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훈 대법원장은 진로 법정관리 소송 당시 골드만삭스의 변호사로 활약했었다. | ||
지난 11월 17일 한나라당 박세환 의원이 “지난해 외환은행이 극동도시가스를 상대로 법원에 제기한 약속어음금 청구소송(원고 소가 327억 원)을 변호사 시절 이 대법원장이 수임했다”며 사건 수임과 영장 기각과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해 법조계가 전체가 들썩였던 것.
당시 외환은행의 대주주인 론스타 펀드 한국지사의 유회원 대표가 론스타 로비스트로 알려진 하종선 변호사(구속·현대해상 대표이사)를 통해 이 대법원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했는데 이러한 인연이 네 차례에 걸친 유 대표의 구속 영장 기각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겠느냐는 게 박 의원이 제기한 의혹의 요지였다.
이후 언론 등을 통해 관련 의혹이 계속 불거지자 법원 측은 이 대법원장의 당시 수임 내역까지 공개하는 등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며 확대해석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공방을 거치면서 이 대법원장의 변호사 시절 행적이 더욱 주목받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일요신문>은 이 대법원장이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와 유사한 방법으로 진로그룹을 싼 가격에 인수한 뒤 거액에 매각, 엄청난 차익을 얻어 논란을 빚은 미국계 증권사 골드만삭스의 법률대리인을 맡았던 사실을 단독으로 확인했다.
골드만삭스가 진로 채권을 싼값에 샀다가 다시 국내 기업에 비싼 값에 팔았던 사례와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해 엄청난 이익을 남기게 된 사례 등은 국부유출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함께 거론되고 있다.
이 대법원장이 변호사 시절 수임한 사건 내역을 분석한 결과, 이 대법원장은 지난 2003년 화의기업인 진로의 채권자였던 골드만삭스가 계열사인 세나인베스트먼트 법인을 통해 진로에 대한 회사 정리(법정 관리)를 법원에 신청할 당시 세나 측의 항소 및 상고심 소송 변호를 맡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진로 측이 골드만삭스에 제기한 진로 채권 가압류 소송의 항소심 사건에서도 K 변호사와 함께 세나 측의 법률대리인을 맡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세 건의 소송은 모두 세나 측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단순히 국내 기업을 인수·합병했던 외국 자본을 법률적으로 대리한 사실만으로 론스타 사건에 대한 이 대법원장의 개인적인 시각과 견해를 어느 한 쪽으로 단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러나 현재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 처리 과정을 통해 국내 기업 인수·합병 등으로 큰 차익을 얻은 거대 외국 자본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가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론스타 건을 포함한 외국 자본들이 국내 회사를 인수하고 매각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들이 깨끗하게 풀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외환은행 사건의 주체인 론스타 관계자들의 영장이 연이어 기각당한 시점이기에 법원의 수장이 외국 자본을 대리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논란을 야기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진로의 채권자인 골드만삭스가 전격적으로 진로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지난 2003년 4월이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97년 진로 부도 이후 자산관리공사로부터 진로의 부실 채권을 차근차근 사들였다.
▲ 2003년 진로 노조원들이 골드만삭스의 진로 법정관리 신청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 | ||
진로는 경영 개선과 외자 유치를 위해 골드만삭스와 경영 자문 계약을 맺었으나 골드만삭스 측이 이를 이용, 진로 계열사의 채권을 사들이는 등 경영권을 빼앗고자 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에 골드만삭스도 강력하게 법적으로 대응 조치를 하겠다고 맞서면서 금융권에서는 진로와 골드만삭스의 향후 행보가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골드만삭스가 화의 과정에서 지분을 무기로 실제 경영권을 장악하지 않겠냐는 예상과 함께 법정관리 가능성이 봇물처럼 터져나온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이후 진로가 골드만삭스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취하하고 미국 은행을 통해 1조 원이 넘는 외자 유치를 추진하면서 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골드만삭스는 계열사인 세나인베스트먼트(법원 판결문에는 아일랜드 소재로 기재)를 통해 2003년 4월 3일 서울지방법원 파산부에 회사 정리절차 개시 및 재산보전처분 신청을 냈다. 총부채가 총자산을 326억 원가량 초과한 진로의 지급불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법정관리를 개시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진로는 화의 조건을 100% 이행했음에도 진로의 경영권 탈취 목적으로 진로의 구조조정을 방해한 골드만삭스가 채권 회수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법정관리 신청을 했다며 소송 철회를 주장했다.
당시 분위기는 법원에서 법정관리가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쪽이었다. 특히 진로 채권단 중 삼성증권, 우리은행 등 60% 이상의 국내 채권자가 법정관리 반대의사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기각을 점치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5월 14일 법원은 골드만삭스의 손을 들어줬다. 외국계 채권자의 신청에 법정관리가 받아들여진 첫 사례였다. 이렇게 되자 업계 내에서는 골드만삭스가 채권 회수율을 높이기 위해 제3자에게 공개 매각을 추진할 것이라는 예상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법원의 결정에 반발한 진로는 곧바로 항소했다. 세나인베스트먼트 쪽에서도 이에 대응해 변호인을 선임했는데 바로 이용훈 현 대법원장이었다. 당시 항소를 제기한 측은 장진호 진로 회장을 비롯해 삼양사, 효성 등 44개 법인. 법무법인 세종, 태평양, 덕수가 진로 측의 변호를 맡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진로노동조합위원장의 탄원서와 법정관리를 반대하는 백만인 서명지가 재판부에 제출됐으나 법원은 화의 조건 이행 실패와 진로 외자유치 성사 불투명 가능성을 들어 원심과 같이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 대법원장은 진로가 제기한 상고심도 세나 측의 변호인으로 수임했고, 대법원은 지난 2004년 5월 12일 최종적으로 세나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골드만삭스는 법정관리 소송 제기 직전 업계에서 나돈 예상대로 진로의 매각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 2005년 진로는 3조 4200여억 원에 하이트맥주로 매각됐고 진로의 채권 1조 4600억 원어치를 약 2700억여 원에 사들인 골드만삭스는 2년 만에 1조 2000억 원 상당의 차익을 터뜨렸다.
▲ 김재록(왼쪽), 이헌재 | ||
그간 론스타 건처럼 진로의 법정관리와 매각 역시 업계는 물론 법조계와 정치권을 달군 뜨거운 감자였다. 법정관리가 최종 결정된 이후에도 각 언론과 투기자본감시센터 등 민간단체에서는 골드만삭스의 행보를 ‘기업사냥’에 비유하면서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진로 측의 한 변호사는 지난 2004년 한 심포지엄에서 “회사 기밀은 물론, 진로가 채권 변제 능력이 있음을 안 골드만삭스는 딴 마음을 품기 시작하며 채권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지난해 국회 대정부질의 및 국정감사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진로 주채권자인 골드만삭스를 줄기차게 물고 늘어진 바 있다.
당시 진로의 법정관리 사건과 관련해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진로의 법정관리를 놓고 이 대법원장 외에 이헌재 전 부총리와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시 부실거래 기업 인수 및 대출과 관련한 알선수재 혐의로 최근 구속된 김재록 전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이 <한국경제>와 가진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자.
<한국경제>는 2006년 3월 27일 기사에서 김 전 회장이 진로 매각 건을 언급하면서 “2003년 진로의 법정관리를 앞두고 이헌재 전 부총리와 진로외자유치 자문을 하던 중 나와 의견이 대립됐던 적이 있었다. 나는 진로 채권단을 설득해 법정관리를 막으려 했는데 이 전 부총리로부터 그만두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이 전 부총리는 김앤장의 비상임고문. 그리고 김앤장은 진로 법정관리 소송에서 사실상 골드만삭스 측의 법률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난 2003년 7월 진로노조위원장이 항소심 재판부에 보낸 ‘진로탄원서’에서도 골드만삭스 측 소송 대리인을 김앤장으로 밝힌 대목이 발견된다. 하지만 실제 항소심 대리인으로 대법원 사건 기록(2003나○○○)에 기재된 변호인은 이 대법원장과 K 변호사의 이름뿐이다. 당시 K 변호사는 회사 정리 소송 1심과 항소심, 채권가압류 소송 항소심의 세나 측 변호인을 맡았다.
김 전 회장의 인터뷰 내용과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이 전 부총리와 김앤장, 이 대법원장이 함께 묶이는 셈이다. 특히 김앤장이 이 대법원장을 전면에 내세웠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기자는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사실 관계의 확인을 대법원에 요청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대법원장이 진로 법정관리 소송의 골드만삭스 측 변호를 맡은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사건 수임 사실에서 파생된 의혹을 마치 사실인 듯하게 곡해, 외부로 전달될까 매우 우려스럽다”며 답변이나 해명 자체가 의미없다고 밝혔다.
또 다른 대법원 관계자 역시 “외환은행 사건처럼 (변호사 시절 수임 사건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진로 법정관리 소송 당시 골드만삭스의 법률자문 역할을 했던 김앤장은 지난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부터 현재까지 론스타의 법률고문을 담당해오고 있다. 또한 외환은행 헐값 매각을 수사 중인 검찰은 최근 들어와 김앤장 고문인 이 전 부총리가 외환은행 매각과정에 개입했는지 여부를 규명하는 부분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처럼 론스타와 골드만삭스의 국내 기업 인수·매각 과정에서 이 전 부총리와 김앤장은 흡사한 길을 밟아왔다. 진로 법정관리 과정에서 이들과 한 배를 탔던 이 대법원장의 이름에 한 번 더 눈길이 가는 이유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