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가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지난 7일 새벽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나서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씨는 교도소에서 생활하는 틈틈이 비망록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그 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연합뉴스 | ||
이 씨의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 씨가 그간 옥중에서 지난날을 하나씩 글로 정리해온 것으로 들었다”면서 “차마 언론에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을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며 비망록 출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알려졌다시피 이 씨는 지난 80년대 경찰관으로 재직 당시 수많은 용공·간첩 사건 수사를 진행하며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장본인. 수많은 수사 대상자들을 상대로 물고문·전기고문 등을 자행, 인격을 무너뜨리고 허위 자백을 이끌어내 ‘저승사자’로 불리기도 했다.
이 씨의 비망록과 관련,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99년 자수 이후 고문수사의 배후 등에 대해 무거운 침묵을 거듭해온 그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입을 열까 하는 점이다.
그간 용공 조작 고문 피해자들을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들 사이에선 5·6공 당시 자행됐던 고문수사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일각에서는 몇몇 거물급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문 수사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물꼬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늘 이 씨가 지목돼 왔다. ‘고문기술자’로서 수많은 용공 조작 사건에 투입됐던 이 씨야말로 권력 심층부부터 일선 대공 수사 분실까지 연결되는 고문수사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당사자이기 때문. 만약 이 씨가 비망록을 통해 비밀스러운 과거를 털어놓을 경우 또 한 차례 정국에 거센 풍랑이 일 것으로 보인다.
애초 이 씨가 비망록을 구상한 것은 88년 12월 전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현 열린우리당 당의장)를 고문한 혐의로 수배령이 내려진 뒤 도피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지난 99년 검찰 수사 결과, 그가 서울 용두동 집에 은신하고 있던 96년께부터 틈틈이 자신의 인생여정을 담은 수기를 작성해온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이 씨의 집에서 발견됐던 수기에는 6·25전쟁 당시 이 씨 일가의 행적과 성장 과정이 담겨 있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대공수사요원으로 일한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 99년 검찰은 이 씨가 도피 중 작성한 수기를 공개했었다. | ||
수감 기간 동안 이 씨를 지도한 교도소 교정관계자에 따르면 이 씨는 교도소 내에서 8학기 신학대학 과정을 이수했는데 학위를 얻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인으로서의 결심 등을 꽤 많이 글로 정리해 놓았다고 한다.
이처럼 이 씨가 비망록을 내기로 결심한 데에는 과거에 대한 참회의 의미, 그리고 모든 업보를 혼자 짊어질 수만은 없다는 욕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이 씨는 옥중에서 가진 <일요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도 “정말 할 말이 많다”며 가슴 속 깊이 묻은 얘기들을 언젠가는 시원하게 밝히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바 있다.
또한 비망록 발간을 통해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보고자 하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씨의 부인 신영옥 씨는 남편이 수감돼 있는 동안 어렵게 꾸려나가던 미용실을 올해 4월 정리했고, 이 씨 본인도 지속적으로 당뇨나 안구 통증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딱히 수입이 없는 상황이라 앞날에 대한 시름이 깊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일각에서는 이 씨의 비망록 출간 계획 소식이 전해지면서 실제로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도 하다. 용공 조작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5공 인사들의 ‘회유’와 ‘간섭’이 있지 않겠느냐는 시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제 이 씨가 비망록 발간을 앞두고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몇몇 인사와 접촉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 씨는 과거 도피 당시만 해도 고문 사건을 대공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치부해 왔다. 그의 부인 역시 지난 2004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나라가 거꾸로 가는 상황에서 남편이 말하지 못한 얘기를 (지금) 꺼내봐야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억울한’ 심경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씨는 최근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적잖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면회를 하러 찾아온 주변 지인들에게 “이젠 마음의 짐을 벗고 싶다”는 얘기까지 꺼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씨의 비망록에는 과연 어떤 ‘진실’이 담겨 있을까.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