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일환 씨는 일흔이 넘은 노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모습이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무려 50여 년 동안 주먹세계에 몸담으며 이름을 날렸던 조 씨는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신앙에 귀의, 홍성에 있는 ‘예수전도선교회’에 소속되어 ‘선교사’를 꿈꾸는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먹’ 하나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았던 그가 자신의 지난 과오들을 참회하며 후배들에게 참다운 ‘멘토’로서의 자세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 오는 24일 자신의 일대기와 비화, 신앙간증을 담은 저서들의 ‘출판 기념회’를 앞둔 그를 11월의 첫날 천안에서 만났다.
조 씨가 약속장소인 A 커피숍에 나타났을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그에게 집중됐다. 검정색 정장과 고동색 중절모를 반듯하게 차려입고 나타난 그는 누가 봐도 일흔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178㎝의 키에 120㎏에 달하는 건장한 체격 때문일까. ‘천안곰’이라는 별칭은 이 거구의 노인에게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조일환입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젊은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조 씨는 “고향인 천안에서 상가분양 및 개발사업을 하는 한편 대학교와 교도소, 소년원 등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상담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난 이후 긍정적인 마음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 덕에 혈압도 정상으로 돌아와 현재는 왕년의 체력과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가 요즘 특히 관심을 쏟는 부분은 청소년 상담 및 소년원생들의 교화. 수십 년을 ‘자존심’과 ‘배짱’ 하나로 고개 한번 숙이지 않고 살아온 그지만 이들 앞에서 그는 전직 주먹이 아닌 인생의 대선배일 뿐이다.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주먹세계 경험에 대해 담담히 털어놓기는 하지만 조 씨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현역 시절의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다.
상담 과정에서 단지 ‘여자’와 ‘돈’이 좋아서 조폭을 꿈꾼다는 청소년들의 철없는 객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조 씨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수십 년간 몸담으면서 느낀 ‘조직’의 실상에 대해 고백하며 조언을 해준다고 한다. 소년원을 밥먹듯이 드나들며 잘나가는 조폭을 꿈꾸던 청소년들도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른 조직의 냉철한 생리와 실상에 대해 듣고 나면 뜨끔해한다고. 특히 수많은 조직원들이 오랜 수감기간을 겪은 후 상처투성이뿐인 가슴을 움켜쥐고 비참한 말로를 걷는다는 얘기에 마음을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
조 씨는 “어느 시대나 조폭은 있지만 지금의 조폭은 과거와 전혀 양상이 다르다”며 최근의 조직세계 동향에 대해서도 운을 뗐다. 그는 “요즘에는 드러내놓고 무더기로 몰려다니며 범법을 저지르는 조폭 대신 소위 ‘고급주먹’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전했다.
고급주먹의 보스들 중에는 10여 개 이상의 술집과 PC방, 주유소 등을 운영하며 최소 수십억 원대의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도 많은데 정작 이들 중 세간에 이름이 알려진 이는 거의 없다는 것이 조씨의 얘기다. 굳이 경찰 감시망에 걸릴 정도로 드러나게 조직을 결성해 활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조 씨는 이들 고급주먹에게 ‘최소 세 가지는 지키자’며 ‘정당히 세금을 납부할 것, 사회에 해를 끼치지 말 것, 마약에 손을 대지 말 것’ 등을 강조한다고 한다.
조 씨는 “세간에 많이 알려진 조양은이나 김태촌의 경우 고급주먹과는 거리가 있다. 공권력과 언론이 부추긴 탓에 표적이 됐을 뿐이다. 정작 각 지역의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고급주먹의 보스급 인사들”이라고 말한다. 검·경이 조·김 씨의 동향을 파악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고급주먹이 주먹세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조·김 씨가 다시 조직을 재건할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의리’ 하나만으로 조직 결성이 가능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요즘 조직을 꾸리기 위해서는 ‘돈’ ‘파워’ ‘조직원’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들 세 가지 조건은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충분조건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촌이나 양은이는 현재 이 조건 중 아무것도 충족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조 씨의 설명이다.
‘과거의 명성을 업고 조직을 재결성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조 씨는 “요즘은 돈 없으면 보스짓도 못 해먹는다. 돈이 없는데 누가 정 하나 믿고 따르겠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보스를 따르게 마련”이라며 “두 사람의 경우 15년 이상 ‘빵’(감옥)에 있다 나왔는데 그 조직이 온전히 굴러갈 리가 있겠나”라며 일각의 조직재건설을 부인했다.
그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내의 해외조폭들의 실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얼마 전 공개된 국정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 침투한 해외폭력조직들이 수십 개에 달한다. 조 씨는 “국내에서 해외 폭력조직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며 “실상은 검·경이 파악하고 있는 수보다 훨씬 많다”고 단언했다. ‘여자장사’ ‘마약밀수’ ‘사채놀이’ 등으로 막대한 부를 챙기며 활개치고 다니는 해외조직이 적지 않다는 것.
그러나 조 씨는 “검·경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들의 실체를 파악하기도 또 핵심을 잡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이유는 검·경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이들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는 “조폭들의 동향은 조폭들만이 안다”며 “쥐를 잡는 데는 힘을 앞세운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가 제격”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국내 조폭들의 행동반경이 검·경의 레이더에 포착되는 것도 조직원 사이에서 말이 새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폭세계에서 ‘문 단속 잘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해외조폭도 마찬가지다. 궤변 같지만 이들을 잡으려면 공권력과 국내 조폭 간에 일종의 연대감 비슷한 게 형성되어야 한다.”
그는 “이제 주먹들도 바뀌어야 산다”며 과거처럼 불법과 파행을 일삼기보다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새 삶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번 조폭은 영원한 조폭’으로 낙인 찍는 세태 때문에 새 길을 걷기 위해선 평범한 사람보다는 몇 배나 더 큰 고통이 수반된다며 이런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불과 17세 때 주먹과 배짱 하나로 지역을 평정한 조 씨. 그는 “주먹세계란 법보다 더 무서운 세계다. 조직에 몸담았던 나를 변화시킨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누릴 것 다 누려본 이상 더 이상 큰 욕심이 없다”며 묵묵히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준 아내의 손을 굳게 잡아 보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