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9일 대한제국 황족회가 의친왕의 2녀 해원 옹주를 제30대 황위 계승자로 추대하고 ‘대관식’을 가졌다. 연합뉴스 | ||
그 신호탄이 된 것은 지난 9월 29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거행된 대한제국 황위 승계식.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의친왕의 2녀 이해원 여사(88)였다. ‘대한제국 황족회’는 “해원 옹주께서 대한제국 황실의 법통을 잇는 30대 ‘황제’가 되셨다”고 밝혔다.
그러자 옛 황실 일부 관계자들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황실복원에 관심이 많은 단체 등은 “인정할 수 없다”며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각각 다른 황손을 황위 계승자로 내세우고 있어 옛 황실 가족들끼리의 볼썽사나운 권력다툼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소위 ‘황권 주자’들이 여기저기서 난립하고 있는 형국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이미 조선왕조는 폐절됐지만 최근 옛 황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같은 ‘해프닝’이 연출되고 있는 것.
지난해 7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가 후사도 없이 갑자기 타계하면서 이와 같은 황위 계승 논란은 예고된 셈이었다. 이구 씨의 사망 이후 최근의 이해원 씨 ‘여황 대관식’ 발표까지 14개월여에 이르는 ‘그들만의 황권 다툼’ 내막을 살피면 마치 옛 조선왕조의 궁궐과 오늘날 여의도 정치판을 함께 압축시킨 복사판을 보는 듯하다.
지난해 7월 22일 영친왕의 아들 이구 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상임이사회에서 이원 씨(45)를 이구 씨의 양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하자 의친왕의 10남인 이석 씨(67) 등 일부 옛 황족 관계자들이 “종약원이 무슨 권리로 양자를 마음대로 결정하느냐”며 크게 반발했다. 이원 씨는 의친왕의 9남 이충길 씨(69)의 장남이다.
타계한 이구 씨의 양자 입적 문제가 이처럼 큰 분란을 야기한 것은 ‘양자’란 성격이 비록 상징적이나마 전주이씨 쪽에서는 대한제국의 황실의 정통성을 이을 수 있는 주인공이 되는 까닭이었다. 황실이 존재했다면 이는 마치 차기 황제의 보위를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당히 중차대한 일이기도 한 셈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종 황제의 직계 황손은 대부분 환갑을 넘긴 고령으로 손에 꼽을 만하다. 고종에게는 원래 9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대부분 유아 시절 일찍 사망했고, 장성해서 결혼에까지 이른 왕자는 세 명이었다. 장남 격인 순종(조선왕조 마지막 왕)이 후손이 없었던 탓에 3남 격인 영친왕이 ‘황태자’가 됐다. 하지만 지난해 7월 16일 영친왕의 사실상의 외아들 격인 이구 씨마저 후손 없이 타계한 탓에 영친왕대도 후손이 끊겼다. 따라서 황실의 후손은 차남 격인 의친왕 계열만 남은 셈이다. 그런데 의친왕은 12남9녀의 많은 후손을 낳았고 이들에 의해 오늘날 실체도 없는 황위 다툼이 창덕궁 내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12남9녀 가운데서도 대부분이 이미 사망했거나 미국 등지에 영주권을 얻은 채 스스로 황손임을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다. 따라서 현재 생존해 있는 황손들 가운데 이충길, 이석 씨와 이해원 여사가 가장 웃어른 격이거나 국내에 남아 활동 중인 대표적인 황손으로 꼽힌다. 소위 ‘황권주자 빅3’가 되는 셈이다.
▲ 작년 7월 황세손 이구 씨의 장례식에서 의친왕의 9남 이충길 씨의 장남인 이원씨가 빈소를 지키고 있다. | ||
사실상 이충길 씨와 이석 씨의 대결 구도에서 제3의 인물로 이번에 파란을 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이해원 여사다. 그는 현존하는 의친왕의 자녀들 가운데 최연장자로 황실의 가장 어른 격이 된다.
현재 ‘황위 논란’의 대결구도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종약원)과 ‘대한제국 황족회’(황족회)의 싸움으로 비화되고 있다. 종약원은 이충길 씨와, 황족회는 이해원 여사와 밀착돼 있다. 여기에 두 단체를 모두 비난하고 나선 이석 씨 주변에선 최근 가칭 ‘이석 후원회’의 사단법인화를 준비 중이다. 옛 황실을 둘러싼 이해단체들과 주요 황손들이 사분오열 찢어져 권력다툼을 벌이는 형국이 되고 있는 셈이다.
먼저 기선을 제압한 것은 종약원 측이었다. 지난해 이구 씨의 타계 직후 장례식장에서 종약원 측은 발 빠르게 이원 씨를 양자로 결정하는 데 그 주도적 역할을 했다. 지난해 7월 22일 낙선재 회의에서 종약원 측은 이석 씨 등 황손 측에 “이구 전하가 타계하기 전에 이미 이원 씨를 자신의 양자로 할 것을 결정했고 이에 서명도 했다”고 자료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석 씨 등 일부 황손들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런 조악한 자료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반발했다. 옛 황손을 자처하는 한 관계자는 “미국에 계신 이충길 님과 종약원 측이 이미 쌍방 간에 모종의 합의를 봤다고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종약원 측의 주장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는 이해원, 이충길, 이석 씨 등 황손들이 모두 참석했고 또 이원 씨를 양자로 결정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종약원의 이정재 사무총장은 “오전 회의에서 황손들도 모두 이 같은 결정에 공감했고 찬성했는데 무슨 일인지 이석 씨가 오후에 갑자기 말을 바꿔 ‘원천 무효’를 주장하고 나섰다”며 “당시 회의 내용은 회의록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석 씨 등은 “당시 회의는 이미 종약원 측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놓고 일방적으로 몰고간 것에 불과하지 회의가 아니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당시 이충길 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손들과 관계자들은 종약원의 결정에 반발했고, 따라서 이원 씨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구 전하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일 뿐 황위를 계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못 박고 있다.
이때부터 이미 황손 주변은 종약원의 결정을 인정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양분됐다. 반대하는 측에서는 새로운 모임의 결성 작업을 준비했다. 그래서 지난 5월 발족한 게 소위 황족회다. 처음 여기에 참여한 이석 씨의 입장을 들어보자.
▲ 작년 7월 고 이구 씨 빈소의 이석 씨. | ||
결국 이석 씨가 반대하고 나선 이후 황족회는 지난 9월 29일 소위 ‘여황 대관식’을 강행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일반인들의 황실 관련 모임 단체가 이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우리황실사랑회’의 전종현 위원장은 “황족회라면 말 그대로 황족들의 모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입되어 있는 황족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현존하는 대한제국의 황족은 의친왕의 직계자손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상관없는 자들이 ‘10촌 이내는 황족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사무총장, 대변인 등을 나누어 가지는 지금의 황족회는 절대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비교적 황족회 인사들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던 ‘대한황실재건회’ 측 역시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는 황족회의 대관식을 인정할 수 없으며, 황족회를 전체 황족을 대표하는 단체로 인정할 수도 없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종약원뿐만 아니라 황실 관련 여론을 주도해온 주요 단체들이 일제히 ‘황족회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비난하고 나서자 황족회로서도 상당히 곤혹스런 입장이다. 황족회의 이성주 대변인은 “주변의 그런 염려와 여론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황족회는 현재 갈라진 황족들을 재결집하는 구심체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결국 우리 황족회를 중심으로 황손들이 모두 뜻을 합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황실 관련 단체들은 어떤 입장일까. 전 위원장은 “어쨌든 현재로서는 지난해 7월 종약원 측과 주요 황손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이원 씨를 이구 씨의 양자로 공식 결정했기 때문에 그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황실 관련 단체들이 종약원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약원 역시 비난을 듣기는 마찬가지다. 황실 관련 단체의 한 관계자는 “종약원이 그동안 정권과 밀착해서 황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방치해온 것을 잘 알고 있다. 정치적인 색채가 강해 황실 복원에도 노골적으로 반대해왔고 이구 전하가 일본에서 비명횡사하도록 방치한 종약원이 이제 와서 황실의 인기를 앞세워 말도 안 되는 각종 이벤트성 행사로 황손들을 탤런트로 만들려 한다”고 맹비난했다.
제3의 세력 규합을 노리고 있는 이석 씨에 대해서도 비난 여론이 만만찮다. 역시 황실 관련 단체의 한 관계자는 “이석 씨의 경우 너무 노골적으로 ‘황위 승계’의 욕심을 보이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비난했다. 이 관계자는 “대한민국 헌법 체제에서 갑자기 황실을 인정하는 입헌군주국 식의 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역사의 유지 차원에서 상징적이나마 이구 황세손의 뒤를 잇는 후손은 필요하다고 보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의친왕의 자녀분들이 현재 다투는 모습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실망스런 모습만 노출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파문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많은 관련 단체들과 학자들 사이에선 “국민의 정서와 동떨어지게 황제 대관식이니 뭐니 하고 다투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계한 이구 씨의 양자 형식을 통해 그 대를 자연스럽게 잇게 해서 상징성을 지키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과연 ‘황권 3주자’는 향후 어떤 결단을 내릴까.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