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이 사건을 사업자들 간의 이권 다툼 소송전 정도로 여기던 검찰에서도 업계 주변과 언론에서 잇달아 추가 의혹을 터뜨리자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검찰의 수사 의지가 거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일각의 비난에 대해 검찰은 “오히려 언론에서 너무 사건을 키우는 것 아니냐”며 발끈하고 있지만 핵심 당사자 두 사람이 현재 도피, 잠적 중인 상태여서 섣불리 사건의 성격을 예단하기도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이번 사건의 핵심 주역 두 사람은 탄현 사업의 시행사인 K 사의 대표 정 아무개 씨(48)와 K 사의 전신 H 사의 회장이었던 이 아무개 씨(46)다. 이들의 실체는 현재 알려진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은 지난 DJ 정권 당시 정·관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과 ‘경성 특혜 비리 사건’의 장본인들이었다.
업계 주변에서는 “대형 건설사업 비리를 주도했던 거물급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또 다시 탄현 사업을 이만큼 진행해 나갔다는 것 자체부터가 쇼킹한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더 의혹이 짙어가는 것은 이들이 아무런 걸림돌 없이 고양시 등 정·관계 관계자와 접촉을 했고 군인공제회와 은행 등으로부터 수백억 대의 대출을 받으며 탄탄대로의 사업을 벌여왔다는 점이다.
탄현 사업은 얼핏 대단히 복잡한 구도와 과정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업의 주연급 핵심 인사는 정 씨, 이 씨 외에도 함께 동업자적 관계였던 김 아무개 씨(44)까지 포함, 모두 세 명이다. 김 씨는 이 씨가 회장으로 있던 H 사의 부회장이었고, 정 씨에 앞서 K 사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여기에 조연급으로 K 사의 고문인 K 씨(50)가 등장한다.
이들 네 사람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구속 수감 중인 김 씨가 지난 9월 정 씨와 K 씨를 검찰에 고소하면서 탄현 사업 비리 의혹이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김 씨가 두 사람을 고소한 계기가 된 또 하나의 사건은 ‘K 사의 K 텔레콤 인수’건 때문이었다. 이 역시 탄현 사업과 얽혀 있다.
탄현 사업과 관련해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이 씨다. 그는 지난 98년 정치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경성 비리’ 사건의 주역이었다. 엄격히 말하면 탄현 사업은 경성 비리 사건에서 파생된 셈이다. 경성 비리 사건으로 4년의 수감생활을 마친 뒤 2002년 출소하면서 그는 당시 못 다한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H 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탄현 사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김 씨는 H 사 부회장으로 여기에 함께했다.
그런데 사업 자금 마련이 문제였다. ‘돈 되는 사업’임을 직감했음인지 건설 시행 사업에 일가견이 있던 정 씨와 K 씨가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이들은 각자의 지분을 갖고 사업에 함께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K 사의 법인등기부를 확인해 보면 지난해 4월 회사 이름을 H 사에서 지금의 K 사로 바꾸고 김 씨가 대표이사가 된다. K 사는 정 씨가 부사장으로 있던 유명 건축설계사인 K 건축의 이름과 같다. 업계에서는 K 사를 K 건축의 계열사로 보고 있다.
그보다 한 달 앞서 3월에는 김 씨와 K 씨가 ‘기업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인천 지역의 휴대폰 제조사인 K 텔레콤을 10억 원에 인수했다. 코스닥 상장사인 이 회사 명의로 579억 원어치의 약속어음을 발행해서 탄현 사업 자금으로 유용했다.
결국 이 횡령 혐의가 검찰에 의해 적발돼 김 씨는 지난해 9월 구속됐다. 그런데 김 씨가 법정 진술에서 “회장인 이 씨도 함께 범행을 공모했다”고 한 증언으로 인해 이 씨 역시 공범으로 같이 구속됐다. 김 씨는 징역 2년 6월을, 이 씨는 징역 3년 6월을 각각 선고받게 된다.
그런데 이 씨는 심장병 치료를 이유로 지난 3월 구속집행정지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도주했다. 그는 현재 수배 상태다. 이 씨는 도피 중인 상황에서도 지난 8월 김 씨를 위증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복역 중인 상태에서 또 고소까지 당한 김 씨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새로 대표이사가 된 정 씨 등에 의해 사실상 회사를 뺏긴 것으로 여겼다.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함께 일을 벌였는데 자신만 수감되고 오히려 사업은 정 씨 등에 의해 술술 풀려나가자 “바보같이 나만 당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그는 9월 정 씨와 K 씨를 횡령 및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그리고 지난 4일과 6일 정 씨에게 비자금 조성 혐의가 있다며 추가 고발했다.
▲ 기자가 K 사를 방문했을 때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 ||
광주 C 고 출신인 정 씨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이후 건축회사에서 일하면서 건설 시행 추진에 대한 정보와 감각을 익혀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 씨의 존재가 처음 언론지상에 소개된 것은 바로 2002년 분당 파크뷰 사건 때였다. 당시 의혹과 비리의 중심으로 분당 파크뷰의 시행사 에이치원 개발과 홍 아무개 회장에게만 집중됐던 탓에 설계사였던 K 건축의 정 씨 존재는 묻혀버렸다. 하지만 당시 특혜 의혹을 제기하는 등 성남시민모임을 이끌었던 이재명 변호사는 “에이치원 개발과 홍 회장에만 집중된 관심의 뒤편에 숨어 있었던 정 씨의 역할에 주목했어야 했다. 그는 당시 토지공사로부터 용역을 받아 실제 용도변경에 대한 실무를 담당하는 등 또 다른 주역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파크뷰 사업에 정 씨가 간여한 정도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것으로 밝혀졌다. 정 씨는 당시 파크뷰 설계 회사인 K 건축의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6개 하청업체에 설계비 과다계상을 요구, 1억 5600만 원을 챙겨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이 변호사의 지적처럼 정 씨는 이보다 앞서 파크뷰 부지의 용도변경 타당성 용역을 맡으면서 용역 대상 땅 일부를 사들이는 등 부지 용도 변경의 실질적인 배후 인물로 지목받았다. 용도변경 관련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땅을 사전에 구입했으리라는 의혹이 너무나 쉽게 도출된다.
정 씨가 지난해 6월 김 씨의 뒤를 이어 K 사의 대표이사가 되면서부터 탄현 사업은 갑자기 엔진을 단 듯 속도를 더해갔다. 그해 9월에 군인공제회로부터 3600억 원대를 대출받았고, 올해 4월에는 대형 건설사인 D 사와 시공사 계약을 체결했다. 5월에는 고양시와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양시의회가 주상복합아파트의 주거비율과 상업비율을 7 대 3에서 9 대 1로 조정하는 도시계획조례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6월에는 국민은행으로부터 6700억 원을 추가 대출받게 된다. 김 씨는 이 과정에서 정 씨가 수천억 원대의 회사 돈을 비자금으로 유용, 로비를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 로비 가능성도 지역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고양시의회가 중앙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업계 주변에서는 탄현 주상복합아파트 정도의 대단위 규모라면 시 차원이 아니라 도 차원에서 관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경기도에 대한 로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 분당 파크뷰의 경우에도 당시 홍 회장은 임창렬 지사에게 로비를 시도하기 위해 부인 주혜란 씨에게 금품을 전달하기도 했다.
호남 출신인 정 씨는 과거 DJ 정권의 실세였던 K 전 의원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K 전 의원 역시 분당 파크뷰 구설수에 휘말렸던 정치인이다. 이번 탄현 사업과 관련해서는 열린우리당의 광주 지역구 출신 A 의원과 한나라당의 경기도 지역구 출신 B 의원의 이름이 검찰 주변에서 거론되고 있다.
또 한 명의 주역인 이 씨는 K 사의 전신인 H 사의 회장으로 탄현 사업을 시작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가 최초에 탄현 사업을 구상한 것은 지난 98년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경성 비리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경성 비리 사건이란 DJ 정권 출범 직후인 98년 3월 정치권을 강타한 사건으로 공기업인 한국부동산신탁이 경성그룹에 1000억 원에 가까운 거액을 불법지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거졌다. 이를 위해 (주)경성 회장이었던 이 씨와 경성그룹 회장인 그의 친형이 거물급 정치인 및 전직 장관, 청와대 비서관 등 10여 명이 넘는 고위 인사들에게 로비를 벌여 한국부동산신탁에 압력을 넣었다는 것.
그런데 당시 경성그룹이 한국부동산신탁과 계약을 맺고 추진한 아파트 분양 사업이 바로 일산구 탄현동이다. 이를 위해 당시 경성은 탄현동에 상당한 필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경성 비리가 불거지고 경성그룹이 부도 처리되면서 엄청난 피해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당시 이 씨는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형을 대신해 경성그룹을 실질적으로 경영하면서 정치권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YS 정권 때에는 S 의원 등 상도동계 실세들과 가깝게 지내다가 98년 DJP 정권이 들어서자 동교동계와 자민련 중진급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하며 밀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외에 또 하나 주목할 곳이 있다. 국내 유명 건축설계사무소인 K 건축에도 이번 파문의 불똥이 튀고 있는 것. 정 씨는 현재도 이 회사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부사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탄현 사업을 추진했던 K 사도 사실상 K 건축의 계열사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설립된 지 1년밖에 안 된 신생 업체가 1조 원대가 넘는 대형 사업을 시행하게 된 것은 K 건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이 회사는 지난 98년 분당 파크뷰 파문 때에도 용도변경과 설계권 등을 맡으며 의혹이 부각된 바 있다. 탄현 사업에 이어 최근 새로운 의혹으로 부각되고 있는 화성 동탄 사업 역시 연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주변에서는 정 씨와 K 건축 회장인 양 아무개 씨와의 끈끈한 관계를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P 사가 화성 동탄 초고층 주상복합사업 시행사의 컨소시엄에 2대 주주(지분 26%)로 참여하고 있는데 회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P 사의 사장이 정 씨이고, 회장이 양 씨로 되어 있다.
<일요신문>은 K 건축에 양 회장 등 책임 있는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회사 측은 회의 등의 바쁜 일정을 이유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정 씨는 얼마 전에 퇴사했다. 현재 우리 회사 부사장이 아니다”라는 점만 애써 강조했다. 기자는 K 건축 인근에 위치한 K 사를 여러 차례 방문했으나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관리사무소 측은 “전에는 여자 직원들 몇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사무실에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 같다”고 밝혔다.
설립된 지 1년도 채 안 된 신생 업체가 전체 사업비 규모가 1조 원이 넘는 주상복합아파트 사업을 추진하면서 은행으로부터 6700억 원이라는 거액을 대출받은 데 대해서도 로비가 아니고서는 정상적인 형태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또한 사업 추진 과정에서 상당액을 비자금으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일각에서는 1000억 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정 씨는 분당 파크뷰 사건 때에도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검찰은 현재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원칙론을 밝히고 있으나 “의혹만 무성할 뿐 정확한 팩트가 없다”며 스스로 김을 빼는 느낌이 강하다는 지적이다. 핵심 의혹 대상자인 정 씨와 이 씨 검거만 이뤄지면 수사에 상당한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게 주변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