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킨스 씨의 책 <고백> 표지. 왼쪽은 김영남-메구미 씨의 딸 은경(혜경) 양의 지난 29일 상봉 때 모습. | ||
78년 북한으로 납치된 김 씨는 86년 북한에서 요코다 메구미 씨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구미 씨는 77년 11월 일본에서 북한으로 납치됐다. 지난 2002년 일본의 납북자 송환 요구 당시 북한은 “메구미 씨는 이미 자살했다”며 일본 측에 대신 유골을 보냈으나 일본은 “확인 결과 그 유골은 진짜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강력하게 의혹을 제기했다. 이로써 북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일본은 여전히 ‘메구미 씨가 살아 있음에도 일본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찰스 R 젠킨스 씨가 쓴 <고백>이란 수기에 몇 가지 의미심장한 내용이 포함돼 있어 주목을 끈다. 지난 2004년까지 약 40년간 북한에 살면서 피랍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던 그는 이 수기에서 자신의 아내의 단짝친구였던 메구미 씨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 젠킨스 씨는 “단정할 순 없지만 메구미 씨는 현재 살아 있으며 군인이나 공작원과 결혼했고 해외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제 메구미 씨의 생존 미스터리는 북일관계를 넘어 한일관계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젠킨스 씨는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던 1965년 1월 자신이 월남전에 파병될 것을 알고 탈영, DMZ를 월북했다. 그는 북한에서 80년 소가 히토미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 역시 18세 때인 78년 8월 일본에서 납치되었다. 이들 부부는 일본 정부의 피랍자 가족 송환 요구에 따라 각각 2002년과 2004년 북한을 떠나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히토미 씨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메구미 씨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북한 측의 발표대로라면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메구미 씨의 남편이 바로 78년 북한에 피랍됐던 김영남 씨로 밝혀지면서 메구미 씨 문제는 북한과 일본에 이어 한국까지 포함된 삼국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1년의 시차로 나란히 일본에서 북한으로 납치되어온 히토미와 메구미 두 소녀는 여섯 살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관계로 서로 믿고 의지했다. 그러다가 히토미 씨가 80년 북한 당국에 의해 젠킨스 씨와 결혼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젠킨스 씨는 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평양에 온 뒤로 내 아내 히토미는 초대소를 여기저기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메구미 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메구미 씨는 77년 겨우 열세 살의 나이로 고향인 니가타시에서 배드민턴을 연습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한 사람에게 납치되어 끌려왔다.
히토미는 평양 중심부에 있는 작은 집에서 메구미 씨와 1년 반 정도 함께 살았다. 그 당시 두 소녀들은 북한말과 주체사상을 공부하는 이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메구미 씨는 히토미보다 일 년 전부터 북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미 북한말이 능숙했다. 그래서 히토미는 북한말의 기초를 거의 메구미 씨에게 배웠다. 히토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아직 열다섯 살이었던 메구미 씨는 고향 생각에 줄곧 울기만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의지할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 친구가 되었다.’
이후 이들 부부와 메구미 씨는 북한에서 두 차례 정도 직간접적으로 만난 것으로 밝혀졌다. 모두 80년대 중반 경으로 이때는 메구미 씨 역시 김영남 씨와 결혼할 무렵이었다.
▲ 시위대가 들고 있는 메구미 씨의 어릴적 모습. 로이터/뉴시스 | ||
깜짝 놀라 집에 와서 몰래 펼쳐 본 그 편지에는 인사말도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이 다짜고짜 ‘북한어 공부는 잘되고 있습니까’ 하는 식의 말이 적혀 있었다. 히토미는 메구미 씨가 보낸 편지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내용은 별로 구체적이지 않았다. 이런 편지를 보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메구미 씨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가 편지를 보더라도 발신인을 찾지 못하도록 일부러 애매하게 썼던 것이다. 다만 이렇게라도 자신의 안부를 히토미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편지에는 그럭저럭 잘 지내며 평양 중심부에 산다고 쓰여 있었다. (중략)
메구미 씨와의 두 번째 접선은 85년인가 86년인가에 이루어졌다. 우리가 평양의 외화 전용 낙원백화점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거기서 여자 지도원과 함께 가게로 들어서는 메구미 씨를 우연히 만났다. 식료품 매장에 있던 우리에게 메구미 씨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내가 내 소개를 하자 메구미 씨는 나에게 일본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못한다고 대답하자 메구미 씨는 북한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부인과 저는 단짝 친구랍니다”하고 말하기에 “알고 있어요. 아내가 만날 자랑하는 걸요”하고 대답했다.
나는 딸 아이를 찾는 척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두 사람에게 이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드문 기회인지 나는 잘 알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시 역할을 하는 북한 사람도 메구미 씨에게 상당한 자유를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한 그 이후 2002년 10월 15일에 히토미가 도쿄를 향해 북한을 떠나는 날까지 메구미 씨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의 애틋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도 나온다.
‘몇 년 뒤에 메구미 씨가 딸을 낳아 이름을 ‘혜경(은경)’이라고 지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혜경은 히토미의 북한 이름이다. 북한에서는 비교적 흔한 이름이지만 우연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메구미 씨가 친구인 히토미의 북한 이름을 따서 딸에게 붙였음이 분명하다.’
▲ <고백>에 수록된 사진. 제일 큰 사진은 지난 2002년 젠킨스 씨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평양공항에서 찍은 것으로 김혜경(은경) 양(왼쪽서 두 번째)도 보인다. 젠킨스 씨 오른쪽 사진이 히토미 씨. | ||
당초 젠킨스 씨는 자진 월북의 진짜 이유와 북한에서의 생활 등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증언하기 위해 2005년경 이 수기를 준비했으나 책이 출간된 시점과 맞물려 자연히 메구미 씨에 대한 언급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젠킨스 씨는 이 수기에서 메구미 씨 행방의 의혹에 대해 상당히 의미심장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메구미 씨의 운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억측이 떠돌고 있다. 살았는가 죽었는가. 북한이 일본에 보낸 유체의 일부가 진짜 그녀의 것인가. 지금부터 내가 쓰는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른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메구미 씨가 살아 있으며 군인이나 공작원과 결혼했고 해외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람과 결혼한 일본인을 북한 정부가 고국으로 돌려보낼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북한 정부가 죽었다고 발표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운데는 북한 사람과 결혼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메구미 씨와 남편이 현역 공작원이라면 북한은 김혜경 양을 이른바 인질로 이용하여 메구미 씨와 남편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게 막을 가능성도 있다.’
젠킨스 씨는 2002년 10월 평양 비행장에서 은경 양을 만났을 때 그가 타고 온 도요타 자가용이 육군 번호판을 달고 있음을 들어 그의 부친이 군인이거나 공작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 실제 아버지 김영남 씨는 현재 북한 공작원을 교육하는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젠킨스 씨의 예상이 어느 정도 적중한 셈이다.
북한 측은 김 씨와 메구미 씨가 86년 결혼해 처음에는 금슬이 좋았으나 메구미 씨가 출산 후 우울증을 앓으면서 93년 가을부터 별거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리고 메구미 씨는 94년 4월 자살했고 이후 김 씨는 북한 여성과 재혼했다고 밝혔다. 이번 가족 상봉장에는 재혼한 김 씨의 두 번째 부인이 은경 양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젠킨스 씨는 60년대 자진 월북한 미군이었기에 북한에서 비교적 후한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진 월북한 주한미군 동료 3명과 함께 평양에 별도의 아파트와 여성 요리사를 제공받았고, 외국인만 드나들 수 있는 백화점과 상점을 통해 비교적 정보도 자유롭게 취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 외국인들은 대부분 평양에 거주했던 데다가 외국인 전용 상점 등을 통해서 다른 외국인의 소식을 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94년 메구미 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적도 없고 믿기도 어렵다는 젠킨스 씨의 증언은 ‘메구미 죽음 미스터리’가 당분간 계속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