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6년 9월 8일 김태촌 씨(오른쪽)와 조직원들이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으로 검거되었다. 87보도사진연감 | ||
나는 무심히 구석 벽에 붙어 있는 진열장을 보다가 이상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성경을 잘라 두껍게 풀로 붙여 만든 화투장이었다. 붉고 검은 볼펜으로 성경 위에 홍싸리껍데기를 절묘하게 그렸다. 칼 종류도 많았다. 건전지의 양철껍질을 뜯어 여러 겹 붙인 후에 날카롭게 날을 세운 것도 있었다. 형광등 철갓을 뜯어내 단도를 만든 것도 있었다. 못을 갈아 만든 흉기도 보였다. 권력의 원천은 역시 쇠 조각인 것 같았다. 담배가루가 빽빽이 찬 우유팩이나 정구공도 보였다. 그 안에서도 역시 폭력과 도박, 환각의 유혹은 존재했다.
한참을 기다린 나는 다시 교도소 깊숙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특별접견실이었다. 비닐 소파에 밝은 색의 벽지를 발라놓은 다섯 평 정도의 방이었다. 잠시 후 김태촌이 휠체어를 탄 채 안으로 들어왔다. 젊은 교도관이 뒤에서 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안에서도 잡지에서 변호사님이 쓰신 글들을 읽었습니다.”
김태촌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감옥에 오래 산 그는 마치 그곳을 자기 집같이 여기는 표정이었다.
“부인께서 부탁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제 아내는 옥중에서 편지를 통해 결혼한 사람입니다. 제가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습니다. 부부라고 하지만 하룻밤도 같이 지낸 사이도 아니고요. 돈 1원도 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못 배우고 못난 저한테 이렇게 헌신해 주는 게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그럴 것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고마운 표정이었다. 영화를 보면 조폭은 의리를 꽤 찾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조폭 두목을 돕는 건 가족밖에 없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남의 인권을 무시해 놓고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저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압니다. 뉴스에 보도된 제 흉한 모습을 직접 봤습니다. 세상에서 던지는 욕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 말들이 다 맞습니다.”
그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객관화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겸손하지도 못하고 머리도 나쁩니다. 급한 성격을 이겨내지도 못하고 폭력을 휘둘러 인격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죠.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사소한 일에 덤벼서 징벌을 받는 인간이니까요.”
그의 어조에는 후회와 한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주먹세계로 들어가게 됐어요?”
나는 그의 인생이 궁금했다.
“저도 어려서는 공부 잘했죠. 어려운 광주사범부속국민학교를 시험 보고 합격해 들어갔으니까요. 아버지는 두부공장을 했는데 망하고 그 뒤에는 리어카에 수박을 싣고 다니면서 팔았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동네에 껄렁패들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길에다 수박구루마를 놓고 집에 밥 먹으러 들어온 사이에 동네 양아치들이 수박을 가져가기도 하고 리어카를 뒤집어 버리기도 하는 거예요. 저는 그걸 보면서 힘이 최고라고 느꼈어요.”
이해할 것 같았다. 원색의 주먹이 판을 치던 세월이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태권도도 하고 권투도 연습했어요. 모래를 가득 넣은 샌드백을 주먹이 까질 때까지 때리고 차고 하는 혹독한 단련을 스스로 했지요. 그 다음은 깡다구를 길렀죠. 매일같이 ‘악바리가 되자. 악이다, 깡이다’ 하고 독종이 되는 연습을 했죠. 주먹을 쓴다는 양아치들을 찾아다니면서 실전싸움을 붙고 얻어맞으면서 악을 길렀어요. 그것도 혼자서는 약하더라고요. 소년원을 들락거리면서 가장 강력한 조직을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건달아이들을 규합했죠. 스물다섯 살에 벌써 아이들 몇 백 명을 모을 수 있었어요. 주먹도 주문이 오더라고요. 나중에는 정치인들에게서 일을 청부 받을 정도였어요.”
현실의 모든 분야에서 폭력을 사는 일이 흔했다. 철거 현장, 종교분규 현장, 정치판, 시위대 어디서나 건달들이 설쳤다.
“1976년도인가 신민당 전당대회 때 조직아이들 몇 백 명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신민당 총재를 뽑는 대횐데 낫하고 각목을 가지고 대회장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죠. 날이 서늘하게 선 낫을 보더니 단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뛰어내려 도망가기 바빴어요. 그런 공로로 스물다섯 살 때 신민당 중앙당 차장 자리를 맡았어요. 책상도 크고 의자도 그럴듯하게 빙빙 도는 회전의자였죠. 그런데 1년을 정당에 있어보니까 정치인이라는 게 참 치사하더라고요. 차라리 건달이 좋은 거 같았어요. 그래서 그만뒀는데 그때 같이 당에서 차장을 하던 사람들이 벌써 3선의원도 하고 4선의원도 해요. 내가 정치인을 많이 안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런 인연이죠.”
읽은 자료와 대충 일치하는 것 같았다.
“송도호텔 사건은 어떤 거였어요?”
내가 물었다. 그건 경제 분야에서 경영권을 뺏기 위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호텔 사장의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경영권을 뺏은 걸로 알려져 있었다.
“송도호텔 사장 테러사건은 사실 제가 무슨 이권을 노리고 한 건 아닙니다. 그 배후는 사실 아무개 부장검사였죠. 그 부장검사가 당시 5억 원을 그 호텔에 몰래 투자했어요. 그런데 공직자라 거꾸로 당하는 거예요. 호텔 사장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 무렵 저는 고향선배인 그 부장검사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단순한 생각을 했어요. 후배들이 낫을 들고 찾아가 일을 벌였죠. 그 부장검사가 직접 시킨 것도 아니고 제가 알아서 기었으니 그 사람한테 무슨 책임이 있겠어요. 내가 다 뒤집어썼죠.”
“사실대로 법정에서 얘기하지 그랬어요?”
내가 말했다.
▲ 89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난 김태촌 씨가 신앙간증하는 모습. | ||
조폭두목의 감추어진 이면들이 적나라하게 그의 말 속에 들어 있었다. 결국 현실 권력의 하수인이고 희생자였다.
“제가 형기 도중 폐암진단을 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었습니다. 사실 조직 간의 싸움에 아무 이익이 없었어요. 공연히 이용당하고 감옥에 가는 희생만 치른 거죠. 그래서 3개 패밀리가 한강 고수부지에서 축구대회를 하자고 그랬어요. 그걸로 조직 간의 전쟁을 종료시킨 겁니다. 우리끼리 피 흘릴 이유가 없어요. 그 모임에 인연을 맺었던 정치인들을 모셨어요. 그랬더니 신문들이 내가 장군, 정치인, 목사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같이 보도를 하더라고요. 언론이 저를 곱게 보지 않았죠. 한 일간지는 특집까지 만들어서 저를 보도했으니까요. 심지어 폐암으로 한쪽을 잘라내고 나중에 진주교도소에 온 것까지 그 신문은 제가 국회의원 백으로 옮겨왔다고 했죠.”
그는 언론에 대해 유감이 많은 것 같았다.
“저는 조용기 목사님을 안 뒤 아버지같이 따르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예수를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500명 되는 전국의 후배들을 파주 부근에 초청했어요. 조용기 목사님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혹시나 건달들의 조직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걱정해서 지역주민들도 초청하고 신문기자와 지역 정보과 형사들도 불렀죠. 그렇게 했는데도 검찰은 제가 후계자를 결성하는 범죄단체를 조직했다고 잡아넣더라고요.
그 무렵 검찰은 전국의 조직폭력배를 없애려고 마음먹었어요. 저를 잡아넣으면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때 제가 범죄단체 조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두목이 되고 싶은 후배가 검찰의 회유에 넘어간 것 같았어요. 검찰 입맛에 맞는 진술을 한 거죠. 그리고 배신한 후배가 그 모임을 서방파의 결성식이라고 모략했어요. 조용기 목사님이 저를 도우려고 하니까 그렇게 하면 공범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검찰에서 협박하는 바람에 목사님이 물러났어요.”
그의 시각에서는 참회의 모임이고 종교적 행사였다. 검찰의 시각에서는 새로운 전국적인 폭력조직의 창단식이었다. 뇌 속의 생각을 주장하고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대도 조세형은 겸손하고 머리가 좋은 친굽니다. 그는 사회의 좋은 여론을 등에 업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정반대입니다. 사회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조직폭력의 두목입니다. 저는 그 낙인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조폭의 보스를 어떻게 보죠?”
내가 물었다.
“제가 사회에서 보스 노릇을 해서 그런지 여기 있는 사람들도 의외로 제게 많은 걸 기대해요. 속옷도 이름 있는 메이커 제품을 주지 않으면 욕해요. 그게 재소자들입니다. 빵도 조금만 지나면 안 먹고 버려요. 저는 기간이 지난 거라도 가져다 냄새 맡아 보고 괜찮으면 먹어요.”
그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전 치사하게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식이고 돈이고 후배들에게 시원시원하게 나누어준 편입니다. 참, 변호사님도 이렇게 힘들게 내려오셨는데 마음 같아서는 후배들을 시켜서 에쿠스라도 한 대 사 드렸으면 좋을 텐데….”
에쿠스 한 대면 7000만 원이 넘는 초호화판 승용차였다. 그의 주변에서 제시하는 변호사 선임료는 억대가 넘었다. 어떻게 보스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결국은 돈이고 인심이다. 싸움을 잘해서만이 아니었다.
“그걸 받을 순 없습니다. 김태촌 씨는 재심을 통해 석방되기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김태촌 씨의 바뀐 내면까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을 겁니다. 법원의 판사 역시 그런 사회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입니다. 국회에서 사회보호법이 폐지되면 그때는 나가실 수 있죠.”
그의 재심사건을 거절한 셈이었다. 나는 사실 사건이나 수임료보다 인간 김태촌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갔었다.
“감옥이 아닌 밖에 있었으면 지금 어떨 것 같아요?”
내가 물었다.
“제가 사회에 있었더라면 아마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때가 있어요.”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감옥 안이지만 저도 뭔가 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뭘 했는데요?”
“컴퓨터도 해보겠다고 워드 자판도 두드려 보고 서예도 해봤어요. 그런데 되는 게 없어요. 사람마다 다 자기 길이 있는 거예요. 차라리 목욕하는 사람 등 밀어주고 청소하는 게 제가 할 일인 거 같아요.”
“그래도 이젠 믿음이 생겼다고 부인께서 말씀하시던데요.”
내가 물었다.
“어려서부터 엄청나게 나쁜 일을 했는데 교도소에서 냄비같이 잠시 뜨겁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부끄러워했다.
“저도 솔직히 감옥에서 나가고야 싶지요. 그렇지만 남을 짓밟아 놓고 저만 인권을 찾고 나간다고는 말 못하죠. 만약 언젠가 석방되면 아내하고 외딴 섬으로 가서 여생을 조용히 살고 싶어요. 소나 양을 치고 사회의 유혹을 받지 않고 말이죠. 그리고 제가 못 배웠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학교도 세우고 싶어요.”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4년 후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법이 폐지되고 그는 석방됐다. 그는 섬에 가서 소나 양을 치는 게 아니라 전도사가 되어 인간의 영혼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국가도 못 고치는 청소년의 폭력조직을 와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