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문사위원회는 1년 동안 진정을 받아 총 600여 건의 사건을 접수받았다. 1950년대부터 2005년까지 시대도 다양했으며 각기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었다. 이후 3년 동안의 활동을 통해 약 350건을 조사 종결했고 그중 120여 건의 진상을 규명했다. 타살을 자살 또는 사고사, 병사로 처리했던 사건을 바로 잡았으며 자살자에 대해서는 진짜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개인적인 문제로 자살했다던 사람들 대부분이 구타와 가혹 행위, 성추행, 과중한 업무 관리, 관리 소홀 등 부대 내 환경이 자살의 주요 원인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2009년 군의문사위원회는 3년의 법정 시한이 끝나 활동을 종료해야 했고 나머지 240여 사건에 대한 조사는 그대로 중단됐다. 이제 활동 종료직전인 2008년 12월 군의문사위원회가 만난 유가족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사례들 중 일부를 요약 및 발췌해 공개한다.
#고 박정훈 이교의 아버지 박노상 씨
낡은 사진첩엔 아직도 고 박정훈 이교의 사진과 함께 행복했던 가족의 추억이 가득하다.
사고가 일어나기 이틀 전 갓 교도소에 배치 받은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마 공중전화였나 봅니다. 정훈이가 누군가의 감시를 피하거나 쫓기는 상태에서 전화하는 듯했습니다. 목소리가 벌벌 떨렸거든요. ‘아빠, 나 춘천교도소로 발령 받았어요. 여기 무서워서 도저히 못 있겠어요. 다른 데로 좀 갈 수 있게 해줘요. 그리고 이거 전화한 것도 알면 부대에서 맞아 죽어요.’ 그러곤 바로 끊었습니다.”
박노상 씨(77)는 바로 면회를 가고 싶었지만 자대 배치 뒤 일주일 안에 면회가 안 된다고 해 마음만 조린 채 지내는 중이었다. 1996년 10월 22일 오후. 부대로부터 아들이 쓰러졌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타 병원에 도착했지만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돼 있었다.
“옷도 다 벗겨 놓은 상태고 가슴과 배,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뚜렷했습니다.”
소대장에 의하면 교도소 직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얼굴 피부병으로 인한 내성적이고 소극적 성격, 만성적 우울증 때문에 투신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머리나 몸엔 골절이나 특별한 상처가 없었다. 4층 옥상에서 떨어졌다는 콘크리트 바닥에도 핏자국 하나 없었다. 아들의 동료들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교도소 측에서는 비용도 자기네가 낸다며 장례를 서두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박 씨가 제기한 의혹들은 사실로 밝혀졌다. “박정훈 이교는 선임 대원들이 자행한 구타와 욕설,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것”이란 결과를 받았다. 첫날부터 가슴과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하고 외박 나갔다 만취해 돌아온 선임은 처음 보는 박 이교에게 30분 이상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100명에 달하는 선임 대원 계급과 이름을 한나절 사이에 외우도록 강요한 뒤 못하면 욕설과 함께 주먹이 날아왔다. 당시 선임 대원들은 날마다 내무반에서 술판을 벌였다. 술판 뒤에 으레 후임 대원에 대한 폭력이 난무했다. ‘원산폭격’과 ‘관물대 위에 발 올리고 깍지 낀 채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쓰러지면 짓밟았다. 박 이교를 포함한 신입 대원들은 끼니때마다 세 명 분량의 식사를 강제로 먹어야 했다. 이른바 ‘먹기 사역’이었다. 심지어 몇몇 선임 대원은 후임 대원들을 성추행하기도 했다. 거부할라치면 다른 후임 대원들까지 몰매질을 당했다.
박 이교가 사망 직전에 했던 테니스장 옆 미루나무 제거 작업도 위법한 명령에 따른 행위였다. 경비교도대는 법에 따라 정문과 감시대, 출정 같은 업무만 하도록 돼 있었다. 선임 대원들은 대놓고 박 이교의 동료들에게 “구타나 가혹 행위에 대한 진술을 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교도소 조사관들은 가슴의 멍 자국을 보고도 “1번, 축구하다 다쳤다. 2번, 감시대에서 굴렀다. 3번, 뛰다가 넘어졌다. 이 중 몇 번이야”라고 묻는 정도로 조사를 마무리했다.
“기가 막혔지요. 그게 군대입니까? 나도 1963년에 군대 생활하고 하사로 제대했지만 그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훈이 동기들 얘길 들어 보니 군대가 아니라 완전히 지옥 같더라고요. 학벌이 높다고 밉보였겠지요. 저녁에 세 시간 동안 두들겨 패고 그처럼 혹독하게 당했으니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됐구나 하는 심정이었죠.”
#고 심규환 상병의 어머니 박성임 씨
심규환 상병 죽음의 진실은 군의 조직적인 사건 조작으로 은폐되었다. 오른쪽은 심 상병의 어머니 박성임 씨.
1979년 8월 박성임 씨(79)는 부대로부터 아들이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면회 와서 며느리랑 헤어지라 캐서 고민하다가 그랬다고 대답을 해요. 면회 가지도 않았는데 참 거짓말도 잘하지예. 그래가 우리 영감이 내가 언제 면회 왔더노 카니까 며느님이 왔던가? 이래 말을 돌리더라고. 옷을 벗겨 봐도 상처도 없고 입가에 파란 멍이 쪼금 든 게 전부라.”
군의문사위원회 조사 결과 심규환 상병의 죽음에는 조직적인 은폐와 조작이 있었다. 심 상병이 복무하던 곳은 새로 창설된 대대로 고참 사병과 단기 하사관 사이에 알력이 심했다. 사고 당일 낮 위병조장 K 하사, 심규환 상병, C 이병 세 명이 한 조가 돼 대대본부 위병초소 근무를 서고 있었다.
K 하사와 심 상병 간에 말다툼이 있었고 잠시 조용해지더니 ‘땅’ 하는 소리가 났다. K 하사가 창틀에서 총을 쐈고 오른쪽 방향으로 1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심 상병이 입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심 상병은 즉사했는데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자살로 처리하기로 했다. 총에 붙은 명찰 바꿔 달고 총기대장 새로 작성했으며 화약흔이 묻은 K 하사의 옷을 심 상병의 옷으로 바꿔치기 했다. 고부간의 갈등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 면담기록보고서도 조작했다.
사망일도 20일이 아니라 16일에서 19일 사이 어느 날로 추정된다. 그런데 사건 조작을 하고 뒤늦게 가족에게 연락을 해 가족은 20일이 사망일인 줄 알고 지금까지 그날 제사를 지내왔다. 또한 막대기로 자신의 입을 때려 자살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될 수 없는 거짓말을 했다.
#고 이승원 일병의 어머니 고정순 씨
국방부 앞에서 시위하는 고 이승원 일병 어머니 고정순 씨(오른쪽). 그는 지난 10년, 오직 아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군을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계속해 왔다.
마음을 다독이려는 듯 한동안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을 열고 군번줄을 꺼냈다. 고정순 씨(62)는 아들(1998년 12월 사망)이 남긴 군번줄을 부적처럼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 고 씨는 1남 1녀 남매를 낳았지만 어린 딸을 소아암으로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아들마저도 군대에 간 지 6개월 만에 잃었다. 백일 휴가 나왔을 때는 입대하기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괴롭히는 선임병들이 있는데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그러더라구요.” 사고 나기 불과 열흘 전에도 아들 친구와 함께 면회를 다녀왔지만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군의문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GOP는 면회와 외박도 없으며 군기도 엄해서 투입 부대원들이 몹시 힘들어 하는 근무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이승원 일병이 근무하던 3소대는 특히 군기가 세기로 소문나서 인근 부대원들 사이에서 “3소대만 안 가면 된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선임병들은 말을 잘못 알아듣거나 암기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구타, 머리박기, 머리를 박은 상태에서 발로 차서 넘어트리기, 어깨동무하고 앉았다 일어서기, 오리걸음 등 온갖 가혹 행위로 이승원 일병 비롯해 후임병들 괴롭혔다. 관물대를 뒤져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가고 일명 ‘짤짤이’를 하자고 강요해서 금품을 갈취했다. ‘장난’이라는 명목으로 후임병들의 몸을 서슴없이 더듬으며 성추행을 일삼았다. 사건 있기 불과 30여분 전에도 평소 괴롭히던 선임병에게 심한 욕설 들었던 이 일병은 이등병 딱지 떼고 진급한 첫날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고 노경춘 일병의 아버지 노동일 씨
웬만하면 집 밖을 나서지 않던 고 노경춘 일병 어머니 윤은순 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국회 앞 기자회견 현장에 섰다.
“면회를 갈 때마다 선임병이 하나 따라 나왔는데 애가 눈치를 많이 보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임이 훈련 나가서 애한테 개구리고 뱀이고 먹였는데 애가 비위가 약해 먹지 못하니까 담뱃불로 애 손을 지지고 그랬더라고. 부모한테 그런 말을 할까 싶어 따라 나온 거지”
1986년 1월 아들의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 세 번째로 부대를 찾았다. 노 일병이 두툼한 방한복을 입고 나타났는데 추위 때문인지 손은 다 텄고 검게 그을린 얼굴엔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다시금 “전출 갈 방법이 없냐”며 불안해했다.
“그날 집에서 싸간 먹을거리를 붙들어 매고 뒤돌아보면서 부대로 들어가질 못하는 거야. 몇 번 손짓을 하고 말을 해도 애가 안 들어가니 우리가 먼저 돌아섰지. 그게 마지막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부모라는 사람들이 모질게 그렇게 돌아서고 말았어.”
면회를 다녀오고 열흘이나 지났을까. 퇴근을 준비하던 노 씨는 회사 전무로부터 아들이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길로 가족들과 부대로 달려갔지만 업무 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오라는 말만 들었다.
“정말 울화통이 터지더라고. 세상에 사람이 죽었는데 유가족이 시신을 지키지도 못하게 하는 나라 법이 도대체 어떤 나라 법이야. 그 사이에 증거를 감추고 또 증언을 뒤바꾸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매번 이런 식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가 군대를 믿겠냐고. 애가 숨을 거둔 시간은 오전 11시인데 가족들한테 연락한 시간은 오후 7시였어. 그 시간 동안 조작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았겠어?”
이튿날 아침 피범벅이 된 머리로 누워있는 아들을 확인했다. 육군 수첩에 아들이 남긴 기록을 보았다. ‘내세 어서깨새 위시에세/ 이·느슨 지심이시/ 무수겁섭다사 내개가사 왜쇄/ 태새어서 나났느슨지시 너서/ 무수도소 미십다사…뜨스고소 시싶다사 이시고솟에서(내 어깨 위에/ 있는 짐이/ 무겁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너/무도 밉다…뜨고 싶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구타의 흔적도 보이고 석연치 않은 점들이 계속 발견됐다. 하지만 군 관계자들은 “자살이 확실하니 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장례부터 치르자”고 가족들을 몰아세웠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