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탈출극 두 번째는 실패
그는 67년 2월 군 창립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을 수행하며 행사를 보도했는데 김일성의 연설 내용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북한 사회에서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는 숙청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것이 결국 67년 3월 한국으로의 귀순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인텔리 급이었던 그의 귀순은 박정희 정권에도 대단한 호재였다. 그는 한국 정부의 각별한 배려 속에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자신을 한껏 체제 우위 선전용으로 써먹으려고 드는 중정에 그는 사사건건 반발했고 이 때문에 중정 감찰실장 B 씨와 잦은 마찰이 벌어졌다.
69년 1월 당시 월남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처조카 배경옥 씨(당시 29세) 가 잠깐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여권을 분실해 다시 여권을 재발급 받으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자신의 위조 여권을 부탁했다. “북한도 싫고, 남한도 싫다. 제3국으로 망명해서 북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와 함께 살고 싶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이모부가 측은했던 배 씨는 ‘오제녕’이란 이름의 위조여권을 만들어줬다.
69년 1월 27일 오후 이 씨는 서울 성북구 삼양동 자신의 집에서 나와 배 씨와 함께 오후 5시 반 김포발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배 씨 역시 자신의 사업장인 월남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북한 출신으로 출국 경험이 서툰 처이모부를 돕기 위해 함께 떠난 것. 중간 기착지인 홍콩에서 이 씨는 중립국인 스위스로, 자신은 월남으로 각각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수근 씨의 출국은 그를 감시하던 중정 요원은 물론 집에 있던 아내 이 아무개 씨도 전혀 몰랐다. 그는 한국 정부가 짝으로 맺어준 아내 이 씨도 믿지 못했던 것. 대신 이수근 씨는 함께 살고 있던 자신의 조카 김 아무개 씨에게만 한국 탈출을 귀띔했다.
중정이 이 씨의 탈출을 안 것은 하루 뒤인 28일 밤. 중정은 조카 김 씨를 추궁한 끝에 모든 전모를 파악하고 월남 대사관에 이수근 체포령을 내렸다. 이때가 29일 오후였다.
한편 이 씨와 배 씨는 28일 아침 홍콩에서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결국 하루를 더 묵고 이튿날 또 다른 중립국인 캄보디아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29일 아침 홍콩 카이탁 공항에서 이 씨는 한국 영사관 직원들에 발각되어 격투를 벌였고 홍콩 경찰에 체포됐다. 외교관 신분이었던 영사관 직원들은 곧 풀려났고 이 씨와 배 씨는 홍콩 경찰에 억류되어 있다가 31일 아침 캄보디아의 프놈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태워졌다.
하지만 이 비행기는 캄보디아 직항이 아니었다. 도중에 월남의 사이공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이 씨의 운명을 결정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정의 협조 요청을 받은 미국 CIA가 영국 정보기관과 연락해서 긴밀히 손을 썼을 것이란 게 정설이다.
무사히 프놈펜을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생각했지만 비행기는 사이공에 31일 오전 10시 15분경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의 중정 요원들은 당시에도 우왕좌왕했다. 여전히 이수근 일행이 홍콩 경찰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미국 CIA의 연락을 받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김 부장은 부랴부랴 월남에 있는 이대용 공사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가는 도중에 이미 비행기는 캄보디아를 향해 이륙할 판이었다. 이때 이 공사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월남의 티우 대통령에게 직접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월남의 대통령까지 동원된 긴박한 과정 끝에 이 공사는 사이공 공항의 비행기 내에서 초조하게 이륙만 기다리던 이 씨를 발견했다. 이 씨의 크나큰 불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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