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얼굴이 주간지의 표지사진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그 배경으로 흉측한 문신을 한 조폭들의 모습이 줄지어 서 있기도 했다. 사진의 중앙쯤에 ‘3대 조폭 패밀리의 최근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등의 제목들이 강조되어 있기도 했다.
7월 11일 해거름에 김태촌 씨가 나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헐렁한 여름 티셔츠에 손에는 백화점의 종이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듯 움푹 들어간 뺨에 머리도 많이 빠져 있었다. 나의 눈에는 오십대 중반의 평범한 모습의 남자일 뿐이었다. 몇 년 전 그가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 잠시 얘기를 나누고 나서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거 좀 보십쇼.”
그가 쇼핑백에서 현란한 주간지들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신문들이 왕년의 서방파 조직원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그중에도 저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석방이 된 후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또 조직을 만든다고 할까 봐요. 그런데도 나를 이렇게 해요.”
그의 탁하고 쉰 목소리 속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저는 암으로 한쪽 폐도 잘라냈어요. 또 병원에 가 보니까 심장도 아주 나쁘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끝까지 조폭 보스란 이름을 붙여 이렇게 괴롭혀야 되겠습니까? 표지에 나온 제 사진 보십쇼. 내가 봐도 흉측합니다.”
그의 부하였던 조직원들도 나이가 꽤 들었을 것 같았다. 이미 그 세상에서도 흘러가버린 세대들 같았다.
“예전에 같이 테러를 했던 조직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 사람들도 모두 오십대를 넘었어요. 그중에는 이제 식당을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자동차 부품가게를 하는 후배도 있어요. 자식을 미국의 유명 대학에 입학시켰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요. 나름대로 다 착실한 가정을 가지고 살죠. 왕년에 건달이었다는 게 자기 자식들한테 무슨 자랑이겠습니까? 그러니 그 사람들인들 자기 집으로 저를 초대하고 싶겠습니까? 그렇지만 솔직히 우리끼리는 어렸을 때 정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보고 싶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수사기관에서 동향을 파악하는데 어떻게 만납니까? 만나면 또 조직을 재건한다는 의심을 하니까 보고 싶어도 못 만나죠. 후배 중 이제는 독실한 크리스천이 된 한 명만 나를 집에 초대해 저녁밥을 먹은 적이 있어요.”
그만의 괴로움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 사회는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살아가기 힘들다. 내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야당 전당대회에 각목을 들고 난입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또 호텔 경영권을 뺏기 위해 사장을 손보는 조폭의 보스였다. 지금도 영화에서 그런 장면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정히 관찰하면 그는 조역이었다. 그에게 명령을 내린 주역의 존재는 아직도 안개 속에 희미하다. 문득 그런 사건들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정치판의 전위대로 나섰던 결과는 어땠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다.
“신민당에 난입해서 총재실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김영삼 총재 앞에서 도끼를 빼들었던 일도 있었고요. 다른 의원들은 다 도망하는데도 그분은 피하지 않고 그냥 계시더라고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양쪽에서 팔을 끼고 강제로 모셔 가는 걸 봤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들이죠. 그때 부하 27명을 데리고 경찰서에 자수해 들어갔어요. 그런데 저에게 그런 지시를 했던 정치인들이 나중에 어땠는지 아세요? 변호사 한 명 붙여주지 않는 건 물론이고 면회 한 번 안 왔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다 걸레 같은 놈들이었죠.”
그는 계속해서 지난날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정권마다 번번이 저를 이용했습니다. 6공 말에도 정권의 핵심에 있는 양반이 저 같은 조폭의 보스들을 모이게 해서 은밀히 단체를 구성하게 했죠. 시키는 일이 뻔해요. 반대편 단체들을 때려엎으라는 거죠. 그때 저는 우쭐해서 마카오에 가서 북한 놈들이라도 때려잡아 오겠다고 그분 앞에서 객기를 부렸습니다. 연말 파티 때였죠. 권력의 핵심에 있던 그분은 만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시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면서 술을 한 잔 내리시더라고요. 황공하게 받았죠.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니까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저를 비롯해서 다 잡아서 감옥에 들어가게 한 것 같아요. 그래도 열심히 일을 했으니까 뒤에서 봐주실 거로 기대를 했죠. 수시로 연락이 왔어요. 그 어르신이 퍼시픽 호텔에서 검찰총장을 만나고 계시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법정에서 보니까 저한테 사형이 구형되더라고요. 그제야 또 이용당했다는 걸 알았죠. 하여튼 정권들은 저 같은 조폭 보스들을 이용하고 버리고 그래왔어요. 저를 이용한 그 권력자들이 뒤에서 살려주기는커녕 오히려 저를 아예 사형시키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죠. 그런 게 내가 살아왔던 험한 세상입니다.”
“경제계나 다른 분야에서 이용당한 일은 없어요?”
내가 물었다. 분야마다 조폭의 수요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획사들이 있지만 옛날의 연예인들은 나이트클럽에 나와야 돈을 벌고 그래서 조폭들과 인연이 맺어지거든요. 연예인들 때문에 여러 재벌회장님들을 만나보기도 했었죠. 재벌회장님들도 성격이 가지각색이셨죠. 금호그룹 회장님 같은 분은 그 높은 분이 우리를 만나도 항상 반가워해주고 그랬습니다. 우리들의 아픔도 알아주는 멋있고 의리 있는 분이었죠. 또 돈에 철저한 검소한 분들도 있었어요. 정주영 회장 같은 분은 단돈 1만 원도 허투루 안 쓰는 분이었어요. 제가 담당 웨이터와 돌아가신 코미디언 이주일 씨한테 들은 얘긴데 정주영 회장님은 술값까지 철저히 깎으셨죠.”
그의 얘기들은 한 시대의 정확한 이면의 역사였다. 자세히 다 들으려면 한이 없을 것 같았다. 난 그것보다 바뀐 인간 김태촌의 진면모를 살피고 싶었다.
▲ 김태촌 씨(왼쪽)는 최근 국제청소년범죄예방교육원 원장으로 위촉돼 청소년 범죄 예방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 ||
사회보호법이 국회에서 폐지되는 바람에 그는 석방됐다.
“집사람하고 섬에 가서 바닷물에 몸을 담갔죠. 감옥에서 항상 먹고 싶었던 게 전라도의 텁텁하고 짠 김치였죠. 게장도 먹고 싶었고요. 그걸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유가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고 절감했습니다.”
행복은 소박한 일상에 있다는 걸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꿈을 꾸면 아직도 교도소의 독방 안에서 감시를 받고 있어요. 그러다 깨어나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죠.”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여기저기 불려가서 신앙 간증도 하고 교도소 찾아가서 불량청소년들에게 좋은 말도 해줍니다. 특히 폭력으로 잡혀온 아이들에게 내가 지내온 얘기를 솔직하게 해주고 나면 그 아이들의 입에서 ‘이제 절대로 싸움을 하지 말고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말이 나와요. 그럴 때 가슴이 뿌듯하죠. 그 아이들 하나하나 손을 잡아줬습니다.”
불량청소년들에게는 그만 한 선생님이 없을 것 같다. 그가 최근 사생활도 숨김없이 말했다.
“지금 의왕에 있는 아파트에 살아요. 가수를 했던 집사람 거죠. 용돈은 조그만 회사를 하는 아들이 줍니다.”
그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표정에서 아직 건재하다는 자존심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냥 아들한테 얻어먹는 건 아니고 일부 밑천은 대줬습니다. 지금도 저는 혼자 사업을 하라고 하면 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혹시 제가 불법적인 영업에 손대지 않을까? 세금포탈이라도 하지 않나? 하는 색안경을 쓰고 보기 때문에 돈 근처에도 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조심하는 것 같았다.
“조폭의 보스라는 게 뭡니까?”
내가 물었다.
“내 인생의 멍에죠. 지금도 어디 가서 인사를 하면 겉으로는 ‘안녕하세요’하고 반갑게들 인사를 해 주지만 그 사람들 얼굴을 보면 잠시 후에 창백해지면서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진짜 마음을 주려는 사람들이 없어요. 또 외출할 때 안경을 쓰고 변장해도 길 가는 사람들이 다 알아봐요. 나하고 친한 관계가 되는 걸 모두 꺼려하죠.”
석방됐지만 그는 또 다른 편견의 유리벽 속에 갇혀 있었다. 호소 같은 그의 고통스런 얘기들이 계속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조직원이었던 후배들을 만나 즐겁게 밥이라도 먹고 싶은 유혹이 불쑥불쑥 일어납니다. 얼마 전 딸 백일이라고 불러주는 후배가 있었는데 가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공식적인 간증이나 강의 자리에만 가게 되니까 조금은 외롭습니다. 지금 저의 제일 큰 소원이 있다면 조폭의 보스라는 낙인을 지우는 겁니다. 세상에는 그런 낙인을 이용하려고 따라붙는 똥파리떼 같은 놈들도 있어요.”
“한국 조직폭력의 보스를 지낸 다른 선배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드라마에서 그들은 아직도 화려했다.
“한때 명동을 잡았던 ‘신상사’나 ‘오따’ 또 ‘낙화유수’ 같은 분들 이제 노인이 되어 다 사라졌어요. 그분들 한때 돈 많고 잘나갔죠. 그렇지만 지금은 모두들 평범한 인생을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들에게 예의를 지킵니다. 보스가 되려면 나름대로 이 분야에서도 후배들을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끊임없이 좋은 얘기를 들려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배들을 거느립니다. 영화에서와 같이 군림하는 이기주의자들은 절대 보스가 되지 못합니다.”
몇 년 전, 보스였던 그를 위해 뛰는 용감한 후배 두 명을 봤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건 정이었다.
“인생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어요?”
내가 물었다. 나는 변호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꼭 그 질문을 했다. 수시로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전 어려서 동네 깡패들이 아버지 수박 리어카 뒤집어엎는 걸 보고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주먹이 최고구나’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살다 보니까 그런 주먹의 힘은 가장 ‘하빠리’, 바닥의 힘입니다. 다시 내가 태어난다면 어려서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만 할 겁니다. 남북한 협상테이블에 앉아서 국가 대계를 의논하는 그런 인물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같이 되어 보고 싶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흐려지면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시계가 벌써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치과의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가슴 아픈, 후회하는 일들이 있죠?”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있습니다. 어린 시절 교도소의 계장이 퇴근할 때 찾아가 칼질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 고발한 술집사장을 찾아가 보복을 했었죠. 같은 조폭끼리면 몰라도 왜 일반인에게 그렇게 했을까 생각하면 후회가 됩니다. 그때 일 때문에 그분들이 지금도 고통을 받는 걸 보면 정말 할 말이 없죠.”
그가 잠시 쉬었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저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건강입니다. 아내하고 포장마차라도 하나 차려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국수라도 맛있게 말아드리고 싶어요.”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