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뭐 하는 거지? 이러고도 살아야 하나? 결국 이렇게까지 오고 말았어. 그렇지만 카드빚만 해결되면 난 다시 올바르게 살아갈 거야. 난 유괴범이 아니야.’
그는 모든 걸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과거가 떠올랐다. 여덟 살 때 엄마가 죽었다. 지방의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양말을 팔던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로 재혼했다.
그래도 혼자 열심히 공부하면서 살았다. 지금의 아내와는 대학 시절 교회에서 만났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망설였다. 셋방 한 칸 얻을 능력이 안 됐다. 아내가 결혼을 하자고 우겼다. 아내의 결혼반지를 살 돈이 없었다. 아내는 그 돈까지 몰래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결혼 4일째부터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눈만 뜨면 돈 걱정을 하고 카드회사의 독촉을 피하는 게 부부의 일과였다. 이제는 원금보다 이자가 훨씬 많은 상태였다. 처가에 보증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결혼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
아내가 참다 참다 신경질을 부렸다.
“미안해. 어떻게든 해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어제는 결혼 한 달째였다. 카드회사 직원은 아내마저 닦달했다. 그는 마침내 사람들이 파충류같이 싫어하는 유괴범이 됐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납치한 꼬마아이들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운전석 옆 박스 안에 넣어두었던 분장도구들을 꺼냈다. 노란 가발이 달린 고깔모자를 쓰고 딸기코를 달았다. 준비해온 풍선을 불어서 부풀렸다.
“자, 일어나세요. 김연지, 황수민!”
그가 꼬마들을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분장한 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피에로 아저씨다. 이거 가져.”
그는 꼬마들에게 반짝이는 풍선을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들이 눈을 끔뻑끔뻑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달래도 아직 밤이면 엄마가 그리운 일곱 살짜리 아기들이었다.
“아저씨가 정말 미안해. 아침에 날이 밝으면 데려다 줄게.”
그는 아이들을 어르면서 폐가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 가고 싶어. 데려다 줘.”
수민이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울먹였다.
“이제부터 재미있는 쇼를 시작하겠습니다. 잘 보세요.”
그가 노란 가발을 쓴 채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아이들 앞에서 물구나무를 섰다.
“하나도 재미없어.”
연지가 칭얼거렸다.
“그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는 다시 딸기코를 손으로 잡고 삑삑 소리를 냈다. 그걸 보고 수민이가 소리쳤다.
“아저씨 순 바보야. 그걸 누가 모르냐? 순 엉터리야.”
어느새 그의 이마에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생각을 해보니 아침부터 긴장한 채 한 끼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아저씨, 내일 아침 학교는 어떻게 가?”
연지가 갑자기 물었다.
“걱정 마. 아저씨가 선생님한테 잘 말해줄게.”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아이들의 눈에 잠이 고물고물 왔다. 그는 아이들을 예전에 쓰던 낡은 침대 위에 옮겨다 눕히고 이불장 속에 남아 있던 낡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가족들이 쓰던 도구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 부모에게 협박전화를 해야 했다. 그는 운천읍으로 나와 공중전화에서 연지엄마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나서야 받았다.
“여보세요?”
연지엄마 목소리 같았다.
“아이들은 괜찮아요. 납치된 줄도 몰라요.”
그가 전화를 끊고 다른 공중전화로 옮겼다.
“죄송해요. 아이들은 잘 있어요. 내가 안전하면 아이들도 걱정 없을 겁니다.”
그가 다시 공중전화박스를 옮겨 연락했다. 이번에는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지 아버지 같았다.
“당신 지금 도대체 무슨 짓 하는 거요? 장난하나?”
분노한 음성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게 뭐요?”
남자의 목소리가 한풀 낮아지면서 물었다.
“아침에 은행 문이 열리면 헌 지폐로 3000만 원 준비하세요.”
“애들은 잘 자고 있죠?”
남자가 물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길가 슈퍼에서 김밥과 우유를 사가지고 다시 폐가로 향했다.
어느새 날이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의 휴대폰이 ‘부우’ 하고 진동을 했다. 아내였다.
“너 지금 어디 있어?”
아내의 화난 목소리였다. 친구같이 연애해서 반말 투였다.
“의정부 시내 게임방에서 기계 고쳐주고 있어.”
그가 둘러댔다.
“너 솔직히 말해. 지금 바람피우고 있지?”
아내가 다그쳤다.
“당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마음 단단히 먹고 잘 들어.”
“뭔데?”
아내가 기가 꺾이면서 놀라는 어조였다.
“어디서 전화가 와서 ‘오양욱이를 아느냐’고 물으면 절대로 모른다고 그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오양욱이를 전혀 모르는 인간이었다고 생각하고 혼자 살아.”
그가 말했다. 가슴에서 슬픔이 검은 비가 되어 내렸다.
“왜? 무슨 일인데?”
아내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를 달래면서 물었다.
“당신 이제부터 나를 잊어버려. 그리고 내 가족에게도 아무것도 알리지 말고, 앞으로는 나를 절대 찾지 마. 그거 지키면 말해 줄게.”
“약속할게.”
아내가 말했다.
“내가 죄를 졌어. 아이들을 유괴했단 말야.”
“그럼 애들은?”
아내의 목소리에 공포가 서렸다.
“괜찮아.”
“여보, 절대 애들을 다치게 하면 안돼.”
아내가 뭔가 느꼈는지 소리쳤다.
파란 새벽 여명이 폐가 방 창호지 문에 비치기 시작했다. 서울에 가서 돈을 받아오려면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여둬야 할 것 같았다.
“연지하고 수민이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그는 침대 위에서 곤하게 자는 아이들을 깨웠다.
“아저씨 나 졸린데 나중에 먹으면 안돼?”
연지가 눈을 부비면서 물었다. 수민이도 잠이 덜 깼다. 그는 심한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망설였다. 서울에 가서 부모들에게 돈을 받으려면 아이들을 처리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가 흔들리고 있었다. 도저히 죽일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꽁꽁 묶고 밖에서 문을 걸어 둘 수도 없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공포에 떨 걸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아이들과 정이 든 것 같았다.
“그러면 아저씨가 12시까지 돌아올 테니까 어디 가지 않고 여기 있을 수 있어? 옆에 있는 김밥하고 우유 먹고 말이야.”
그가 연지와 수민이에게 물었다. 연지엄마가 바로 돈을 주면 그 시간까지는 갔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밖에만 나가지 않아주면 될 것 같았다.
“응, 약속할게.”
아이들이 대답했다.
그는 잠시 후 의정부 법원 앞 공중전화에서 연지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비됐어요?”
“예.”
“그럼 지금 당장 서울역으로 나와요. 노란색 면티에 검정색 스커트 그리고 검정색 구두를 신고 지하철 10번 출구 앞으로 나오세요.”
그는 지하철로 서울역으로 갔다. 기운이 없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는 식당으로 들어가 김치찌개를 시켜 먹었다. 기운을 차려야 했다. 밥을 먹으면서 아무래도 두고 온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누군가 돌봐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사촌동생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사촌동생은 폐가가 된 고향집을 알고 있었다.
“나야. 처 이모부 애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너무 때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이들을 숨겨주려고 우리 옛날 집에 데리고 갔어. 지금 아이들만 거기 있는데 네가 가서 좀 살펴줄래? 내가 엄마아빠하고 같이 간다고 그래줘.”
그가 적당히 둘러댔다.
“아이고 형, 그렇지 않아도 그 애들 때문에 난리가 났어.”
사촌동생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때 송수화기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오양욱 씨죠?”
그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시죠?”
그가 물었다.
“경찰입니다.”
강력반 형사들은 이미 동생의 집에까지 잠복하고 있었다. 잠에서 깬 연지와 수민이가 그 집 앞을 지나가던 마을 할머니에게 발견된 것이다. 아이들은 그 할머니 집에 가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폐가가 양욱의 고향집인 걸 안 경찰은 오양욱의 아내나 친척 주변에 이미 잠복해 있는 상황이었다.
형사과 사무실은 취재경쟁을 하는 기자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연지엄마가 퉁퉁 부은 얼굴로 울면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수갑을 찬 채 형사 책상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텔레비전 시사프로그램의 흉악한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강력반에서 그를 긴급체포한 보고서가 증거로 제출되기도 했다. 진술조서에서는 아이들의 부모가 그를 강력히 처벌해 줄 걸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대충 그가 얘기한 사건의 전말이었다. 사회분위기나 여론은 유괴범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도 베풀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든 그를 구해내고 싶었다. 꼬마들의 부모를 설득하고 그를 붙잡은 형사의 도움을 청해 그를 살려내고 싶었다. 나는 먼저 유괴됐던 연지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보험회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