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헌혈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한 인터넷 구인 게시판에 오른 ‘알바’(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다. 헌혈증이 아니라 대신 헌혈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같은 구인 광고를 낸 사람은 평범한 직장인 여성 이 아무개 씨(29). 그가 헌혈 알바를 구하는 이유는 은행 대출 때문이다. 일부 시중은행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헌혈증이 있으면 대출시 우대금리를 적용해주는 것이다. 올 봄에 결혼할 예정인 이 씨는 전세자금을 마련하면서 이자가 싼 대출을 위해 헌혈자를 구하고 나섰다.
이 씨의 구인광고에는 5명이 응모했다. 이 씨는 사진과 전화면접을 통해 키와 체중, 생김새 등이 자신과 비슷한 한 명을 낙점했다. 이렇게 선발돼 나온 사람은 김 아무개 씨(여·27). 이 씨보다 체형이 좀 더 통통하긴 했지만 신분증에 있는 그녀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 이들은 곧장 헌혈의 집으로 향했고 그후 이 씨는 김 씨로부터 자기 명의의 헌혈증을 건네받았다. ‘피의 대가’로 그녀가 제시한 돈은 10만 원. 김 씨로서도 어차피 헌혈 한 번 하려던 참이었는데 짭짤한 부수입을 올린 셈이다.
이 씨는 “혈액형이 같고 신청자 중에 가장 건강한 사람을 선발했다”며 “헌혈로 좋은 일도 하고 대출 이자까지 싸게 받았으니 일석이조 아니냐”고 말했다.
‘원잡’(One Job)으론 먹고살기 힘든 탓일까, 아니면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졌기 때문일까. 근래 들어 온갖 종류의 이색 ‘알바’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결혼식 하객이나 애인 대행은 이미 고전에 속한다. 게임 과외로 등록금을 버는 대학생도 있고 전문 대리 출석에 나선 휴학생도 있다. 대부분 직거래 방식이기 때문에 수수료를 낼 필요도 없다.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누구든 쉽게 사람을 구하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어 용돈벌이에 나선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다.
지난 여름 게임 과외로 재미가 쏠쏠했던 대학생 신 아무개 씨(22)는 올겨울에도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섰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각종 게임 관련 게시판을 옮겨 다니며 ‘과외’ 자리를 구했다.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 등 콘솔게임은 물론 PC로 이뤄지는 각종 온라인게임, 전략게임에 능통한 신 씨는 개시 첫날부터 마수걸이에 성공했다. 이날 하루 동안 신 씨가 게임을 가르쳐 주고 받은 돈은 3만 원. 한때 프로게이머까지 생각했던 그는 “좋아하는 오락도 실컷 하고 돈까지 벌 수 있어 매우 행복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주로 게임을 늦게 배우기 시작한 직장인과 동네 아저씨들을 상대로 과외를 진행하는 신 씨는 보통 게임에 필요한 기술과 전략 등을 하루 이틀에 걸쳐 집중적으로 가르쳐준다. 경험치를 높이는 방법, 쉽게 아이템을 획득하는 요령 등 그가 갖고 있는 모든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에게 게임 과외를 받은 사람들은 “며칠씩 혼자 헤매다 PC방 요금으로 돈 날리는 것보다 처음부터 강도 높게 ‘수련’하고 ‘하산’하는 것이 낫다”고 입을 모았다. 성격이 급한 일부 수험생을 만나는 경우 신 씨는 직접 레벨을 올려주기도 한다.
요리 과외도 일회용 알바의 대표적인 메뉴다. 최근 인터넷 게시판에 “음식 가르쳐주실 분을 찾습니다”란 글을 올린 이 아무개 씨(여·32)는 결혼 후 처음 맞는 시어머니 생신상을 차리기 위해 도우미를 구하고 있었다. 이 씨는 “처음 맞는 생신인데 대충 준비할 수는 없다”며 “평소 요리를 못해 걱정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요리도 배울 겸 함께 음식 장만해줄 분을 구한다”고 말했다.
대출 알바비는 시간당 5000원이 ‘정찰가격’이지만 들통 날 우려가 있는 경우는 ‘위험수당’까지 합쳐 1만 원을 받는다. 김 씨는 “대리 출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튀지 않는 외모”라며 “선생님이 눈치 채지 못하게 시선을 끌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자신의 노하우를 밝혔다. 그녀는 또 “돌발 상황에 대비한 위기관리 능력도 필수”라며 “예기치 못한 상황일수록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생들 사이에선 ‘리포트 대신 써주기’도 인기다. 대학생 유 아무개 씨(여·25)는 “15장짜리 리포트 두 편을 쓰는 데 알바를 고용했다”며 “갑작스런 도움이 필요할 경우 알바 직거래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유 씨는 또 “리포트 공유 사이트에서 돈 주고 사면 티가 많이 나기 때문에 돈 좀 더 주고라도 대신 써줄 사람을 구하는 게 백번 낫다”고 귀띔했다. 대리 리포트는 비단 대학생뿐만의 얘기는 아니다. 고등학생 장 아무개 군(19)도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생물학 관련 독후감을 써 달라”며 “책까지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알바생을 구하고 있었다.
연휴를 틈타 함께 여행갈 사람을 찾는 광고도 있다. 자신을 ‘매력녀’라고 밝힌 한 20대 여성은 인터넷 구인 게시판에서 3박4일 동해안 일주에 동참해줄 운전기사를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다. 여자 셋이 가는데 모두 운전면허증이 없다며 운전기사를 겸해 보디가드 역할을 해줄 남자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광고가 올라온 지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신청자가 몰려들었고 이튿날 ‘접수’가 마감됐다.
같은 게시판에선 아예 여행 파트너가 돼달라는 광고도 있었다. 남해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 아무개 씨(30)는 “친구와 둘이 가자니 너무 심심할 것 같다”며 “활발하고 분위기 잘 맞춰줄 수 있는 여성 2명을 구한다”고 밝혔다. 스스로를 ‘건전한 젠틀남’이라고 소개한 문 아무개 씨(32)도 “머리도 식힐 겸 해남의 바닷가에 가기로 했는데 건전하게 동행해줄 여성 1명을 찾고 있다”며 파트너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파트너 대행 등 알바는 불법 성매매의 온상이 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인터넷을 통해 애인대행 사이트를 개설해 놓고 아예 성매매를 부추기는 곳도 많다. 경찰 관계자는 “애인대행이나 술자리 친구 등 젊은 여성을 구하는 대다수 남성들의 경우 성매매가 목적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꼼꼼히 따져보고 구해야 후유증이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기업이나 공무원 등 고위급 퇴직자를 위한 ‘비서 알바’도 인기다. 실제 비서 역할이라기보다는 품위 유지용이다. 모임이나 외출시 운전기사 역할은 물론 비서 역할까지 대행해주는 것이다. 자기만을 위한 하루짜리 ‘김 기사’인 셈. 이와 함께 ‘목소리 비서’도 세트로 이뤄진다. 전화가 오면 비서로 등록된 여자 알바가 먼저 받아서 구인자에게 바꿔주는 식이다. 여비서의 역할은 전화를 대신 받아 돌려주는 것이 전부다.
이지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