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대표적 항공사인 대한항공이 그동안 무자격 조종사를 고용해 운항해 왔다는 의혹이 제기돼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대한항공에서 11년간 부기장으로 근무한 바 있는 이 아무개 씨(58)는 <일요신문>에 “대한항공에서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 소지자가 비행기 운항을 해왔다”는 취지의 내용을 제보했다. 그는 또 “1993년 이후는 물론 그 이전에도 헬리콥터 조종사와 비행기 조종사의 자격증은 엄연히 구분돼 있었음에도 사업용 조종사 자격증이 구분 없이 사용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 측은 “이 씨의 주장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무책임한 의혹 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회사 측은 “그의 주장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억측이라는 점은 이미 법원 판결에서 밝혀지지 않았느냐”고 강력히 반발했다. 현재 이 씨는 대한항공 측에 의해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해 2심까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태로 알려졌다.
이 씨 역시 한치의 양보 없이 맞서고 있다. 현재 미국에 건너가있는 그는 “대한항공이 국제항공법을 어겼다”며 미국 법원에 정식 제소를 준비하고 있다. 전직 조종사와 항공사 측의 극단적인 대립이 불거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씨가 제기하는 무자격 조종사 고용 의혹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 씨는 현재 미국 시카고에 체류 중이다. 그는 <일요신문>과 지난 11일부터 약 열흘간에 걸쳐 수차례의 국제전화를 통해 관련 내용을 폭로했다. 그리고 증빙 자료들은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을 통해서 <일요신문>에 제시했다.
1987년 대한항공에 항공기 조종사로 입사, 99년 퇴사할 때까지 만 11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는 그는 현재 대한항공과 법적 분쟁 중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가 제기하는 의혹은 여러 가지였고 내용에 따라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부분도 포함됐다. 하지만 일정 부분은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거나 미처 확인이 안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씨가 제기한 의혹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 소지자가 비행기 운항을 해왔다’는 의혹이다.
이 씨는 “대한항공은 비행기 조종 무자격자에 해당하는 헬리콥터 조종사들을 비행기 조종사로 고용해 왔으며 그동안 있었던 대한항공의 비행 사고가 이처럼 암암리에 행해진 무자격 조종사 고용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씨는 그 대표적 사례로 현직 조종사로 근무 중인 C 씨와 K 씨를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확인 결과, 두 사람은 이 씨와 대한항공 간의 법정 소송 과정에서 직접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가 대한항공이 ‘무자격 조종사’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항공법에는 비행기와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에도 대한항공은 이를 구분 없이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 측은 “헬리콥터 자격증 소지자라 할지라도 자격증을 발급하는 기관인 교통안전공단에서 인정할 경우에는 비행기 조종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C 씨와 K 씨의 경우 당초 헬리콥터 자격증 소지자였지만 이후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각각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회사 측이 지난 2월 법원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93년 항공법이 개정되기 이전의 구 규칙에서는 헬리콥터와 비행기가 구분되지 않았으나, 93년 이후의 신 규칙부터 구분됐다”고 밝히고 있다.
C 씨와 K 씨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지난해 법정 증인 신문에서 C 씨는 “85년 입사 당시 헬리콥터 자격증만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항공기 조종사를 하게 되었는가”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입사 당시에는 사업용 조종사 자격증에 헬리콥터와 비행기 조종 자격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고 1993년부터 면허증이 따로 나왔다”고 진술했다. 그는 “지금은 헬리콥터와 비행기의 조종사가 나누어져 있지만 우리가 시험 볼 당시에는 사업용 조종사 자격 안에 헬리콥터와 비행기가 같이 들어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헬리콥터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93년 이전에는 비행기 조종이 가능했는데 93년 이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인가”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K 씨 역시 “입사할 당시 사업용 조종사 자격증이 있었는데 이 자격증에는 헬리콥터와 비행기가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며 같은 진술을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항공안전본부에서도 똑같은 입장을 밝혔다. 이 기관의 한 관계자는 “85~86년에도 사업용 조종사 자격증에 헬리콥터와 비행기 자격은 엄연히 구분해서 발급했다”고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왜 당초 대한항공이 법원에 제출한 자료와 두 현직 기장의 증언이 교통안전공단 및 항공안전본부의 입장과 다른 것일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자 대한항공 측은 “확인 결과 두 기장이 법정 진술 당시 질문의 정확한 취지를 이해하지 못해 잘못 답변한 것으로 보인다”는 새로운 해명을 내놓았다.
이 씨가 제기하는 또 하나의 의혹은 “당초 헬리콥터 자격증을 소지했던 두 기장의 헬리콥터 운항 시간을 비행시간으로 인정해 무자격 상태에서 비행기 부기장으로 탑승케 하는 불법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사람이 비행기 운항을 하기 위해서는 항공종사자 자격증명 교부대장 한정사항 란에 비행기 사업용 조종사 기록이 추가기재돼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재되어 있지 않다”며 절차상의 의혹도 제기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한항공 측은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만을 갖춘 상태에서 비행기 운항을 맡긴 적이 결코 없다. 이들은 적법한 교육과 절차를 거쳐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발급받은 이후에 부기장으로 탑승했다”고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기자는 대한항공 측에 C 씨와 K 씨의 과거 운항 기록을 볼 수 있는지를 문의했으나 “워낙 과거의 일이어서 기록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는 답변만 한 채 기록을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측의 첨예한 입장 대립이 계속되고 있어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그런데 K 씨의 법정 증언 진술 과정에서 석연찮은 점이 한 가지 또 발견된다. 그는 “증인은 주로 헬리콥터만 비행하여 비행시간이 부족한데 어떻게 사업용 조종사 자격을 땄는가”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당시 사업용 조종사 자격은 헬리콥터든 비행기든 구분 없이 조종 시간이 몇 시간 이상 되면 전혀 차별 없이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건교부에서 주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변호인이 “건교부에서는 헬리콥터를 탄 사람에게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는데, 건교부의 주장이 잘못된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자 “건교부는 잘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헬리콥터와 비행기 조종사 자격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으며 헬리콥터 조종사에게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준 적이 없다는 건교부 측의 주장과 현직 조종사의 진술이 상반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대한항공 측은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이 씨에 대해 “기장 승진에서 연거푸 탈락하자 스스로 사표를 던진 자질미달자의 ‘해코지’에 불과하며, 회사에 앙심을 품고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회사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있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일요신문>은 당시 법정 다툼 과정에서 이 씨 측에 의해 제출된 전직 대한항공 조종사 5명의 참고인 진술서를 확보했다. 그들은 모두 대한항공에서만 10~20년 경력의 베테랑 조종사들이었다.
여기에는 ‘대한항공은 최소 1500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이 있어야 비행기 조종이 가능한데도 200~300시간에 불과한 시간미달자를 보충교육 없이 사용했고, 항공기관사들에게 기장을 시키는 등 법적 무자격자들을 고용해 사용해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한항공 측은 이에 대해서도 “그들 역시 자질미달로 모두 낙오된 사람들이며, 다 허위진술”이라고 일축했다.
대한항공 전직 조종사 출신들이 제기하는 무자격 조종사 고용 의혹은 대한항공 측이 조목조목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몸담고 있는 현직 기장과 회사의 입장이 엇갈리는 등 일부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 있고 또 회사의 입장이 바뀌고 있다. 이 씨를 비롯한 전직 기장들의 문제 제기가 회사 측의 설명대로 단순히 인사 불이익에 따른 해코지 차원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이르지만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