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토킹이 점점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법적인 처벌장치가 미비해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다. 사진은 영화 <스토커> 포스터. | ||
스토킹 피해자들의 적나라한 고백을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짚어보고 스토킹에 대처하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인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봤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지난 6일 자신이 10여 년간 스토킹을 당해왔다는 한 여성 피해자를 만날 수 있었다. 모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기자가 올린 ‘스토킹 피해자를 찾는다’는 글을 보고 연락해온 이 피해자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꼭대기로 피가 몰리는 것 같다”며 스토킹의 악몽에 치를 떨었다.
자신을 박 아무개(33)라고 밝힌 이 피해자는 현재 미혼이며 부모 등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상태. 박 씨는 대학교 재학시절 알게 된 한 남성으로부터 무려 11년여간 스토킹을 당해왔다고 털어놓았다.
박 씨는 지방 소재의 ○○대학교에 다니던 중 같은 학과 후배로부터 한 남성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만남 초기에 이 남성은 인상도 좋은 데다 성실한 모습으로 박씨에게 다가왔다는 것. 하지만 만난 지 두 달이 지날 무렵부터 생각지도 못할 악몽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사소한 일로 몇 번 다투곤 했는데 이 남성이 어느 순간부터 손찌검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 남성의 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횟수가 늘어났고 나중에는 ‘의처증’ 비슷한 증세마저 보였다고 박 씨는 전했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박 씨가 이별을 요구했고 이때부터 이 남성의 집요한 스토킹이 시작됐다. 당시 박 씨는 대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이 남성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무작정 박 씨의 집으로 들이닥치는가 하면 박 씨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나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다가 박 씨가 나오면 붙잡아 폭행하는 일이 반복됐다는 것.
박 씨는 그를 피해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겼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이 남성이 학내에 박 씨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었다는 등의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다녀 학교생활도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 남성의 이 같은 집요한 스토킹 때문에 박 씨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귈 때마다 헤어짐을 반복해야 했다고 한다. 이 남성이 박 씨 집으로 전화를 걸어 가족들에게까지 폭언을 퍼부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경찰에 신고도 해보았지만 진단서같이 피해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물증이 없으면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어야 했다.
박 씨는 “최근에서야 통화내용과 내역을 확보하고 정신과 치료 등의 자료를 수사기관에 제출하면 처벌이 가능해진 것으로 안다”면서 “그런데 이런 것들이 갖추어져도 여간해서는 엄벌하기 힘들다고 한다. 괜히 경찰에 신고했다가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나와서 더 심하게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 씨는 이어 “정말 어떤 때는 그 남자를 죽일까 하는 무서운 생각도 했다. 사람이 사람을 왜 죽이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나는 그 인간 때문에 너무 힘든데 주위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고 덧붙였다. 박 씨는 자신을 괴롭히던 그 남자가 요즘 잠잠해졌는데 얼마 전부터 다른 여성을 스토킹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스토킹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박 씨의 경우처럼 과거 사귀던 애인이나 헤어진 배우자 또는 주변의 아는 사람이 스토커로 변한 경우. 그러나 최근에는 전혀 모르는 제3자로부터 스토킹을 당하는 사례도 점차 늘고 있다.
서울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요즘에는 인터넷이 발달해 스토커들이 인터넷으로 스토킹 상대를 고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비근한 예로 싸이월드 등과 같은 사이트에서 사진을 보거나 프로필을 확인한 후 집요하게 스토킹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기자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해 스토킹을 당했다는 피해자 유 아무개 씨(여·27)를 만날 수 있었다. 유 씨는 항상 또 다시 스토킹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며 입을 열었다.
“싸이월드가 생기면서부터 미니홈피(홈페이지)를 운영해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성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2004년 초부터 누군가 내 홈피에 글을 남기기 시작하더니 몇 달 뒤에는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직접 전화를 걸어와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일들을 겪었다.”
유 씨에 따르면 ‘K’라고 알려진 이 스토커는 매일 유 씨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알고 있었으며 유 씨가 다른 남자를 사귀면 유 씨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는 것.
유 씨는 “이렇게 당하는 사람이 나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나중에 알고보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홈피를 보고 스토커가 붙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전했다. 스토커들이 각 사이트의 개인 홈피들을 훑어보고 주변에 친구가 많은 사람, 외모가 뛰어난 사람,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 등을 주로 스토킹한다는 것.
유 씨는 “스토커 때문에 여기저기 퇴치 방법을 문의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처럼 홈피를 통해 스토커가 접근했다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서 “그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유 씨는 휴대전화와 홈페이지를 폐쇄하고 가족이 모두 한국을 한동안 떠나 지낸 뒤에야 소름 끼치는 K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후문. 또 다른 한 피해자는 “행여 스토커의 추적이 다시 시작될까 싶어 휴대전화도 제3자 명의로 개설해서 쓰고, 인터넷 사이트 회원 가입도 삼간다”면서 “공포영화는 절대로 보지 않는 내 심정을 알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스토킹 피해 사례 가운데는 엽기적이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경우도 있다.
자신을 올해 31세의 남성이라고 밝힌 한 피해자는 2년 동안 사귀던 애인과 헤어졌는데 이 애인이 계속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가 전하는 내용을 듣다보면 어느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 남성은 문제의 애인과 사귈 당시 애완견 한 마리를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남성이 이별을 통보한 지 두 달가량 지났을 무렵인 지난 4월 그녀로부터 택배가 배달돼 왔다. 무심코 상자를 열었던 남성은 기겁하며 상자를 내팽개쳤다고 한다. 상자 안에는 지난날 그가 애인에게 선물로 사줬던 애완견이 처참한 시체가 되어 들어 있었던 것. 그리고 곧이어 그녀로부터 ‘그 애견처럼 만들어 버리겠다’는 문자가 날아왔다고 한다.
이 남성은 인터넷에 남긴 글에서 “주변사람들에게 그 여자로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면 그러기에 왜 그런 여자와 사귀었냐는 질책만 들을 뿐”이라며 “그 여자로부터 벗어나려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언제 어디서 그 여자로부터 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노이로제증상까지 보일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이성에게 자신을 만나 줄 것을 강요하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상대에게 분풀이를 하는 사건은 이제 뉴스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흔해졌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 중에는 얼굴에 염산을 뿌리거나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지는 강력사건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 사전에 스토커들을 법으로 제재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러나 아직 스토킹에 대해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장치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스토킹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마련되긴 했으나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은 스토킹 피해자가 피해 신고와 동시에 법적 보호 및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스토킹 피해센터를 만드는 내용의 ‘지속적 괴롭힘 행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안’(스토킹범죄처벌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 법사위에 아직도 계류돼 있다. 한 스토킹 피해자는 “국회의원들을 스토킹해서라도 법이 통과되도록 했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밝혔다.
윤지환 프리랜서tnago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