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6월 14일 검찰에 출두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그의 회고록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 ||
김 전 회장이 1999년 10월 해외 도피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의 존재 자체는 ‘정국의 뇌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대우 몰락 사태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소위 ‘김우중 X파일’은 단연 초미의 관심사였다. 실제 김 전 회장은 해외에서 회고록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귀국을 준비할 때에도 김 전 회장과 그 측근들이 제일 먼저 회고록 집필부터 챙겼다는 증언도 나왔다.
소설가 주치호 씨는 지난 10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회장 측에서 귀국하기 두 달 전부터 내게 비밀스럽게 회고록 집필을 준비시켰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계획은 ‘8·15특별사면 시나리오’가 물거품이 되면서 무산됐다. 이후 김 전 회장은 아예 입을 닫았고 그가 해외에서 준비했다는 비망록도 숨어버렸다.
여러 경로로 확인해볼 때 김우중 전 회장이 자신의 비망록을 중심으로 한 ‘회고록’ 집필에 상당한 집착을 기울인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기에 그런 것일까. 주변의 추측만 무성한 가운데 김 전 회장은 끝내 다시 차디찬 독방에 수감됐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고 외쳤던 김 전 회장이 ‘1.3평의 소우주’ 속에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게 될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대우그룹 고위 임원 출신의 한 관계자는 “‘대우 죽이기’에 앞장섰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최근 론스타 사태로 자주 검찰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혹시 김 전 회장의 심경이 담긴 것인가’라는 질문에 씁쓸한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지난해 6월 김 전 회장이 5년 8개월간의 해외 도피 생활을 접고 귀국했을 때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그가 들고 들어올 ‘X파일’에 집중했다. 여기에는 김 전 회장이 정·관계에 건넸을 로비 자금 내역이 든 소위 ‘김우중 리스트’와 함께 김대중 정권에서의 ‘대우 몰락’ 과정에 대한 모든 비화가 다 들어 있을 것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또한 조풍언 씨 관련 의혹과 해외 재산 도피 의혹 등 숱한 의혹에 대한 해명도 있을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이 내놓은 것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직접 육필로 썼다는 ‘대국민 사과문’ 한 장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김 전 회장이 국내 상황을 먼저 살피는 수순의 시작이었다. 김 전 회장 측은 이미 귀국 전부터 비망록에 대한 집필 정리를 사전에 준비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소설가 주치호 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지난해 4월경 김 전 회장 측에서 내게 ‘회고록 집필을 준비할 수 있도록 대기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김 전 회장 측은 ‘노(무현) 캠프 측과 이미 8·15 특별사면의 약속이 돼 있다. 사면이 이뤄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는 언질을 줬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하지만 막상 예상과 달리 사면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회고록 집필 계획은 무산됐다”고 밝혔다.
‘김우중 회고록’은 김 전 회장의 해외 체류 시에도 자주 화제의 뉴스로 부각된 바 있다. 2001년 3월 김 전 회장의 법률 대리인 격인 석진강 변호사는 당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회장이 현재 유럽 모처에서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는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으며, 회고록 집필이 끝난 후 귀국할 가능성이 있다”고 처음 밝혔다.
같은 해 10월에는 최측근이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아 거의 날마다 통원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회고록을 구상하고 있으며 회고록을 통해 대우그룹의 흥망을 조명하고 대우에 대한 세간의 갖가지 오해를 해명할 생각”이라는 뜻을 한 경제일간지에 전하기도 했다. 2003년 1월 김 전 회장을 정식 인터뷰한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 역시 “김 전 회장이 한 프랑스 엔지니어링 회사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으며 그는 자서전을 쓰고 있고 처음으로 골프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의 ‘공보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백기승 전 대우그룹 홍보이사는 지난 10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금 상황에서 회고록은 자기 변명으로만 비칠 수 있다는 것이 김 회장의 생각”이라며 당장은 계획이 없음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전히 대우와 김 회장에 대한 일방적 매도 분위기가 우세한 형편 아니냐”는 그의 말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하는 듯했다.
다만 그는 “수감 생활 중에 김 회장은 보다 더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 사회를 위해 본인이 마지막으로 기여할 것이 무언인지에 대해 생각하실 것”이라는 말로 어떤 식으로든 김 전 회장이 스스로에 대한 심경을 정리할 가능성은 내비쳤다.
백 전 이사는 김 전 회장이 지난해 6월 귀국한 이후 최근까지 약 1년 5개월간의 생활에 대해 전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역사’에 유독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는 “김 전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아 책을 오래 보지는 못하시고 다만 TV 역사 드라마 등 국내 역사 공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전했다. 그는 또 “지난해 처음 귀국했을 때와 지금의 모습을 보면 김 회장도 많이 바뀌셨다. 아마도 재판과정을 직접 겪으면서 느낀 바가 많았을 것으로 본다. 보다 더 냉정해졌고 한편으로는 또 많은 좌절감을 느끼신 것 같다”고 전했다.
백 전 이사는 현 정부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표출했다. 그는 “지난해 6월 귀국 때 검찰이 정말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최소한의 경호는 고사하고라도 마치 시정잡배 식으로 세워놓고…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경제는 내년에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무분별한 해외 자본 도입으로 단물만 다 빼먹히고 지금 그 부작용이 하나둘씩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안타깝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전 회장의 현재 심경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신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