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경성 모습을 재현한 KBS 드라마 <서울 1945> 합천 세트장 전경을 그래픽처리 한 것. | ||
혹시 궁금하다면 한번 ‘타임머신’을 타고 70여년 전의 한반도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웬만한 사건에는 이미 내성을 지닌 현대인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들이 과연 그 시절에도 벌어졌을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전봉관 교수가 최근 쓴 책 <경성기담>(살림출판사)을 살펴보면 아마도 의문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인문학이나 사학에서 전혀 다루지 않은 근대조선(일제강점기)의 사회 이면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는 언급됐으나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기이한 사건들이 재조명돼 있는 것. 이 가운데 당대에 장안에 화제가 됐던 사건 몇 건을 요약, 발췌했다.
1933년 5월 ‘머리 토막’
지난 2004년 연쇄 살인범 유영철에게 토막살해를 당한 여성들의 시신이 발굴돼 세상을 경악케 했던 것처럼 1933년 5월 16일 경성(서울) 죽첨정(서대문구 충정로)에서도 엽기적인 토막 사체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몸통이 잘려나간 채 머리만 남아 있는 어린 아이의 시신이 쓰레기 매립지에서 발견됐던 것.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아이의 잘린 머리와 아이를 살해한 범인이 칼로 뇌수를 파낸 흔적, 그리고 아이 머리를 싸고 있던 낡은 종이봉투, 치마폭, 수건 등을 찾아냈다. 이 소식이 경성 전역에 알려지면서 “거지가 아이를 유괴해 난치병 환자에게 팔았다”는 등 갖가지 괴담이 난무했다.
경찰은 하루 만에 ‘성별 남아. 연령 1세 내외. 살아 있는 아이의 목을 벤 것. 범행 시간은 발견 시간부터 10시간 이내’라는 부검 결과를 얻었고, 아기의 머리를 싸고 있던 종이봉투가 ‘○○○쌀집’에서 쓰는 쌀봉투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러나 수사 진척은 ‘거기까지’였다. 결국 서대문경찰서는 사체 발견지를 중심으로 죽첨정, 중림동, 합동 일대에 흩어져 거의 모든 가정을 호구조사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가차 없이 유치장에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집중적인 호구 조사에서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결국 경찰은 사건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에 경성에서 사망한 아이들을 매장한 공동묘지까지 파헤치는 기상천외한 수사 기법을 동원했다.
실제 1933년 5월 18일 경성 시내에서는 경찰들이 어린 아이들의 무덤을 파헤치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경찰서 직원 전부가 거지 복장을 하고 모르핀 중독자처럼 위장한 뒤 막벌이꾼 소굴로 잠입해 탐문 수사까지 벌였다. 급기야 관내 걸인 39명과 나병 환자 4명 등 50여 명을 경찰서로 잡아들여 경찰서 안이 악취로 진동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은 발생 21일째. 뇌막염으로 숨진 한 아무개 씨의 둘째딸 시신을 경찰 측이 ‘발굴 수사’ 끝에 파냈는데 이 시신에 머리가 없었던 것.
이틀 후 실시된 사체 부검에서 먼저 발견한 어린 아이의 머리와 한 씨 둘째딸의 몸통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범인을 검거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와 같았다. ‘용의주도한’ 경찰은 이미 용의선상에 오를 만한 인물 전원을 체포해 유치장에 가둬놨기 때문이었다.
범인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드러났다. 한 씨와 같은 집에 사는 배 아무개 씨가 부검이 끝난 지 1시간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간질병을 앓고 있는 자식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에게 한 씨 딸의 무덤을 파헤쳐 뇌수를 꺼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즉시 배 씨와 그의 친구, 친구의 부인 그리고 배 씨의 장남이 경찰에 체포됐고 이로써 20여 일간의 대소동은 막을 내렸다.
이 단두(斷頭) 유아 사건은 1933년 당시 조선의 치부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경성은 총독부가 자랑한 것처럼 ‘안전한 도시’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아이의 몸통을 찾는 과정에서 경성의 후미진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체가 암매장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하층민이 사회의 그늘에서 웅크리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범인 배 아무개 씨와 그 친구는 분묘 발굴 및 사체 훼손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각각 징역 4년과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사람들도 길어야 3년 형을 선고받던 시기. 일본이 분묘 발굴과 사체 훼손을 얼마나 사악한 범죄로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판결이었다.
▲ SBS 드라마 <야인시대> 속 일제강점기 경성 거리 모습과 경찰들(위), KBS 드라마 <서울 1945>의 한 장면. | ||
갓 스물을 넘긴 조선인 하녀 변흥례 씨 살해 사건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철도국 운수사무소 소장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변 씨가 1931년 8월 말 소장의 관사에서 목이 졸리고 음부에 자상을 입은 변사체로 발견됐던 것.
철도국 소장은 사건이 있기 사흘 전 출장을 떠나 당시 변 씨와 함께 집에 있었던 사람은 소장의 부인뿐. 변 씨의 목에 걸려 있던 비단 끈도 소장 부인의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부인이 범인이라면 과연 자신의 물건을 남겨둔 채 경찰에 신고를 했을까. 변 씨에게 자상을 입힌 칼이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범인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 와중에 경찰서 서장 앞으로 기괴한 투서 한 통이 날아든다. ‘범인은 집안사람입니다. 31일 밤 새벽 3시경 철도국 관사 부근을 방황하던 중 돌연히 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 그곳에 가서 유리문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전깃불 밑에 30세가량 돼 보이는 여자가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 곁에는 20세 되는 여자가 발가벗고 누워 있었습니다. 중년 여자는 정액을 그릇에 받아 두고 한참 생각하다가 벽장을 열고 칼을 꺼내 누워 있는 여자의 음부를 찔렀습니다. …입을 물어뜯고 젖통을 물어뜯은 이후 발로 죽은 여자의 머리를 두 번 차고 배를 밟았습니다. 그리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투서였지만 입술과 가슴을 물어뜯었다는 투서의 내용과 부검 결과는 정확히 일치했다. 더욱이 투서가 날아든 날까지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변 씨 살해과정을 직접 목격했거나 혹은 자신이 살해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투서였다.
그로부터 열흘 뒤 ‘살해 사건의 범인은 나다’라고 쓴 두 번째 투서가 날아들었다. 첫 번째 투서와 필적이 동일했다. 투서자는 무슨 까닭에 소장의 부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가 자신이 살해했다고 입장을 번복한 것일까.
한 달여의 수사 끝에 검사는 소장 부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한 부인의 진술은 사실과 달랐고 이후 행동도 의심스러웠다. 검사는 부인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확신했다.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일개 하녀를 안주인이 그처럼 참혹하게 살해할 리 없었다. 일 잘하고 싹싹한 스무 살짜리 하녀가 안주인의 원한을 살 일이야 뻔한 것이었다.
‘소장이 하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오다가 그만 부인에게 들킨 게 아닐까.’ 검사는 소장 부부를 문초했지만 부부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검사는 부인을 기소했지만 이례적으로 법원에서 3개월 만에 항소심까지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물적 증거나 증인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영구 미제가 되는 듯했던 변 씨 사건은 1년 6개월 만에 또 다른 용의자가 검거되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소장 부인의 정부(情夫)였던 철도국 배급소 직원. 필적 감정 결과 괴문서의 필적은 용의자의 필적과 정확히 일치했고 사건을 전후한 그의 행적 또한 수상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범행을 강하게 부인하던 배급소 직원은 여덟 번째 경찰 조사에서 결국 살인을 자백했다. 사건 당일 변 씨를 강간할 목적으로 부인 집에 잠입했다가 변 씨에게 발각되었고,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백에도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살해 당시 큰 소란이 있었는데 옆방에서 자던 부인이 깨지 않았다는 점이 석연치 않았다. 또 우발적인 살인이었는데 수법이 그처럼 잔인했던 것은 무슨 이유인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열한 번째 경찰 조사에서 이뤄진 배급소 직원의 또 다른 고백은 주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소장 부인과 주위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겨온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남녀는 부인의 침실에서 즐기다가 변 씨에게 발각되었다. 크게 낭패한 부인은 이 사실이 알려져 자신이 파멸할까 우려했다. 변 씨를 해고하자니 해고할 구실도 없었다. 결국 부인은 영원한 함구책으로 변 씨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정부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범행은 소장 부인의 치밀한 계획 아래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예심 결과 드러난 변 씨 참살 사건의 주범은 소장 부인, 종범은 정부였던 배급소 직원이었다. 그러나 정작 공판에 회부된 것은 직원뿐이었다. 검사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들어 부인의 기소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범인 부인이 빠진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됐고 종범인 배급소 직원마저 2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말았다. 검사와 재판장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와 피고가 모두 일본인이던 재판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변 씨 사건은 미제 사건 아닌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 일제강점기의 재판 모습. 연합뉴스 | ||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중앙보육학교 박 아무개 교장은 1934년 3월 전대미문의 성추행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는 3월 17일 <조선중앙일보>의 단독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민족 지도자의 뜻밖의 ‘행각’이 공개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
사건은 한 부부의 ‘진실 게임’에서 비롯됐다. 사업 실패 후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주를 하며 이를 계기로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출발을 하기로 한 남편 노 아무개 씨와 아내 윤 아무개 씨.
남편 노 씨가 먼저 자신의 과오를 털어놓고 아내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아내는 무슨 큰 비밀이 있는지 머뭇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 윤 씨는 도저히 말로는 고백하지 못하겠으니 자신의 과거를 글로 적어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때 윤 씨가 보여준 글이 바로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조 유린 고발서’였다.
이 고발서에서 윤 씨는 학교장 박 씨에게 정조를 유린당했다고 주장했고 분노한 남편 노 씨가 이 고발서를 언론에 폭로하면서 논란은 시작됐다.
수기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특히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박 씨가 여학생들과 자신의 집에서 ‘키스 내기 화투’를 하고, 정조를 빼앗았다는 주장이었다. 이 수기 내용이 알려진 후 학부형들은 격노했고 학무 당국은 사건 진상에 착수했다.
공교로운 점은 남편 노 씨와 아내의 정조를 유린했다는 학교장 박 씨는 일찍이 결의형제까지 맺었던 사이라는 사실. 가슴에 흉기를 품고 박 씨를 찾아다닐 만큼 노 씨의 분노는 컸다. 그러나 박 씨는 정조를 유린하지 않았다며 공개적으로 부인했고 두 사람은 서로 ‘(사실이 아니면) 가슴을 칼로 긋겠다’며 생명까지 걸고 공방을 벌였다.
이 와중에 당사자인 윤 씨가 썼다는 ‘고백서’가 중앙보육학교 측에 의해 각 언론에 공개되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박 씨의 대한 근거 없는 사실이 보도된 것을 이제 무엇이라 사과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맹수와 같은 남편 손에 잡혀 어쩔 수 없이 양심에 없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호소할 기회가 없던 중 남편이 집을 떠난 것을 기회로 지금까지 제 주장이 거짓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예기치 못한 또 한 번의 반전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윤 씨는 처음부터 남편의 강요로 거짓 주장을 펼쳤던 걸까, 아니면 박 씨 측의 집요한 회유에 넘어갔던 것일까.
그 뒤로 이들 세 사람과 진상을 밝히려는 학무 당국, 언론 간의 진실 게임이 계속됐다. 결국 박 씨는 ‘키스내기 화투’를 처음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여운형 사장과 노 씨 등 6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노 씨도 박 씨와 윤 씨를 간통죄로 고소하게 된다. 이후 이 사건은 신문 지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사건의 여파로 인해 박 씨는 결국 교장 직에서 물러났으며, 노 씨와 윤 씨는 그 후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박 씨 사건은 <키스내기 화투>라는 유모어소설로 풍자될 정도로 세간에 화제가 됐다. 어찌 됐든 교육자가 성추행 논란 때문에 자리 보존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단 최근의 일만 아니었던 것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