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록 | ||
김재록 씨 구속 이후 검찰은 현대차에 대한 압수수색과 정몽구 회장 구속수감, 그리고 이헌재 전 총리에 대한 계좌추적과 출국금지 조치 등 굵직한 뉴스들을 생산해 왔다. 그러나 ‘마르지 않는 샘’으로 여겨졌던 김재록 게이트가 이제 그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전언이다. 김재록 게이트 관련자들 중 가장 큰 처벌을 받게 될 사람은 어떤 고위직이나 거물급 인사도 아닌 김 씨 본인이 될 것이란 이야기도 들려오는 상황이다.
김재록 게이트를 통한 검찰의 수사 범위는 크게 세 가지다. 현대차 총수일가에 대한 처벌과 현대차 비자금 용처 수사, 이헌재 사단과 외환은행 사태의 상관관계 의혹, 그리고 김재록 씨 본인과 몇몇 기업들 간의 부적절한 거래가 검찰 수사의 큰 갈래들이었다. 그런데 이 수사들 모두 몸통을 건드리기보다는 깃털 뽑기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대차 수사는 ‘정몽구 회장 구속’이란 명분 획득을 끝으로 사실상 마무리된 것이나 다름없다. 당초 검찰은 ‘총수부자 모두 구속’ 혹은 ‘정몽구 불구속, 아들 정의선 구속’으로 내부 방침을 정했으나 정 회장이 추가 기소를 감수하면서까지 모든 짐을 짊어졌다. 수감 두 달 만에 병보석으로 나온 정 회장은 외부인사 접견 등 곧바로 경영일선에 나서고 있다. 반면 정 회장과 함께 기소된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과 이정대 김승년 부사장 등 3명은 최근 공판에서 “정 회장은 비자금 조성 사실을 구체적으로 몰랐다”며 주군을 위한 항전을 펼치고 있다.
정 회장은 비자금 용처, 즉 돈을 누구에게 줬는가에 대해 결정적 진술을 거부하면서 검찰의 용처 수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얼마 전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가까운 인사들과의 자리에서 용처 수사가 사실상 어렵게 됐음을 시인했다고 한다. 정 회장이 정관계에 두터운 ‘신의’를 쌓았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수사당국이 여권 유력인사들의 비자금 수수 첩보를 입수했지만 본격적인 수사에는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확실히 옭아맬 수 있는 정황 포착이 안된 이상 자칫 검찰이 정치적 논란에 휩쓸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탓이다.
즉 김재록 게이트로 불거진 현대차 수사로 인해 곁가지인 현대차 로비스트인 김동훈 안건회계법인 전 대표, 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와 이성근 전 산은캐피탈 사장이 구속되고 정 회장 측근인사들은 검찰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현대차는 정의선 승계체제에 가속을 붙일 전망이다.
김재록 게이트 수사는 현대차 수사, 정 회장 구속이라는 ‘파생상품’을 낳은 뒤 이헌재 사단을 향해 물꼬를 돌렸다. 외환은행 헐값매각 논란이 재부상하면서 이헌재 전 부총리에 대한 계좌추적과 출국금지 조치가 단행되고 이헌재 사단 핵심 인물인 오호수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과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직을 먼저 지낸 김재록 씨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당국은 이헌재 사단의 시니어급을 옭아맬 정황 포착 여부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외환은행 건이 아닌 다른 건으로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연원영 전 자산관리공사 사장 등 이헌재 사단의 ‘주니어’들을 구속했지만 정작 핵심이랄 수 있는 외환은행 매각 건이나 시니어급 수사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
얼마 전 이헌재 사단 핵심격인 정건용 전 산업은행 전 부총재 소환조사가 이뤄지면서 이헌재 사단 수사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이 잠시 나돌기도 했다. 일각에선 ‘검찰의 처벌 수위가 정 전 부총재 윗선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의 사법처리 여부도 불투명하다. 검찰이 애초에 겨냥했던 이헌재-오호수 두 핵심인물에 대한 칼날은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평이다.
그러나 이헌재 사단 핵심인사들이 사법당국의 ‘칼’은 피하더라도 자리를 보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란 평이 지배적이다. 얼마 전 이강원 한국투자공사 사장이 사의표명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외환은행 매각 당시 이강원 당시 행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제용 한국투자공사 상무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면서 이강원 전 행장의 운신의 폭 또한 좁아졌다는 후문이다.
이헌재 사단 핵심 인물 격인 A 씨와 B 씨도 자신들이 속한 조직 내부에서 핀치에 몰리고 있다. 두 사람이 속한 기관은 여권 상층부의 입김이 다른 곳에 비해 크게 미친다. A 씨는 이헌재 사단 수사과정 내내 문제 인물로 각인돼 여권 핵심으로부터 단단히 찍혔다는 후문이다. B 씨는 내부조직 인사들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정치권과 법조계 일각에선 ‘여권 핵심부와 사법당국이 이들 인사들에 대한 사법처리 대신 자진사퇴에 동의했다’는 이야기마저 나도는 실정이다.
한편 현대차 수사나 이헌재 사단 조사에 대한 열기가 이처럼 식어버린 배경엔 김홍수 게이트의 등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법조계 현직 고위 인사들이 대거 연루된 김홍수 게이트가 검찰의 의도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김재록 게이트가 자연스레 퇴로를 찾은 셈이다. 이헌재 사단 수사가 장기화될 경우 ‘그물을 찢고 다니는 큰고기들’에 대한 조사를 피할 수 없다. 대북 송금 사건 수사가 불러온 후폭풍을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정치 판도까지 건드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와중에 김홍수 게이트가 등장했다. 김재록 게이트를 ‘자연사’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게다가 정치권에서 천정배 법무장관의 여당 복귀설도 김재록 게이트 수사 조기 마무리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얼마 전 천 장관이 측근들과의 모임을 갖고 조만간 당에 돌아가 대선후보 경선 준비에 나설 논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정치권에 파다하다”고 전한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정동영 전 의장의 위상 추락과 김근태 현 의장의 리더십 논란 등이 ‘천정배 대안론’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천 장관은 ‘잡음 없는’ 정치권 복귀를 위해 자신 임기 동안에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마무리를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 삼성에버랜드 수사가 8월 말에 마무리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도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최근 김재록 씨가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정됐던 몇몇 기업체 고위인사들도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임병석 C&그룹(옛 세븐마운틴 그룹)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C&그룹에 대한 검찰 측 분위기가 ‘그다지 냉랭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재록 게이트 수사로 인해 수많은 거물급 인사들 이름이 거론됐지만 결국 철창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낼 사람은 김재록 씨 본인이 될 것이란 관측에 점차 무게가 실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