤 것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십대를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중앙도서관에서 보냈다. 새벽별이 보일 때면 도서관으로 가서 하루 종일 소설을 읽었다. 작품이 완성되면 김동리 선생에게 가서 보이고 지도를 받았다. 그는 오로지 소설 하나에만 전념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승같이 생활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술도 담배도 아예 배우지 않았다. 쌀과 김치, 그리고 연탄만 있으면 된다는 신조였다. 그는 평생 하루 한 끼만 먹고 살겠다고 결심했다. 무서운 건 지난 40년간 그런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개발붐이 일어나고 투기가 번성할 때 집 한 번쯤 옮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소설가 정을병 씨의 주소나 전화번호는 변하지 않았다. 그 집중과 청빈의 결과는 71권의 소설로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는 국토건설단을 고발하는 소설 <개새끼들>을 발표했다가 미움을 샀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의미하는 유신헌법이 발표됐다. 소설가 정을병은 유신헌법을 반대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에게 ‘문인간첩’이라는 죄명을 씌워 구속했다. 그는 다섯 달 만에 무죄로 석방이 됐다. 그는 석방 후 의사사회를 고발하는 소설을 썼다가 다시 구속여부가 검토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가 소설가협회장으로 수십억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였다.
나는 철조망 친 기다란 회색 담을 따라 걸었다. 그 마지막 부분에 겨울 햇살을 퉁겨내는 헬멧을 쓴 경교대원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구약성서의 훌륭한 명군 솔로몬도 나중에 우상을 숭배하고 여자에 빠져들었다. 인간은 무너질 수도 있고 모략에 빠져들 수도 있다. 더러는 오해받는 게 세상이기도 했다. 선입견만 가지고 돌팔매질을 하는 건 경솔했다.
철컹하고 섬뜩한 소리를 내는 쇠문을 지나 구치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닭장 같은 높은 철조망을 통과하면 접견실 건물이었다. 감옥은 가장 낮은 위치로 떨어진 상태의 인간과 만나는 곳이었다. 그때가 그 인간의 가장 적나라하고 진솔한 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어항 같은 유리통 접견실에서 그와 만났다.
정을병 씨는 깡마른 몸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녔다. 홑겹 재소자복을 입고 있는데도 추워하지 않았다. 스스럼없는 당당한 태도였다. 횡령범들은 보통 어떻게든지 부인하고 빠져나갈 궁리들만 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가 처음 보는 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밖에 있을 때나 비슷해요. 책을 읽고 명상하고 그렇죠.”
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감옥은 또 하나의 수도 장소인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그와 문학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 작가로 가장 많은 소설을 쓰셨는데 문학이란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작가가 자기의 확실한 사상이나 신념이 있고 그걸 형상화해야 진짜 소설이요. 평생에 한 권을 쓰더라도 그런 작품이 나와야 해요. 그것 없이 쓴 지난날의 글들은 여기 와서 생각해 보니까 다 무의미하다는 걸 느꼈죠. 앞으로 나가면 정말 소설다운 소설 한 권 쓸 거요.”
지난 오십여 년이 문학인생인 그의 영혼 속에는 아직도 창작의 용암이 끓고 있었다.
“이번 공금횡령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의 명예는 이미 방송뉴스나 다른 소설가들의 진정을 통해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난 횡령한 적이 없어요. 받을 돈 받은 거지.”
정을병 씨는 당당했다. 그런 태도가 검사나 판사를 자극해 오히려 징역형을 받게 한 것 같았다. 당당함을 잘못 보면 뻔뻔함이 되기도 했다. 그게 괘씸죄였다. 그가 덧붙였다.
“다른 소설가들이나 세상은 오해를 하는데 해명하셔야죠?”
내가 권했다.
“설득이나 변명할 필요 없어요. 아니면 아닌 거지 뭘. 모략하는 놈들한테 대꾸할 필요조차 없어요.”
옆에서 지켜본 그는 재판 때도 시종일관 비슷했다. 이상한 건 회장인 그가 공식적으로 자기 통장에 매달 일정액을 활동비로 송금 받은 것이다. 횡령한 돈이라고 생각했으면 차명계좌로 은밀하게 받아야 했다. 사무직원은 비자금으로 아파트를 사고 주식에 투자한 것으로 서류가 되어 있었다. 여직원조차 비자금으로 승용차를 사고 애인 카드빚을 갚아줬다고 되어 있었다. 회장인 정을병은 그런 비자금의 존재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직원은 회장인 정을병이 엄청난 횡령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수사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불구속이 되었다.
법정 안이 습기 찬 무더운 공기로 꽉 차 있던 8월 중순이었다. 서부지방법원 407호 법정은 소문을 듣고 분노한 소설가협회 회원, 과잉증언을 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소설가 정을병 씨는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셈이었다. 모두들 그를 오해하고 증오하고 있었다. 재판장이 정을병이 데리고 있던 여직원에게 물었다.
“비자금을 어떻게 만들었죠?”
“서류상 나온 예산보다 실제로는 더 싸게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밀계좌를 만들어 그 차액을 입금시켰는데 그게 비자금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재판장이 여직원에게 물었다.
“예를 들면 1억 원의 예산을 집행했는데 실제로는 8000만 원을 사용했을 때 차액 2000만 원을 입금시켰다는 건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얼마 남았다는 걸 정을병 회장이 알았어요?”
“그것까지는 결재 받지 않았습니다.”
비자금의 존재와 액수 자체를 회장인 정을병이 몰랐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에서 여직원은 단돈 1000원까지 정을병 회장의 결재를 받는다고 말했었다. 검찰은 마지못해 횡령죄를 취소하고 국고 보조금의 항목을 무단으로 변경시켰다는 걸로 죄명을 바꾸었다. 공금횡령으로 이미 정을병의 명예는 사망선고를 받은 이후였다. 나는 정을병 씨를 위해 보석청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을 것 같았다.
“보석청구를 하고 싶은데 돈 있으세요?”
정을병 씨의 부인에게 전화를 했다. 법원에서 보석을 허가해도 돈이 없다고 해서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얼마 정도 있어야죠?”
부인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현찰 2000만 원 정도는 법원에 맡겨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돈이면 없는데…. 다시 면회 가서 영감한테 물어봐야 해요. 그냥 감옥에 있을 건가 어디 가서 사채라도 얻을 건가.”
세상의 의심대로 그가 수십억을 횡령한 사람이라면 그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정을병 씨였다.
“감방에서 밤에 자려고 하는데 말이요 갑자기 교도관이 와서 나가래. 그래서 집으로 왔지. 하여튼 고맙소.”
잠시 이웃집을 다녀온 듯 무덤덤한 말이었다. 소설 <마지막 잎새>를 쓴 오 헨리는 은행원을 하다가 공금횡령으로 구속되어 감옥 안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세르반테스는 세금 징수원을 하다가 횡령한 혐의로 58세에 감옥에 들어가 거기서 <돈키호테>를 썼다. 석방되고 얼마 후 땅거미가 내릴 무렵 그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얘기는 역시 문학이었다.
“재판을 받아보니까 판사가 검사 말 이외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디다. 법조계에도 판검사들이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소설이 나와야 해요. 읽기 싫어도 그걸 보고 느끼게 말이죠.
감옥 안에 있으면서 거기 돌아다니는 소설들을 모두 읽어봤어요. 얄팍한 스토리만 나열한 것들이지 그건 소설이나 문학이 아니요. 문학은 철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감옥에서 보니 한 방에 여러 사람 있을 때 화장실이 옆에 붙어 있으니까 여러 가지 불편한 일들이 생겨요. 식사할 때 바로 옆에서 소리를 내면서 똥을 누거든. 나이가 일흔네 살이라고 나를 방장을 시키더구만. 그래서 각자 용변을 보는 시간을 정해줘서 겹치지 않게 하고 식사시간을 피하게 했지. 그런 체험이 없으면 어떻게 생생한 소설을 쓰겠소? 소설은 경험이 기본이요.”
그는 예술 지상주의자였다. 그가 계속했다.
“죽은 소설가 이병주 씨가 말하길 톨스토이는 일류고 사르트르는 이류, 그리고 자기는 삼류 내지 사류 같다고 그런 적이 있어요. 그렇더라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쓰고 또 쓰는 게 우리 소설가들의 길이라고 하더라고요. 동감입니다. 나도 스무 살 때 문학의 세례를 받은 이후는 평생 읽고 쓰는 것 외에는 아무 취미도 특기도 없어요. 지금 일흔네 살이지만 난 꼭 백 살까지 살 겁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진짜 소설을 쓸 거예요. 인터넷이 발달해서 독자들이 외면한다고 해도 또 출판사에서 거절한다고 해도 나는 쓸 거예요. 내가 안 되면 다음에 내 자식 세대에서라도 출판을 해 주겠지 뭐.”
늙어도 자기의 일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젊은이다. 정을병 그가 그랬다. 사무실 창으로 어둠이 밀물져 들어왔다.
“어디 근처 식당 가서 밥 먹죠?”
내가 말했다.
“도를 닦는 사람이 저녁은 무슨 저녁? 난 여태까지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아왔다니까요.”
그가 탁자 위에 놓였던 모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길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학이란 관념이 사람이 되어 나의 사무실을 들렀다 가는 것 같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