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6·29 선언을 발표하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 | ||
6공 정권의 출범을 전후해 6·29 선언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우국충정의 결단’인 것으로 처음 알려졌다. 이후 5공 측은 ‘6·29의 실질적 연출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고 노 씨는 다만 여기에 충실하게 연기한 주연배우에 불과하다’며 반격했다. 그런 가운데 최근에는 이 역사적 사건의 실질적 연출자가 전 씨도 노 씨도 아닌 미국이라는 정황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미국을 움직이게 한 힘이 따로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과연 6·29 선언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그 힌트는 역시 미국에서부터 나왔다. 지난 6월 초 <일요신문>은 미국에 체류 중인 한 언론계 인사와의 전화통화에서 결정적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87년 당시 미국 측에 6·29 선언의 내용과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제시한 국내 인사가 있었다”는 것.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석 자는 ‘강원일’ 변호사였다.
현재 법무법인 태평양에 몸담고 있는 강원일 변호사(65)에게 기자는 곧바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만남을 애써 피했다. 기자는 이메일로 강 변호사에게 좀 더 구체적인 인터뷰 목적을 실어 보냈다. 강 변호사에게 연락이 온 것은 7월 초였다.
지난 7일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기자와 마주한 강 변호사는 “기자가 보낸 메일 내용을 봤다. 우선 사실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가 6·29 선언문을 직접 작성했다거나 그 시나리오를 정식 문건으로 작성해서 미국에 넘겼다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내가 당시 제시한 시국수습 방안과 그 시나리오가 6·29 선언과 사실상 일치했다는 점은 맞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정황상 내 아이디어가 (미국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확인이 있기 전에는 확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당시 상황이 궁금하다. 강 변호사의 시국수습 방안이 어떻게 미국 측에 전달될 수 있었나.
▲87년 5월경 내가 춘천지검장의 임기를 거의 마치고 대검 중수부장 발령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와 절친하게 지냈던 한국계 미국인 L 씨가 있었다. 그는 미 정보부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 근무 중이었다. 국내 정치 동향을 수집해서 보고하는 역할이었다.
당시 국내 상황은 풍전등화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 속에서도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 조치를 내놓았다. 곧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군이 동원될 것이란 얘기가 파다했고 서울에서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이란 예측도 난무했다. 미국 역시 큰 걱정 속에서 국내 정국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어느 날 L 씨가 춘천의 내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기에 시국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먼저 현 국내 상황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나.
▲당시는 88년 서울올림픽을 불과 1년 앞둔 상황이었다. 이런 시국 상태를 계속 방치한다면 이 땅에서 올림픽은 열리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미국은 지난 80년 신군부 세력이 ‘광주사태’ 등을 일으켰을 때 이를 묵인하거나 방조한 원죄가 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강경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현 정권을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미국밖에 없다고 했다.
―미국 측에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요구했나.
▲당시 대다수 국민들의 열망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5공 정권이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도록 미국이 설득하거나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5공 정권으로서는 패배가 불 보듯한 직선제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지 않았나.
▲그렇다. 그래서 더더군다나 그것을 받아들일 명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당시 나는 최대한으로 모두가 살 수 있는 대화합의 차원을 모색해야 한다고 봤다. 여당에게는 명분을, 야당에게는 실리를, 국민들에게는 만족을 주는 ‘윈윈 전략’이었다. 그 중재 역할이 필요한데 당시 불행하게도 국내에는 그런 중재를 할 원로도 정치 협상가도 없었다. 나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은 미국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5공 정권이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일 명분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6·29 선언 시나리오였다.
―어떤 시나리오를 구상했는가.
▲우선은 당시 난국을 타개할 한 명의 영웅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 영웅이 야당인사가 될 경우에는 승패가 너무나 명백해진다. 집권세력은 완전히 역사의 범죄자가 된다. 그래서 그 영웅은 여권에서 나와야 한다고 봤다.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여당에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대양보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당도 일정 부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야당도 집권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대화합의 차원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노태우 후보가 6·29 선언을 주도한 것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했나.
▲그렇다. 전 대통령은 안 된다. 그는 이미 7년 임기를 모두 마치고 물러날 대통령이었다. 현역 대통령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칫 국민들에게 ‘정치적 쇼’로 비치거나 ‘진정성’에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직선제 수용으로 가장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인사는 노 씨였다. 현 상황만 유지하면 노 씨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가 L 씨에게 그런 시나리오를 제시할 때는 노 씨가 정식으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 며칠 전이었지만 당시에도 거의 확정적이었다.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자세로 나간다면 나는 노 씨가 영웅으로 입지가 올라갈 수 있다고 봤다.
▲ 6·29 선언 시나리오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강원일 전 검사장. | ||
▲물론 쉽지 않다고 봤다. 처음 그 제안을 들은 L 씨 역시 ‘그게 이상적으로야 좋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나’라고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더라. 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는 걸…. 아니면 군대 출동하고 야당인사 투옥되고 파국으로 갈 수밖에. 다른 이가 아닌 미국에서 강하게 얘기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봤다.
―강 변호사가 당시 6·29 선언의 주 내용인 8개항을 모두 포함한 12개항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사실이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시 시국 상황에서는 직선제 수용, 김대중 씨 사면 복권, 언론자유보장 등의 시국 수습 방안이 야당과 재야시민단체의 공통된 요구였기 때문에 특별히 내가 따로 기획하거나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에도 내가 책상에 있는 종이 위에 직접 펜으로 1, 2, 3 하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가면서 시국수습 방안 12가지를 죽 써내려갔다. 그 종이를 L 씨가 챙겨간 것이지 내가 무슨 문건을 정식으로 만들어 준 것은 아니었다.
―6·29 선언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전후 시나리오까지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제 그대로 됐나.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리만큼 똑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나도 솔직히 내심 놀랐다. 나는 당시 이런 발표를 노 후보가 직접 하되 그 형식은 대통령도 그 누구도 모르는 본인만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인 것처럼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발표는 당사에서 사전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해야 하고, 마지막에 반드시 ‘이런 내용을 대통령에게 건의한다’는 식으로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대통령이 이런 노 후보의 건의를 난국수습을 위해 전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되면 노 후보는 영웅이 되고 전 대통령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일정 부분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당시 내가 L 씨에게 가장 강조한 부분은 노 후보가 건의문을 낭독한 이후 절대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말고 곧바로 자리를 떠야 한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여당 후보 혼자만의 우국충정에 의한 건의문일 뿐 아직 대통령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질문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받게 되면 기자들 사이에서 갑작스런 이런 선언문 발표의 배경을 물고 늘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실제 당시 강 변호사의 시나리오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랬다. 더 놀랐던 것은 향후 노 후보와 전 대통령의 행보 역시 내가 제시한 시나리오와 똑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이 시나리오를 얘기하면서 이런 고민을 했다. 이런 경천동지할 내용을 발표한 뒤에 노 후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극적인 효과가 두드러질까 하는 점이었다. 당사에 남아 있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집에 가서 칩거하기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나라와 역사를 위해 훌훌 털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것이었다. 거기만 다녀오면 너무 시간 틈이 짧으니까 아예 아산에 있는 현충사까지 참배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대통령이 재가하는 시간도 벌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것 역시 강 변호사의 시나리오대로 그대로 간 셈인데.
▲6월 29일 TV를 통해 노 후보의 발표와 이후 국립현충원 현충사 등을 가는 모습을 보고 나 또한 적잖게 놀랐다. 그때 마침 L 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대뜸 내게 ‘봤지요? 강 검사가 말하던 대로 이제 그대로 됐지요?’라고 말하더라. 나는 ‘그러게. 그렇게 됐네’라고만 말하고 말았다.
―6·29 선언 이후 정국 상황까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나.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상황이었니까…. 처음 내 시나리오를 미국에서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은 직선제 수용시 여당의 패배가 너무도 뻔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100% 여당이 질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했다. ‘물론 대통령 직선제하에서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아마도 김영삼 씨가 집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땅의 야당 세력은 오랜 재야 투쟁으로 수권 능력이 거의 없다. 집권하더라도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다. 노 후보를 포함, 5공 세력은 제1야당으로 존재해서 차기를 충분히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6·29 선언 등으로 민주화 이후 새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예상만큼은 나도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웃음).
―혹시 당시 강 변호사의 시나리오가 미국에 어떤 과정으로 전달됐고 반영됐는지 들은 바가 있나.
▲그 이후로 L 씨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상황이 급변했고 그도 바빴고 나도 바빴다. 전화 통화는 몇 번 했던 것 같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그가 한참 후에 미국에서 책을 한 권 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에 당시 내 안이 반영된 과정도 일부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강 변호사에 따르면 L 씨는 지난 96년경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책을 한 권 썼다고 한다. 이 책에서 6·29 당시 상황도 비교적 소상히 밝혔다는 것. 그에 따르면 ‘강 검사장이 제시한 시나리오를 상부에 보고했다. 처음에는 다소 회의적이었으나 6월 들면서 이한열 군이 사망하고 전 대통령이 위수령 발동을 명령하는 등 사태가 더 악화되자 내 안을 본격적으로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12일 오전, 미 정보부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이 청와대를 방문해서 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강 검사장이 제시한 12개항과 시나리오를 공식적으로 전달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이 책은 국내에서도 언론에 의해 소개됐지만 이상하게도 강 변호사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이 없었다. 기자가 그 이유를 묻자 강 변호사는 “내가 인터뷰 자체를 하지도 않았지만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거겠지. 다만 5년 전인가 모 방송국의 시사프로(강 변호사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기억했다)에서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