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은 조폭의 보스들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수십 명의 경호원, 좋은 집, 많은 돈 그런 것들을 보고 선망합니다. 그러나 막상 조폭의 두목이었던 저에게 남은 건 30년간의 감옥생활과 병이었습니다. 화려함은 순간이었죠.”
김태촌은 쉰 목소리에 간청하는 표정으로 계속했다.
“일진회 소속 청소년 여러분! 나쁜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성격과 행동을 그대로 닮게 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 만났던 친구들은 모두 싸움을 잘하고 거칠었습니다. 그게 전염이 되어 저는 주먹으로 한국을 제압했지만 그건 잘못이었습니다.”
주위에는 방청객들이 둘러앉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역시 체험에서 나온 진리라야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일진회 소속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용기와 에너지를 책을 읽고 공부하는 데 쓰십시오. 조직에서 버텨갈 수 있는 그런 배짱이라면 여러분은 밝은 양지 아래서 분명히 성공할 겁니다. 저같이 한 번 조폭의 두목으로 낙인찍히면 바깥세상에서는 침 한 번 뱉어도 구속을 당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조폭의 보스에서 그는 신앙의 전도사로 변신해서 나타났다.
스트라이프 무늬의 회색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인디언 무늬의 은은한 회색 넥타이를 맵시 있게 맸다. 칙칙한 죄수복에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장면이 아니었다.
새로 태어난 그는 그 자리에서 색소폰도 한 곡 멋지게 연주했다. 변화한 모습의 그를 보면서 나는 4년 전 쌀쌀한 어느 봄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2002년 3월 6일 쌀쌀한 바람이 부는 오전이었다. 사무실로 낯익은 미모의 중년여인이 들어섰다. 가수 이명숙 씨였다. 대학시절 나는 그녀의 히트곡 ‘가을이 오기 전에’를 좋아했었다.
그녀가 먼저 자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김태촌의 처 되는 사람입니다. 보호감호에 대한 재심은 엄 변호사님이 잘하신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 대도 조세형이라는 사람도 빼내셨다면서요?”
그녀는 이어서 자세하게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김태촌 씨와 옥중결혼을 했어요. 교회 목사님 소개로 98년 11월 13일에 처음 봤어요. 너무나 맑고 가식 없는 남자라 저는 한눈에 반했어요. 넉 달 후 혼인신고를 했어요.”
나는 가수 이명숙 씨의 그 말이 얼른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황혼의 나이였다. 각박한 세상인심에 시달려 순수한 마음이 많이 퇴색됐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끌렸나요?”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여자들은 조폭의 보스 출신에게 단번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를 포함한 좁쌀 같은 먹물들하고는 달랐다. 인간을 확 끄는 그 비결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한번은 제가 감기에 걸렸다는 내용을 편지에 써 보낸 적이 있었는데 김태촌 씨가 이런 답장을 했어요. 한번 보세요.”
그녀가 접은 종이 한 장을 품속에서 내놓았다. 김태촌이 옥중에서 그녀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 핵심 내용은 이랬다.
‘사랑하는 여자가 감기에 걸렸는데 감옥 안에서 마음만 안타깝지 해줄 게 아무것도 없소. 내가 자유인이라면 병원에도 데리고 가고 약도 지어 먹일 텐데 정말 가슴이 아프오. 그래서 나는 이 겨울에 옷을 다 벗고 철창을 통해 들어오는 칼바람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소. 나도 사랑하는 여인과 같이 감기에 걸려 그 고통을 함께하게 해달라고 말이요.’
인간이 인간을 끄는 요소가 뭔지를 알 것 같았다. 나를 버리는 순간 상대방은 그 공간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이다.
“저는 김태촌 씨의 그 강렬한 사랑에 녹아버린 거예요.”
이명숙이 환히 빛나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덧붙였다.
“지금 제 남편 김태촌은 폐암과 경부암이 있는 사람입니다. 만날 때마다 차라리 내가 그 아픔을 대신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교도소로 가서 한번 남편을 만나 주세요.”
한 달 후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민병철 씨를 만났다. 민병철 씨는 왕년의 건달조직에서 김태촌 다음 서열이었다고 했다. 그 옆에는 키가 크고 눈빛이 예리한 사내가 서 있었다. 역시 조직에 있던 춘수란 남자였다.
“이 편지를 한번 보시죠.”
민병철 씨가 편지 한 장을 내게 보였다. 김태촌이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보스의 밀지 같은 그 내용 중에는 네가 어떻게 예수쟁이가 됐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후배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사정들이 들어 있었다. 내가 편지를 다 읽자 민병철 씨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교도소에 가서 태촌이 형님보고 그랬습니다. 석방되려고 머리 굴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같이 그렇게 나쁘게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에서는 대통령도 빼낼 수 없다고 했죠. 자기 말대로 진짜 예수 믿고 착해져도 세상이 인정 안 할 텐데 말이죠.”
옆에서는 정확히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왜 보스였던 김태촌 씨를 위해 그렇게 헌신하십니까?”
내가 부두목이고 핵심 조직원이던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당시 김태촌은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이었다. 굳이 충성을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형님에게서 받은 잔정을 잊지 못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눈빛이 예리한 남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은 건달 안 하십니까?”
내가 민병철에게 물었다.
“지금은 절대로 건달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 조직폭력배 출신 김태촌 씨는 기독교에 귀의한 뒤 최근 국제청소년범죄예방교육원 산하 중앙연수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4년 12월 신체감정을 위해 인하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모습. | ||
내가 물었다.
“제가 공주교도소에서 형을 살 때였어요. 어려서부터 운동으로 단련이 됐고 감옥생활에는 이력이 났어요. 더군다나 김태촌 형님의 다음 서열이었으니까요. 제가 교도소 내 공장을 꽉 잡고 있을 때 예순일곱 살 먹은 목사가 감옥에 들어와 공장에 배치됐어요. 저는 심심하기도 하던 때라 군기도 잡을 겸 놀렸어요. 내가 그 영감보고 ‘당신 어떻게 목사란 직업 달고 이런 데 들어와? 앞으로 똑똑히 잘해’라고 으름장을 놓았죠. 그 양반 생긴 거는 아주 작달막하고 볼품없는 늙은이였어요. 내 공갈에 그 영감이 ‘저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들어왔습니다. 일 잘 하겠습니다’라면서 공손하게 대답하더라고요. 그렇게 그 영감의 감옥생활이 시작됐어요.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저는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기계를 탕탕 치면서 재소자들 군기를 잡고 있었어요. ‘야! 이 새끼들아 정량대로 일하지 않으면 얄짤없어. 내 말이 아니꼬운 새끼는 한번 나와 봐’하고 겁을 줬어요. 그랬더니 그 영감이 나와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거예요. 전 순간적으로 당황했어요. 기만 죽이려고 했는데 그 영감이 진짜 나온 거예요. 영감을 한바탕 두들겨 패야 하는 입장인데 그 영감 한방 먹이면 그대로 죽을 거 같았어요. 고민을 하는데 그 영감이 말을 하더라고요. 사자나 호랑이같이 진짜 강한 짐승은 점잖다. 그렇지만 약한 개는 다른 동물이나 사람이 오면 으르렁거린다. 인간도 강한 사람은 으르렁거리지 않는 법이라고요.
저는 그 영감한테 웃기지 말라고 빈정대고 일단 해산시킨 다음 화장실로 갔어요. 조막덩이만 한 빌빌대는 영감을 패 죽일 수도 없고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잠시 분을 죽이고 나오는데 그 영감이 떡 버티고 서서 나를 바라보는 거예요. 난 눈에 살기를 잔뜩 모아 그 영감을 째려 봤지요. 그랬더니 그 영감이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나보고 정말 강해지려면 성경을 보라고 점잖게 말하는 거예요.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인상만 팍 쓰면서 갔어요.”
“그래서 성경을 봤어요?”
내가 물었다.
“그래도 건달로서의 자존심은 있으니까 바로 보지는 못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 감방 안에서 누가 성경을 베고 자더라고요. 낮에는 쪽팔려서 빌려달라고 하지 못하다가 한밤중에 그걸 빼서 봤어요. 아무 장이나 펼쳤죠. 뭔 소리가 있는고 하니 ‘노하기를 더디하라.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것보다 나으니라’하는 문장이 있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제가 그때까지 욱하는 성격 탓에 감옥을 드나들었더라고요. 하여간 그때부터 조금씩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는 지금 교회의 집사가 되어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우리 같은 건달출신들 알고 보면 단순해요. 잘나고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들보다 우리 같은 사람이 마음 변하면 더 일 잘하고 전도도 잘할 수 있어요. 다만 건달에서 예수쟁이로 한번 변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죠.”
그들의 마음 밭에는 분명 믿음의 씨가 뿌려진 것 같았다.
2002년 3월 14일 오후 12시경. 진주교도소는 촉촉한 봄비로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총무과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녹차 한잔 하실랍니꺼?”
여자교도관이 녹차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저 김태촌은 기결순데 접견할 수 있는 겁니꺼? 위에서 지침은 안 된다고 그러는데예. 그렇다고 무슨 다른 사건이 새로 터진 것도 아이고….”
변호사가 만나는데도 정부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재심을 의뢰하려고 하기 때문에 만나려는 겁니다.”
그 시간 나는 김태촌에 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다. 김태촌은 한국 조직폭력의 대부였다. 1970년대 초 그는 광주 서방파를 결성하고 활동했다. 1973년 8월 15일 김태촌이 광주교도소에서 나오면서 김대주 휘하가 되어 상경했다. 김대주는 5·16혁명 후 가장 체계적인 조직을 이룩한 건달세계의 대부였다. 그를 우연히 광주교도소에서 만나 인연이 된 셈이다.
그 무렵 야당인 신민당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내분이 심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치열하게 당권다툼을 벌였다. 신민당 전당대회 5일 전인 1976년 5월 21일. 김태촌은 깡패 300명을 고속버스 8대에 태우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들은 종로2가에 있는 여관들에 분산되어 투숙했다. 1976년 5월 22일 밤. 김태촌 사단의 특공대 일진이 집합했다. 대검, 일본도, 낫, 도끼, 야구방망이를 든 깡패특공대가 관훈동의 신민당사로 출발했다. 신민당사에서는 전당대회를 준비하느라고 직원들이 늦게까지 근무하고 있었다. 기자들도 많았다. 당사 2층의 총재실에서는 김영삼 총재와 주류 측 중진의원들이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와아아!”
건달 특공대가 신민당사를 쑥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와장창창 유리창이 여기저기서 깨졌다. 의자가 공중으로 날고 책상들이 엎어졌다.
“모두 두 손 들고 무릎 꿇어!”
김태촌이 당직자들에게 명령했다. 이어서 그는 특공대원들을 데리고 총재실로 향했다.
“야 김영삼! 죽고 싶지 않으면 나와서 항복해.”
김태촌이 문 밖에서 소리 질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야 도끼 가져와!”
김태촌이 옆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후배 한 명이 들고 있던 도끼를 건네주었다. 김태촌이 도끼로 총재실 문을 박살냈다.
순간 총재실 문이 나가떨어지면서 김태촌 일행이 들어갔다. 김영삼 총재가 눈에 독기를 품은 채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황낙주 의원이 있었다. 도끼를 든 김태촌이 김영삼 앞에 다가섰다. 김영삼의 눈에서 파란 섬광이 일었다.
“내가 깡패 놈들에게 맞아죽어?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말겠어.”
김영삼 총재가 악을 쓰고 버텼다. 김태촌은 더 다가서지는 않았다. 거물 대 거물의 만남이었다.
“잠깐만 더 기다려 보이소.”
교도관이 자료 읽기에 빠져 있는 내게 말했다. 교도소는 내가 김태촌을 만나는 걸 꺼리는 것 같았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