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가는 몇 년 전부터 장영두하고 같이 배밭 일을 했었다. 하루는 장영두가 배밭 주인 할아버지의 아들이 있는데 할아버지를 죽여주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장영두가 하는 말이 그 아들은 자기 친구고 지금은 가난한데 아버지가 죽으면 재산이 많이 생긴다면서 돈을 2억 원 주겠다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장영두와 랭가 두 사람은 몇 달 전부터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계획을 했다. 사전에 정찰도 세 번이나 가고 사건 당일 낮에 백세주를 한 병 사가지고 그 할아버지 집에 같이 갔다. 밖에서 장갑과 테이프, 그리고 비닐봉지를 챙겨 갔다.
거실로 들어갔는데 장영두가 처치하라는 신호로 손가락으로 등을 찔렀다. 랭가가 주먹으로 할아버지를 쳤다. 할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장영두가 처치하라고 등을 밀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할아버지 배에 올라타고 목을 졸랐다. 장영두는 바닥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발로 걷어찼다. 코피가 주르르 흘렀다. 장영두가 비닐봉지를 할아버지 머리에 씌웠다. 비닐을 씌우기 전에는 조금씩 할아버지가 움직였는데 그 뒤로는 잠잠해졌다.
장영두가 장롱을 뒤졌다. 랭가는 손에 피가 묻어 있어서 부엌에 가서 손을 씻고 그 집을 나왔다. 가지고 간 백세주는 장영두가 가지고 가서 마시라면서 랭가에게 주었다. 시체는 밤중에 쇳덩어리를 매달아 저수지에 버리기로 했다. 원래는 장영두가 랭가보고 혼자 가서 죽이라고 했는데 랭가가 혼자서는 못하겠다고 하니까 같이 갔다. 헤어질 때 장영두가 랭가에게 50만 원을 주면서 너 잘 숨어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랭가의 자백이었다. 2억 원을 받기로 한 프로 청부살인치고는 너무 엉성했다. 장영두는 랭가의 존재나 있는 곳을 말하지 말아야 했다. 청부살인이라면 랭가를 고국으로 도망시켜야 맞았다. 체포될 경우를 예상해서 진술을 맞추는 게 범인들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진술은 정반대였다. 한 사람은 우발적인 동기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청부살인이라고 했다.
랭가가 바로 자백했다는 것도 이례적이었다. 프로 살인자의 교활성이라면 먼저 수사에 혼선을 줘야 맞았다. 노인을 살해한 후 일주일 이상 지난 후에 시체가 발견됐다. 랭가가 고국으로 도주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랭가는 가지 않았다. 검사나 형사가 청부살인이라는 일정한 가설을 먼저 세우고 참고인들의 진술을 거기에 꿰어 맞추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들었다.
경찰은 100억대 부자 노인의 청부살인사건의 공범 일당을 검거하는 개가를 올렸다. 랭가의 체포로 결정적인 증인의 진술이 확보된 셈이다. 경찰은 방송기자들을 불러 바로 랭가의 청부살인을 발표했다. 랭가의 진술기록을 보면서 변호사인 나는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청부살인이라면 장영두가 배후를 밝혀야 했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장영두의 조서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발적인 동기로 하 영감을 죽였다던 장영두는 형사가 강도혐의 쪽으로 유도하자 그런 것 같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강도 자백을 믿지 않았다. 죽은 하 영감은 현찰을 집안에 두지 않았다. 또 땅문서의 관리도 철저했다. 경찰과 검찰은 청부살인 쪽으로 집요하게 추궁해 나갔다. 검찰에 가서도 장영두의 말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하다가 문서를 훔쳐 땅을 팔아먹을 의도로 강도 일을 꾸몄다고 했다. 마지막 조서를 보면 한밤중에 검사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오래전부터 살인을 모의하다가 결행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배후의 인물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수사기록상 창조된 장영두는 위장 자수한 교활한 살인청부업자로 낙착되었다. 끝까지 배후를 밝히지 않는 그의 이면에서 어떤 거액의 대가가 거래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랭가의 결정적인 진술은 경찰부터 검찰까지 단 한 글자도 바뀌지 않고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수사기록과 증거는 완벽했다. 장영두는 일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검사는 그게 부족하다면서 무기징역으로 바꾸어 처벌해 달라고 항소를 했다. 완전범죄를 꿈꾸는 교활한 악마에 대한 응징이었다. 장영두가 악마인지 아닌지 현실에서는 알 수 없었다. 복잡한 세상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걸 확인해가는 게 변호사의 또 다른 일이기도 했다.
며칠 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엔진소리가 요란한 고물 승용차를 장영두의 형 장영목이 몰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차창을 통해 비에 젖은 벼들이 바람에 몸을 떨고 있는 들녘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살해현장인 평택 객사리 수향저수지 부근의 마을로 가는 중이었다. 곧게 뻗은 황량한 고속도로에 시선을 고정시킨 장영목이 내게 말했다.
“사건이 터지고 죽은 하 영감님의 큰아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죠.”
수사기록을 보면 큰아들이 배후인물로 의심을 받고 있었다. 살인을 한 장영두가 감옥에 있다면 그 손발이 될 사람은 형인 장영목밖에 없었다. 나는 장영목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큰아들과 만났다는 것이다. 그가 계속했다.
“그 큰아들이라는 분 하는 말이 워낙 아버지 성격이 과격해서 그게 원인이 됐을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일심 변호사가 잘못해서 자칫하면 자기네 아들들까지 혐의를 받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큰아들은 자신이 살인교사의 혐의를 받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원인을 사선 변호사에게 돌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변호사의 존재는 자금이 있다는 걸 암시했다. 배후에서 변호사를 통해 원격조정을 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그가 차선을 조심스럽게 우측으로 바꾸면서 말을 계속했다.
“하 영감님의 큰아들은 차라리 국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나았을 뻔했다고 말해 주더라고요.”
큰아들과 장영목 둘 사이에 그런 대화까지 오간 걸 보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걸 내게 얘기하는 것일까? 그들 사이의 배후모의를 다 털어놓고 앞으로의 계획에 가담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가 그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물었다.
“국선 변호사는 검사나 판사하고 같이 관직의 밥을 먹기 때문에 차라리 나은 게 아닌가요?”
엉뚱한 반문이 터져나왔다. 그는 국선 변호사라는 게 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설명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국선 변호사는 법원에 있는 공무원이 아니고 일반변호사가 잠시 공익적인 일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겁니다. 솔직히 돈을 안 받으니까 성의가 없는 경우가 많죠. 그게 동생 장영두한테 뭐가 유리하단 말씀입니까?”
배후로 지목받은 죽은 하 영감의 큰아들은 자기 입장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이중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보받고 경찰서에 가서 장영두를 범인으로 아예 지목하고 수사해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국선 변호사가 그런 줄 몰랐습니다. 그걸 모르고 저는 큰아들의 말을 호의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장영목은 속았다는 분한 표정이었다.
“큰아들의 성격은 어때 보였어요?”
내가 물었다.
“상당히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어요. 서로 인연이 잘못되어 이런 사고가 났다면서 오히려 저를 다독였어요.”
“이상하네. 그런 분이 형사한테 동생 장영두를 지목해서 수사해 달라고 했죠. 또 동생이 청부살인을 했다면서 탄원서도 제출했어요. 이중적인 행동 같은데요.”
내가 수사기록 속에 있는 사실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랬나요?”
장영목의 표정에 배신감이 떠올랐다. 아직 죽은 하 영감의 큰아들과 장영목 둘 사이에 유착관계의 조짐은 발견하지 못했다.
가을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도로가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얘기를 계속했다.
“어제 동생 면회를 갔었는데 며칠 전 검사가 동생을 불렀답니다. 검사가 ‘이제는 불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묻더라는 거예요. 그 말에 동생이 ‘살인청부를 받지 않았는데 뭘 대냐’고 했더니 검사가 ‘너 많이 똑똑해졌구나’ 하면서 빈정거리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동생 영두는 살인을 할 놈은 아닙니다. 같이 자란 저는 확실히 그 성격을 알아요. 더구나 청부살인이라뇨. 검사는 형인 제 집까지 압수수색하고 저도 조사를 했어요. 뭔가 관계가 있지 않느냐고요.”
검사는 배후인물을 검거할 결심이 굳은 것 같았다. 도로표지판이 발안과 안중 쪽으로 길이 갈리는 걸 알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길가의 들꽃들이 추워 보였다.
“동생 재판 때 방글라데시인 랭가의 말을 들어보면 계속 일관되고 있는데 동생 영두는 계속 이말 저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한번 면회 가서 말했죠. 그러니까 의심을 받는 거 아니냐고 일단 거짓말을 하거나 말실수를 했더라도 입에서 말이 나갔으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이죠.”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물었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말을 틀리게 했더라도 일단 입 밖으로 나가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했으면 그 책임을 져야지 번복하고 그러는 건 안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한번 거짓말을 했으면 계속 그렇게 가야 한다는 뜻입니까?”
내가 반문했다.
“죽이려고 공모를 하지 않았더라도 일단 검찰에서 그렇게 말을 했으면 계속 그 책임을 져야지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장영목이 내게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한번 틀린 말을 했다고 계속 그렇게 뻗으면 안 되죠. 진실을 말해야 하는 거죠.”
“아이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 집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누가 싫어도 절대로 싫다는 얘기를 하지 않아요. ‘이제 얼마나 볼 거라고?’라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해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내심을 반대로 해석하기도 해요. 우리 집안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치장에서 동생이 하는 말이 자기가 말하는 입하고 형사들의 듣는 귀가 다른 것 같다고 했어요. 우리 집안 어법이 그래요.”
나는 장영두의 어정쩡하고 독특한 표현법이 떠올랐다. 어느새 차는 마을로 들어섰다.
“저 집이 하 영감님이 죽은 집입니다.”
장영목이 살해현장을 가리켰다. 텅 빈 그 집은 동굴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