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가는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고 했다. 한국인 고용주가 욕을 하면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죽은 하 영감도 보통 독한 성격이 아니었다. 한 대 맞고 쓰러지면서도 ‘너 이 새끼 나한테 손을 댔지 한번 두고 봐’ 하는 독을 품은 강한 눈길을 랭가에게 보내더라고 했다. 랭가는 그걸 보고 올라타더니 목을 졸랐다고 했다. 성격이 강인한 두 사람이 만나 결국 살인으로 끝이 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장영두에게 정말 살인의 고의가 있었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다. 또 살인의 동기도 청부살인인지 아니면 우발적인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변호사로서 일단 장영두의 말을 믿기로 했다. 동시에 진실을 보려는 눈을 흐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항소이유서를 썼다. 그 핵심은 살인의 동기가 우발적일 수도 있다는 요지였다. 랭가가 영감을 살해하는 도중에 장영두가 가담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살인죄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선입견을 가진 검사가 많은 증거 부분을 자기 가설에 따라 꿰어 맞췄을 수도 있었다. 검사가 수사한 부분도 하나하나 다시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확인을 하는 방향으로 준비를 해갔다. 수사기관의 상상에 의해 범인이 만들어지는 수도 더러 있었다. 그 상상은 공명심과 사명감으로 채색될 때 광적인 한 인간의 마녀사냥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재판장이 된 판사를 사전에 알아보았다. 다행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법조계에서 천재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어떤 복잡한 사건이나 논문도 단번에 맥을 파악하고 결론을 내린다고 했다. 미남인 데다가 형제가 모두 고등법원의 부장판사라는 고위법관으로 출세한 집안이었다. 얼마 전 일간지에 그 형제법관으로 성공한 집안의 기사가 오르기도 했다.
나는 한편으로 안심이 됐다. 갖가지 인연으로 연결된 한국사회에서 안면이 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큰 차이가 났다. 더구나 그는 내가 군 법무장교 대위 시절 이웃 부대의 중위였다. 함께 부천에서 밥도 먹고 관사에서 밤새 고스톱도 친 적이 있었다. 다만 그후 이십여 년간은 개인적으로 그와 만난 적이 없었다.
어느새 그는 법조계의 대표주자로서 중추 노릇을 해내고 있었다. 언론은 그가 대한민국 최고 재벌회장의 형사 재판장인 것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 세계적인 기업회장의 인생이 달라질 상황이기도 했다. 그가 일심 판사의 판결에 대해서도 잘못된 점이 있다고 소신껏 발언을 한 걸 신문에서 봤었다.
그는 법원을 대표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얼마 전 신임 대법원장이 법원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검사의 수사기록을 던져 버리라”는 원색적인 말을 해서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밀실에서 작성된 조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검찰이 발끈하고 일어서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법원장은 변호사에 대해서도 “의뢰인의 돈을 받고 거짓말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변협에서도 항의가 잇따랐다.
둘 다 일부분에서는 일리 있는 비난이었다. 대법원장의 고교후배인 그는 쏟아지는 모든 비난을 대신 받으면서 대법원장을 보호하기도 했다.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검찰의 항의를 맞받아쳤다. 나는 거짓말해주는 변호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총명한 재판장이 조금만 사건의 이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진실은 당장 밝혀질 것 같았다. 얇은 인연의 끈이지만 좀 더 살펴줬으면 하는 은근한 기대마저 없지 않았다.
유별나게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는 8월 말이었다. 나는 변호인석에 앉아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법정 뒷벽 위에 찰싹 달라붙은 둥근 시계가 10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청석 앞줄에 독 오른 표정의 노파와 중년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죽은 하 영감의 가족들 같기도 했다. 피고인석의 장영두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까만 얼굴의 방글라데시인 랭가가 겁먹은 듯 튀어나온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손목에는 굵은 쇠사슬로 연결된 두 겹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윽고 10시가 되자 재판장이 바람을 몰 듯 들어왔다. 그를 뒤따라 재판경험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배석판사들이 들어왔다. 다만 표정들이 냉랭하게 굳어 있었다. 재판장이 기계적으로 성명, 주소, 생년월일 등 인적사항을 물었다.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장에게 말했다.
“먼저 한마디 했으면 합니다.”
나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 싸워야 할 쟁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모두진술이라고 해서 형사소송법은 검사나 변호사에게 그런 권리를 주고 있었다. 우발적이냐 청부살인이냐의 살인의 동기를 집중적으로 다툴 것을 명확히 말해둘 예정이었다.
“뭡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어쩐지 어조가 냉랭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건은 살인청부인지 아니면 우발적 살인인지를 판단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였다.
“잠깐.”
재판장이 단호하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진술 하지 마세요. 바로 피고인 신문을 하세요.”
재판장의 눈빛과 어조에서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차디찬 거부가 느껴졌다. 나는 순간 얼음물을 온몸에 뒤집어 쓴 느낌이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통역인이 왔다. 귀화한 방글라데시인이었다. 세로줄 무늬가 있는 푸른 양복 위로 햇볕에 탄 듯한 까만 얼굴이 보였다. 재판장이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에게 명령했다.
“한국인보다는 방글라데시의 원어를 더 잘하는 통역을 일부러 불렀습니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봐주지 말고 통역을 잘 해야 돼요.”
“알겠습니다.”
통역인이 겁먹은 표정이 되면서 대답했다. 그는 법원사무관이 내미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재판장이 피고인석의 랭가를 보고 물었다.
“피고인 랭가! 왜 항소했죠?”
통역으로 나온 방글라데시인이 랭가와 간단히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장영두가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하고 판사가 내 말은 안 듣고 그래서 항소했답니다.”
재판장이 통역에게 명령했다. 통역이 다시 어조가 높고 빠른 방글라데시어로 랭가와 말을 했다. 랭가는 손가락까지 하나 둘 꼽아 가면서 뭔가 열심히 설명했다. 이윽고 통역이 재판장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아들이 죽이라고 했는데 왜 그 아들은 안 잡아 오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영감을 죽인 건 인정한대요. 그렇지만 할아버지 아들이 시켜서 저질렀는데 왜 그 사람은 봐주냐는 거예요.”
통역인이 랭가의 말을 전했다.
“하, 나 참 이해를 못 하겠네. 장영두에게 돈을 받건 할아버지 아들에게 돈을 받건 죽이고 돈을 받기로 했으면 그게 중요하지 재판에 할아버지 아들이 잡혀 들어오지 않는 게 도대체 왜 불만인 거야? 돈만 받으면 되는 거잖아?”
재판장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머리가 좋은 그는 빨리 돌아가는 자기 법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보통사람들을 답답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재판장이 물었다.
“그 청부살인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나 물어봐요.”
재판장은 벌써 사건 중심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뭔가 확신하는 표정이 서린 것 같았다.
“장영두한테 들었답니다.”
통역이 대답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장이 나를 배제한 채 바로 옆에 있던 국선변호사에게 명령했다.
“랭가에 대해 신문하세요.”
랭가의 진술을 토대로 바로 청부살인의 유죄로 끝내려는 결정을 마음속에 내리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진행순서를 바꾸는 걸 보고 대충 짐작이 들었다. 내 옆에 있던 국선변호사가 서기에게 준비해온 신문사항이 적힌 서류를 건넸다. 서기는 그걸 재판장에게 올렸다. 옆으로 힐끗 랭가를 담당한 국선변호사의 신문사항이 보였다. 몇 개 되지 않아 2~3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국선변호사가 물었다.
“피고인 랭가는 공소사실을 다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지요?”
국선변호사가 아예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통역이 빠른 방글라데시말로 랭가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랭가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선변호사가 계속했다.
“피고인 랭가는 여러 차례 장영두로부터 하 영감님을 죽이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매번 거절했었지요?”
통역의 말을 알아들은 랭가가 그렇다고 했다.
“잠깐.”
미리 질문할 서류들을 훑은 재판장이 국선변호사를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변호인, 질문용지를 통역인에게도 주세요. 그걸 보고 하게.”
국선변호사가 질문이 적힌 서류를 한 장 통역인에게 주었다. 통역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재판장에게 얘기했다.
“나 한국 글자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 읽지 못한다는 소리야?”
재판장이 위압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재판장은 다시 국선변호사에게 질문을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국선변호사가 계속했다.
“이 사건 당시 피고인 랭가는 고정적인 일거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영두의 유혹에 넘어간 거지요?”
통역이 랭가와 뭔가 한참을 얘기했다. 이윽고 통역이 재판장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랭가가 하는 말이 감옥에 오래 있었더니 머리가 잘 안 돌아간대요. 일자리는 있었는데 돈 때문에 장영두 따라갔대요.”
재판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버럭 소리쳤다.
“이봐 통역! 마음대로 줄여서 전하지 말고 저 사람이 1분 말하면 1분간 통역하고 똑같이 하란 말야!”
통역인 방글라데시인이 바짝 얼어붙었다.
“장영두를 따라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걸 물어봐.”
재판장이 통역을 다그쳤다. 겁먹은 통역이 랭가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랭가가 열심히 통역에게 설명했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면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윽고 통역이 겁먹은 눈으로 재판장에게 전했다.
“처음부터 할아버지 아들이 시켜서 죽인 거래요. 차 안에서 장영두가 칼을 줘서 그걸 가지고 간 적도 있는데 그때는 사람이 많아서 못 죽이고 온 적도 있대요.”
국선변호사가 나머지 신문사항을 다시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변호인 그만하세요. 보니까 안 해도 되겠네.”
옆에서 보니까 세 개의 간단한 질문만 남았다. 시간도 몇 초면 충분했다. 국선변호사가 움찔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답답한 듯 재판장이 직접 나서서 묻기 시작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