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 ||
7년여 이상 굳건히 문이 잠겨 있는 펜트하우스가 곧 공개될 수도 있는 상황의 변화에 직면했다. 현재 힐튼호텔의 소유주인 싱가포르계 투자전문회사 (주)CDL호텔코리아(CDL)는 지난 5일 김 전 회장을 상대로 펜트하우스를 비워달라는 건물명도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현재 계약서상의 임대권자로 되어 있는 김 전 회장은 영어의 몸이다. “재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김 전 회장이 펜트하우스를 계속 고집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라는 대우 측 한 관계자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하루에 최소 1000여만 원 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고급 시설을 7년째 사장시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비난의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변수도 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김 전 회장에 대한 ‘4월 사면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최근 전직 대우그룹 고위 임원들 사이에서 “이대로 대우를 완전히 죽일 순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됐다는 전언이다.
당시 호텔 매각을 담당한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었던 김우일 전 상무는 지난 11일 기자에게 펜트하우스 매각 당시 비화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힐튼호텔을 팔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
▲당시 99년 초였는데 그때만 해도 대우가 몰락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DJ정권 출범 이후로 정부의 강력한 구조조정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대우로서도 상징적이나마 알짜기업을 매각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힐튼호텔은 그야말로 김 회장 부부가 애지중지하는 것이었기에 당시 내 입장에서도 상당히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매각 과정은 순조로웠나.
▲순조로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회장이 당시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하던 펜트하우스는 제외한 채 매각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펜트하우스는 어느 호텔이나 VIP용으로 사용하는 특별 객실이다. 그 사용료가 어마어마하다. 그런 알짜배기를 제외하고 호텔을 팔겠다고 하는데 누가 나서겠나. 내가 매각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그렇다면 펜트하우스만 임대하는 형식으로 이면계약을 맺어라’ 이렇게 된 것이다. 그나마 처음에는 영구임대를 주장했다가 그것 역시 매각의 걸림돌로 작용하자 25년 장기임대로 바꾼 것이다.
▲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사용하던 서울 힐튼호텔 펜트하우스를 두고 최근 소유주가 명도 청구소송을 제기해 귀추가 주목된다. | ||
▲김 회장의 업무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김 회장은 대우그룹 사옥인 대우센터에 회장실이 있었지만 그곳은 거의 이용하지 않고 펜트하우스만 이용했다. 당시 출퇴근이 따로 없이 하루 종일 집무실에서 먹고 자고 손님 맞기를 반복했던 회장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나도 당시 김 회장에게 결재를 받기 위해 대우센터에서 바로 연결된 힐튼호텔을 통해 펜트하우스를 수시로 오르내렸다. 또한 외부 인사나 외국 손님들이 방문할 때를 대비한 일종의 영빈관 역할도 겸한 셈이다.
―하루 사용료만 1000만 원이 넘는 펜트하우스를 328원이라는 가격에 사실상 무료로 장기임대한 셈인데 그런 조건이라면 호텔 매각 대금은 좀 손해를 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면이 좀 있었다. 당시 내 기억으로는 2억 달러가 좀 넘는 가격으로 매각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당시엔 대우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매입자 측에서도 대우와 관련된 방이 호텔에 남아 있는 것이 호텔 경영에 시너지 효과를 준다는 생각을 했을 법 하다.
―99년 10월 김 전 회장의 출국이 결국 장기 해외 도피로 이어졌는데.
▲당시로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회장의 부재 중에 다른 것도 아닌 펜트하우스를 함부로 처리할 순 없었다. 또한 엄연히 계약서상으로 장기임대가 보장되어 있었으니까.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일각에서는 김 전 회장이 갑작스레 출국을 한 탓에 중요한 업무 자료들이 고스란히 펜트하우스 내에 남아 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글쎄, 그것까지 내가 알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회장의 부재 기간 7년 동안 모든 서류들이 그대로 방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 싶다.
―김 전 회장은 CDL의 소송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현직을 떠났고 영어의 몸이 된 이상 명분상으로는 펜트하우스를 계속 고집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기왕에 법적으로 보장된 임대권이어서 먼저 나서서 돌려주겠다고 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한 마당이었는데 이런 소송이 제기됐으니 자연스럽게 돌려주는 모양새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한다.
김 전 상무의 얘기처럼 오늘날 펜트하우스가 어떤 모양새로 남아 있는지는 대우 관계자들조차도 아무도 모르고 있다. 김 전 회장의 해외 도피 기간 중에는 부인인 정희자 씨가 경영하는 (주)필코리아리미티드가 펜트하우스를 관리해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알려진 것과 달리 펜트하우스는 우리 회사가 관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했다. 힐튼호텔의 한 관계자 또한 “어느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대우 그룹의 전직 고위 관계자는 “얼마 전 김 전 회장의 병문안을 하고 나온 자리에서 몇몇 전직 임원들과 자연스럽게 ‘대우를 이대로 완전히 죽일 순 없다’는 의견을 나눴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대우건설이 금호그룹으로 인수되는 등 일부 건실한 대우 계열사들마저 다른 대기업에 모두 흡수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착잡함을 토로했다는 것. 특히 올해 새롭게 매각 대상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대우인터내셔널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도 제기됐다는 후문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대우그룹의 사실상의 모체로서 해외에 아직도 대우 브랜드 이미지가 남아 있는 상황이어서 종합무역상사가 없는 많은 대기업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의 사면설과 함께 대우 전직 임원 출신들의 대우에 대한 애착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대우의 상징적 존재인 펜트하우스의 향후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