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의 80대 노인 피살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살해용의자로 장 아무개 씨 등 2명을 붙잡아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장 씨 등은 혼자 살던 80세 하 아무개 노인의 집에 들어가 노인의 얼굴에 비닐봉투를 씌운 후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독거노인의 안전이 사회문제가 됐다. 며칠 후 아침식사를 하는데 언론에서 그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감정을 억제한 앵커의 설명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며칠 전 혼자 살던 노인이 숨진 채 발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평소 아들처럼 따르던 이웃이었습니다. 노인이 엄청난 부자란 사실을 알고 범행을 결심했다는데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경운가요? 참 씁쓸합니다.”
그 부자 노인은 3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강력반 형사가 나와서 범죄내용을 알리고 있었다.
“원래는 외국인 킬러를 시켜서 할아버지를 죽이면 2억 원을 주겠다고 한 거죠. 그리고 같이 죽인 겁니다.”
리포터가 다시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범인 장영두는 자신이 고용한 외국인 킬러와 과수원 주인인 하 노인 집을 찾았습니다. 평소 집에 찾아오는 이가 없어 두 젊은이를 반갑게 맞이한 하 노인, 하지만 ‘어서 오라’는 한마디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저항하기에는 너무 쇠약했던 80세의 하 노인, 때리고 목을 조르는 두 청년에 의해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요. 피의자들이 노린 것은 땅문서. 주인만 없으면 자신들의 계획대로 될 거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시 농로 위로 기자가 나타나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사업가였던 죽은 하 노인은 20여 년 전 가족들과 떨어져 귀농했습니다. 검소했던 하 노인, 평소 자식에게 유산에 기대지 말 것을 강조했는데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학회를 해가지고 사회사업을 해라. 그런 취지로 부동산을 하나도 못 움직이게 해놓았다고 합니다.”
리포터가 잠시 말을 끊고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큰 뜻을 품고 자연을 벗 삼아 노년을 보냈던 하 노인. 모시고 살지 못해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자식들은 죄스런 마음뿐입니다. 최근 핵가족화, 고령화되면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재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사건은 더욱 심각한데요. 독거노인은 위협할 대상이 아닌 우리 모두가 보호해야 할 분들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순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학회를 만들려고 부동산을 묶어놓았다면 자식들조차 건드릴 수 없다. 부동산 강도의 혐의점을 발표하는 강력반 형사의 말이 이상했다. 검소한 노인들은 집에 현찰을 별로 두지 않는다. 그런데도 방글라데시인 킬러는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를 죽여주면 2억 원을 받기로 했다고 기자들에게 말을 했다. 한번쯤 이면을 파보면 다른 얘기들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사건이었다.
몇 달이 흐른 어느 목요일 오후였다. 아는 기독교 잡지사의 소개로 사십대 중반의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까만 얼굴 속에서 커다란 눈이 번쩍였다.
“저는 안산 변두리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는 장영목 목사입니다. 도움을 요청해 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는 가지고 온 비닐서류철에서 두 장가량의 손때 묻은 구깃구깃한 서류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이거 한번 봐 주세요.”
그 서류들은 인터넷에서 방송 멘트를 프린트한 것이었다. 얼마 전 내가 봤던 노인살해사건 특집프로그램의 내용이었다.
“이 방송, 제가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 살인범이 제 동생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답니다. 동생은 그 노인을 죽이지 않았답니다.”
그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었다. 그의 눈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가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계속했다.
“동생은 혼자 사는 하 영감님의 배나무 과수원에서 지난 5년 동안 일을 했어요. 그런데 그 영감님이 아주 인색하고 성질이 고약한 분이었죠. 동생은 과수원에 일하러 온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그 영감님을 욕하면서 ‘아주 죽여 버리고 싶어’라고 몇 번 농담을 했답니다. 왜 우리들 흔히 누구를 죽여 버린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같이 영감님을 만나는 길에 진짜 목 졸라 죽여 버린 거예요. 경찰에 잡힌 그 방글라데시 노동자는 제 동생이 죽이라고 해서 죽여줬다고 자백했죠. 동생은 이미 일심 재판에서 청부살인죄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동생은 농담을 잘하지만 누구를 죽일 성격이 아닙니다. 그 영감님을 죽일 이유도 없고요.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형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동생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물었다. 형을 통해 인격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었다.
“동생은 금년에 마흔 살인데 아직 장가도 못 들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다가 IMF 때 평택으로 내려와 배나무 과수원을 빌려 과일농사를 지었죠. 여태껏 경찰서 근처에는 가 본 적도 없어요.”
뉴스 보도와는 내용이 전혀 달랐다. 뭔가 있을 것 같았다.
“일심에서 재판받을 때 어떤 점이 불만이셨죠?”
내가 물었다.
“변호사가 구치소의 동생을 찾아가도 10분 이상 만나주지를 않았어요. 변호사가 동생 얘기를 잘 들어봐야 내용을 알 거 아닙니까? 그리고 온 가족이 돈을 털어 변호사비 1000만 원을 줬습니다. 그 돈이면 우리 식구 일년 생활비가 됩니다.”
그는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다음 날 나는 교도소에 찾아갔다. 변호사 접견실로 곱슬머리에 각진 턱을 가진 장영두가 나타났다. 의외로 그는 변호사가 전혀 반갑지 않다는 거부의 눈길이었다.
“저 변호사 없이 혼자서 할 랍니다. 그냥 받은 징역형 15년을 그대로 살아버릴까 생각 중이에요. 아니면 혼자 싸우든가.”
그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왜 혼자 하려고 그러죠?”
“내가 말한 의미하고 조서에 써 있는 게 전혀 달랐어요. 말한 제 입하고 듣는 검사의 귀가 다른 거죠. 그래서 일심 변호사님께 이게 아니니까 처음부터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 변호사님 말씀이 그냥 시인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난 그 변호사에게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 줄 알고 가만히 있었죠. 그런데 터무니없이 징역 15년을 살라는 형이 그냥 떨어진 거예요.”
그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담당검사가 오히려 무기징역으로 형이 올라가야 한다면서 항소를 한 상황이었다. 그는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자신의 불행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계속했다.
“항소심에서 하나하나 따지면서 무죄투쟁을 하려면 변호사비가 장난이 아니라는데요?”
그의 뇌리에 꽉 찬 것은 비싼 변호사비였다. 그가 덧붙였다.
“일심에서도 판사가 소개해서 그 변호사를 선임했었거든요.”
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죽은 영감님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내가 수첩에 메모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무뚝뚝하고 닥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형은 예민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타입들은 비논리적이다. 조작된 증거와 교활한 논리가 난무하는 법과 수사의 함정에 빠져들기 쉬웠다. 그가 마지못해 시큰둥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소작을 부치던 과수원 주인이 하 영감님인데 과수원 한쪽에 단층 벽돌집을 지어서 혼자 사셨죠. 독특한 성격이었어요. 영감님은 그 마을에 산 지 25년이 넘었는데도 마을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를 않는 분이었어요. 재산은 상당히 많았어요. 130억 원이 넘을 겁니다. 땅이 100억 원 정도고 은행에 30억 원을 예금하고 그 이자로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파출부도 쓰지 않았어요. 음식도 혼자 직접 해 드셨죠. 제가 더러 읍에 가서 장을 봐다 드렸죠. 장아찌하고 김치를 주로 사다가 드렸어요. 더러 닭고기를 사다가 간장에 조려서 두고두고 밑반찬으로 드시기도 했죠. 저녁이면 혼자 있는 게 무서우니까 개를 일곱 마리나 마당에 키웠어요. 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지키라는 거였죠. 집에도 안방에 항상 장전된 공기총을 두고 있었어요. 망원경까지 부착된 스웨덴제였죠. 저녁만 되면 저도 함부로 그 집에 가지 못했어요. 오는 걸 싫어하셨어요.”
찰스 디킨즈의 소설 속 스크루지 영감이 떠올랐다. 특집 프로그램의 내용과는 전혀 반대였다. 그가 계속했다.
“영감님은 철저했어요. 새벽 4시면 정확히 일어나 과수원 안을 조깅하고 과일창고에 가서 거기 있는 저울로 몸무게를 쟀어요. 78㎏이 조금만 넘어도 저녁밥을 먹지 않았어요. 해가 뜨면 풀들을 뽑고 아침 10시쯤이면 식사를 하는데 호두나 은행을 몇 알 까서 잡수셨죠. 점심도 부엌의 부뚜막에서 혼자 대충 먹는 것 같았어요. 제가 더러 가보면 부엌에서 나오면서 입을 닦는 걸 봤으니까요. 누구하고도 사귀지 않고 혼자 그렇게 젊어서부터 살아 왔대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죠?”
나는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그는 구도자나 종교인이 아니었다.
“영감님도 사람이니까 외로워서 그런지 제가 일하다가 더러 볼일이 있어서 가면 두세 시간 동안 꼼짝없이 잡혀서 얘기를 들어야 했죠. 봇물이 터진 듯 말을 하시는 거예요. 영감님은 소싯적에 남도에서 방앗간을 했대요. 60년대 서울로 올라와 집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대요. 그런데 방앗간을 할 때 할머니가 몰래 쌀을 팔아먹어서 신세 조졌다는 겁니다. 영감님은 말끝마다 할머니 욕을 했어요. 자식들도 욕했죠. 영감님은 자식들에게 돈을 주면 그날로 다 없어진다고 생각했어요. 10년 전에 큰며느리가 다녀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녁에 영감님이 보니까 가스가 틀어진 걸 발견하고는 며느리한테 연락을 했대요. ‘너 이년 나 죽이려고 했지?’ 하면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욕을 욕을 했대요. 그 다음부터 자식들의 발길도 끊어진 거죠.”
“돌아가신 영감님의 돈에 대한 관념은 어땠어요?”
강도사건이라면 중요한 그 보관 상태가 핵심이었다.
“영감님한테 근처 교회에 다니시라고 권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헌금할 돈이 아까워서 못 가시겠대요. 할머니하고도 정식으로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위자료를 달라고 할까봐 그렇대요. 한번은 마을길에서 영감님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 걸 마을 사람이 봤어요. 그래서 경운기에 영감님을 태워 가지고 병원에 데려가서 살려냈는데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가만히 두면 깨어날 텐데 괜히 병원에 데리고 가서 생돈 5000원을 버렸다는 거죠.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 줘도 전혀 고맙다는 인사가 없는 영감이었어요. 그러면서도 통장에는 몇십억 원이 들어 있어요.”
그런 하 영감이 어느 날 부패한 시체가 되어 발견된 것이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