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을 함께 구상한 인물이 더 있습니까?”
“저 혼자 큰 괴물을 마비시키는 것이 저의 구상이었습니다.”
괴물이란 박정희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후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도지사급 이상 각부 장관들로 하여금 혁명의회를 만들고, 군단장급 이상 지휘관으로 혁명위원회를 만들며, 헌법기초위원회를 두어 헌법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또 혁명위원회는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을 운영하여 누적되어온 여러 가지 부패를 설거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일들을 주도하려던 주체는 누구였죠?”
“바로 저입니다. 제 자신이 핵이 되어 혁명을 수행하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10·26민주혁명을 했기 때문에 저 아닌 다른 사람은 호소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과업을 제가 직접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에 출마할 예정이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군인이고 오늘 현재는 혁명가입니다.”
김재규는 사건의 동기에 해당하는 중요한 부분들을 말하고 있었다. 그때 군판사 황 대령이 나섰다.
“이봐요, 피고인. 사건과 관계없는 불필요한 사항은 제한하겠습니다. 이건 정치재판이 아닙니다.”
군판사는 김재규의 동기진술을 제지한 것이다. 변호인단 속에서 김정두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 항의했다.
“지금 김재규 피고인이 진술한 것은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 그걸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변호사 중에는 군판사의 진술제한에 대해 지금까지도 의혹들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재판이 조종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열흘 후 검찰관의 논고가 있었다. 검찰관 전창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논고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피고인 김재규가 국가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현재 국가가 처한 국내외의 어려운 문제들을 도외시하고 국가원수를 시해한 것은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반국가적 대역행위입니다. 김재규 피고인은 자신의 범행동기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고 민주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있으나 법정에서 이것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혁명을 한다는 사람이 개인적인 감정과 정권욕으로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천박한 야욕을 가지고 박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태도를 하루아침에 돌변, 시해한 것은 대역죄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동기가 설혹 순수했다 하더라도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우리 사회에 폭력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전창열 검찰관은 상기된 표정으로 12분간에 걸친 논고를 마치고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피고인 김재규에 대한 공소사실은 그 유죄의 증명이 충분하므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 미수로 사형에 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재규는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정면을 응시했다.
“피고인 김재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재판장이 최후진술을 명령했다. 김재규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방청석은 썰렁하게 텅 비어 있었다. 관계기관 요원과 김재규의 가족 4명뿐이었다. 재판부 5명, 검찰관 3명, 그리고 변호인 8명만이 이 역사적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재규는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금번 10·26혁명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혁명이 도대체 어떻게 내란죄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10·26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집권욕이나 사리사욕에 있는 게 아닙니다. 10·26혁명은 5·16혁명이나 10월유신에 비해 정정당당한 것입니다.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도전하여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10·26혁명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정정당당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혈혁명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무혈로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는 최소한의 희생은 부득이한 것입니다. 이번 혁명에서 최소한의 희생은 불가피했습니다.
저의 10·26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입니다. 둘째, 국민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셋째, 궁극적으로 적화 방지에 있습니다. 넷째는 혈맹이요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국제적으로 독재국가라는 나쁜 이미지를 씻고 국제사회에 이바지하여 이 나라 국민과 국가의 국제사회에서의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10·26혁명의 결행으로 해결이 보장됐습니다. 여기서 내가 한마디 해둘 것은 저는 결코 대통령이 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나는 군인이요 혁명가입니다.”
법정에 있던 한 변호사에 의해 26년 만에 김재규의 최후진술 부분이 세상에 드러났다. 김재규에 대한 명예회복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군사법정에서 김재규를 지켜봤던 그 변호사는 10·26사건의 진실을 밝혀 제대로 규명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는 우발범이라기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하기 위한 확신범 내지 양심범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변호사는 도청장치가 설치된 법정을 고발했다. 재판관석 뒤쪽 옆문으로 누군가가 슬그머니 들어와 군판사에게 쪽지를 전하고 나가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재판부와 변호인의 의견충돌이 잦아질수록 쪽지 전달의 횟수가 많아졌다고 했다. 법정녹음은 스피커를 통해 대법정 재판부 출입문의 바로 앞방에 위치한 당시 법무감 집무실로 중계되고 있었다고 고발했다. 그 방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이 모여 모든 재판 진행과정을 청취하고 있었고, 문제점이 드러날 때마다 대책을 만들어 그때그때 쪽지에 적어 재판부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사법권의 침해라는 것이다.
26년의 세월은 그를 이제 육십대 중반의 노인으로 변화시켰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김재규를 조사할 당시 받았던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렇게 샤프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었죠. 굉장히 호의적인 얼굴로 우리 수사에 협조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게 사실이니까 별로 다툴 쟁점도 없었죠. 좀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김재규가 민심의 향배에 대해서는 꽤 민감한 편이었다고 할까요?”
그는 순간 기억의 창고 문을 여는 표정이었다.
“김재규가 조사를 받을 때 상당히 참모총장을 의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죠. 총장의 의중이나 사회인식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 했어요. 뭔가 기대감이 상당히 있는 것 같았어요. 김재규는 당시 조사를 하는 검찰관에게 잘 보이려고 했어요. 검찰관의 태도가 지휘부인 참모총장하고 일치하는 걸로 여기고 잘 하려는 거 같았죠.”
당시 권력의 핵심이 된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의 태도에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참모총장은 김재규가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그걸 감경할 수 있는 군사법원법상의 관할관 확인권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참모총장은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옆에 있었다.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사람들은 모두 몸을 낮추고 흐름을 살피고 있었다. 변호인들은 법정에서 김재규를 피고인이 아닌 장군으로 호칭했다. 검찰관이던 전창열 중령이 “김재규를 장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범행을 미화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음모입니다”라고 공박한 기록이 있었다.
“그때 법정에서 음모론을 거론하셨다가 변호사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는 바람에 사과를 하신 적이 있죠?”
내가 말했다.
“그랬었죠. 내가 ‘실패한 혁명을 법정에서 하려는 음모냐’고 하니까 변호사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죠. 음모가 있지 않느냐는 말을 가지고 변호사들은 ‘취소하라’고 하고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라고 하면서 밀고 당겼죠. 당시 안동일 변호사와 황인철 변호사가 찾아와서 변호인단의 명예를 생각해 달라고 해서 해명성 사과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인기 없는 사건인데도 이병용 변호사와 김수룡 변호사는 꽤 열심히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 변호사의 표정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김재규는 도중에 사건 변호인들의 변호를 거부했던데 왜 그랬다고 생각합니까?”
김재규는 사건 도중 갑자기 일체의 사선변호를 거부했다.
“당시 군 검찰이 강경하게 나가는데도 김재규가 변호인단을 보이콧했어요. 그게 저도 이상해요. 당시 인권변호사들의 분위기는 법정에서도 강경하게 데모하는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거든요. 저는 김재규가 군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러나 보다 생각을 했었죠.”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을 의식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미국에 대해서는 어땠을까.
“법정에서 미국정부와의 관계가 드러났습니까?”
내가 물었다.
“미국정부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는데도 밝혀지지 않았어요.”
“김재규 사건에서 법률적으로 고심을 했던 부분은 뭐였죠?”
“비서실장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공모를 했느냐였어요. 합수부 측은 김계원을 공모로 엮자고 하고 우리 군법무관들은 공모로 보기에는 약하다고 보고 의견충돌이 있었죠. 그런데 나중에 항소심에서 합수부 쪽의 이학봉 씨가 공소장 변경을 허락하더라고요. 그래서 김계원이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감경되고 살아나는 계기가 됐죠.”
“당시 군사법정 뒤에서 어떤 대책반이 있어 모니터링을 하면서 쪽지로 지시를 하고 그랬나요?”
내가 물었다. 내 자신이 직접 쪽지전달을 목격했었다.
“그랬죠. 법무감실에서 모니터를 설치해 놓고 법정 상황을 지켜봤어요. 특별한 도청이나 다른 저의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군 검찰은 사실상 인원도 부족하고 그 큰 사건을 감당하기가 힘든 조직이었어요. 그래서 계엄사령관이 검찰과 법원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차출해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죠. 그 파견 나온 분들이 법률적인 검토를 하고 합수부 측인 우리에게 의견을 제시했죠. 그 사람들이 모니터로 보고 법적인 미비점이나 재판절차상의 문제들을 뒤에서 조언했어요. 그 자리에 합수부 관계자가 참석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게 뭐 구태여 감추거나 속일 일이 아니죠.”
전창열 변호사는 당당하게 말했다. 김재규는 검거된 후 20일을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 지하에 있었다. 당시 이학봉 보안사 수사국장은 김재규와 마지막으로 은밀한 대화를 한 장본인이었다. 김재규와 이학봉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거기에 숨은 진실이 있을 것 같았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