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7년 북한을 탈출한 이수근 씨. | ||
그렇다면 과연 당시 중정은 왜 이수근 씨를 이렇게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이중간첩으로 몰아붙여 속전속결로 사형까지 집행했을까. 여기에는 1969년 당시 박정희 정권의 집권 야욕과 김형욱 중정부장의 권력 야욕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이 씨는 냉전 체제의 희생물이라기보다는 국내 정치권력의 희생물이 된 셈이다.
이수근 간첩 사건이 중정의 조작으로 결론나면서 그동안 물밑에서 꿈틀댔던 37년 전의 진실이 한꺼번에 화산처럼 분출하고 있다. 미처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 비화들도 숱하다. 이수근 씨는 69년 1월 한국을 탈출하기 직전 당시 제1야당의 당수에게 비밀 편지를 건네려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편지 속에는 ‘박정희 정권과 중정의 3선 개헌 계획’이 담겨 있었다. 만약 이 씨의 해외 탈출 기도가 성공했더라면 한국의 역사가 뒤바뀔 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수근=이중간첩’이라는 공식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통용되어 오던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파문의 돌을 던진 것은 1989년 <월간조선>의 보도였다. 당시 이 잡지는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크게 사회적 이슈로 불붙지 못했다. 여전히 군사정권의 부산물이었던 안기부(전 중정)가 서슬 퍼런 눈으로 감시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8년 전의 기사지만 당시의 <월간조선> 보도가 진실 규명에 큰 기폭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18년 전 당시의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배경옥 씨(67) 등 관계자들의 최근 증언을 통해서 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핵심 의문점을 4개 항목으로 다시 재정리했다. 배 씨는 이수근 씨의 처조카로 69년 당시 이 씨의 부탁을 받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것이 빌미가 돼 간첩으로 기소된 바 있다. 당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배 씨는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20년형으로 감형되어 89년 출소했다. 그는 사건 당사자인 이 씨와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 ‘이수근 간첩 조작 사건’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다.
▲이수근을 죽음으로 몬 것은 ‘3선 개헌’ 때문?
이 씨는 69년 1월 27일 서울을 탈출하기에 앞서 자신의 조카였던 김 아무개 씨(당시 22세로 Y대 재학)에게 편지 세 통을 건네주었다. 배 씨는 “한 통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또 한 통은 유진오 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나머지 한 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유 씨에게 보냈다는 편지였다. 당시 그는 제1야당인 신민당의 당수였다. 한국을 탈출하려 했던 귀순자가 야당 총재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이 편지는 이수근 씨가 스스로 자신의 목을 옥죄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편지에는 당시로서는 ‘천기누설’이 담겨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은밀히 추진하던 3선 개헌 계획이 담겨 있었던 것.
69년 1월은 박 대통령이 재선으로 6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1년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임기가 절반 이상이나 남은 시점에서 이미 박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를 중정에 은밀히 지시했다. 이 씨는 당시 중정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또 중정 인사들과 아주 밀접한 입장에 있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3선 개헌 계획을 듣게 된 것. 북한에서 기자 출신이었던 그로서는 은밀한 이 내용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던 직업욕구가 되살아났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탈출의 긴박한 상황에도 야당 총재에게 편지를 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편지는 이수근 씨의 해외 탈출이 실패로 끝나면서 완전히 사장돼 버렸다. 그리고 박 정권은 치밀하게 준비했던 3선 개헌 카드를 사건 발생 6개월 후인 그해 7월 8일 꺼내들었다. 공교롭게도 이 씨의 전격적인 사형 집행(7월 2일)이 있은 지 정확히 6일 후였다. 그리고 논란 끝에 69년 10월 국회에서 이 개헌안은 변칙 처리됐다.
▲‘중정 조작설’의 단초 제공자는 이수근 체포한 중정 월남 책임자
아이러니하게도 “이수근이 이중간첩이 아니다”라는 천기누설을 처음 입 밖에 낸 이는 바로 69년 1월 월남에서 그를 붙잡아 한국으로 압송해서 결과적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당시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 이대용 씨(82)였다. 그는 당시 현역 육군 준장으로 중앙정보부 월남 책임자로 있었다.
이 씨는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으로 있던 86년 어느 날 자신의 방에 찾아온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와 ‘이수근 간첩 사건에 대한 미 CIA의 역할’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불쑥 “이수근이 간첩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조 기자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어지는 이 씨의 대답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언젠가는 진실을 밝혀야 하는데… 그는 간첩이 아니다.” 흡사 기자와 취재원이 뒤바뀐 듯한 형국이었다.
▲ 김형욱 중정부장이 조작극을 지휘했다. | ||
충격적인 고백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서슬 퍼런 5공 정권이었기 때문에 ‘기자수첩’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고 이후 6공 정권이 들어서고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일면서 세상에 끄집어내졌다.
자신의 최초 고백이 단초가 돼 20년 만에 진실이 드러났지만 막상 사회적 이슈로 크게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함인지 오히려 지금의 이 씨는 매우 신중하다. 그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몇 년 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검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정보기관이라는 특수 공무 집행 중에 있었던 일은 외부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후 절대 외부에 말하지 않았고, 또 말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며 더 이상의 구체적 언급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이미 많은 자료를 다 갖고 있더라. 내가 특별히 더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라는 말로 자신이 최초 ‘중정 조작설’의 진실을 다 밝혔음을 우회적으로 인정했다.
▲김형욱이 죽느냐? 이수근이 죽느냐?
이수근 씨가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한국으로 귀순한 이후 다시 2년 만에 한국 사회에도 회의를 품고 제3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냉전 체제인 당시의 상황에서도 중차대한 일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형까지 이르게 할 만한 중죄는 전혀 아니었다. 이대용 씨나 당시 중정 관계자들조차 “이수근도 당시엔 한 2년 정도 징역살이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고 전한다. 배경옥 씨 또한 “내 죄라고 하면 여권위조를 도와준 것뿐이기 때문에 가벼운 죄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수했던 것이 오판이었다”고 후회했다.
김형욱 부장이 이 씨를 이중간첩으로 둔갑시켜 흡사 인민재판식의 ‘여론몰이’로 불과 6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까지 집행시킨 데에는 정국 전환용 카드와 함께 자신의 권력 야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그는 박 대통령과 여권으로부터 상당한 견제와 함께 경질 위기에 내몰렸다. 그런 상황에서 ‘체제 우위용’으로 한껏 선전했던 이수근의 해외 탈출 기도가 드러나게 되고, 또한 그의 해외 탈출을 사전에 막지 못한 중정의 패착이 알려지면 단순히 경질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날 수도 있었던 것.
결국 김 부장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만들어 빨리 죽이는 것이 내가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조작을 진두지휘했다는 것이 이번에 밝혀진 진실이다. 최근 배 씨 등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금껏 전해진 것과는 달리 실제 이수근 씨는 1심 사형 선고 이후 항소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중정 요원이 서대문형무소의 독방 앞에서 직접 감시하는 등 외부 접견을 철저히 차단했고 결국 배 씨 등과는 달리 이 씨는 항소조차 포기한 것으로 조작됐다는 것.
이 씨는 1심 사형 선고를 받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속전속결로 사형을 집행당했다. 그의 입속에는 ‘중정의 3선 개헌 계획’, ‘위장간첩 조작’ 등 엄청난 메머드급 화약고가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부장은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끝내 경질됐고 이후 박 정권에 칼을 들이댔다.
▲‘이수근 해외 망명 기도’의 원인은 한 중정 간부의 ‘과잉 충성’ 탓?
이수근 씨가 해외 탈출을 기도했다가 체포된 뒤 털어놓은 최초의 하소연은 “B 씨가 나를 일일이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심지어는 내 발을 향해 권총까지 발사했다. B 씨 때문에 괴로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B 씨에 대한 원한은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해외 탈출을 기도할 정도로 뼈에 사무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B 씨는 육사 출신으로 당시 중정 감찰실장이었다. 5·16 이전 모종의 사건으로 면직됐던 그는 이후 육사동기인 김 부장의 도움으로 중정에 들어갔다. 김 부장의 최측근으로 통했던 그는 ‘과잉 충성’이 지나쳐 중정 내부에서도 구설수에 오를 정도로 갖가지 무리수를 두는 행동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는 이대용 씨도 “그런 사람에게 이수근을 맡긴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며 ‘이수근 간첩’ 사건의 불행은 B 씨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이 씨 또한 탈출 직전 조카에게 전한 김 부장 앞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B 씨에 대한 불만만 가득 채웠다고 한다.
현재 B 씨는 해외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엉뚱하게도 그는 89년 한 여성지를 통해 자신의 이수근 씨에 대한 밀착 감시 전력을 자랑스럽게 밝히기도 했다.
“이수근의 집 맞은편에 2층 건물을 물색, 전세를 얻어 수사관을 거기 상주시켰다. 주야간용 적외선 망원경, 특수 카메라 등의 장비를 동원, 이수근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전화국 직원으로 가장한 수사관이 이수근의 집안으로 들어가 감쪽같이 도청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의 승용차 안에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전자음을 최대한 제거할 수 있는 특수 소형 마이크를 설치했다.”
또한 이수근 씨가 한국 정부의 소개로 만난 이 아무개 씨(여·당시 W대학 교수)와의 결혼 생활이 원만치 않았던 것도 한국을 등지게 된 한 원인으로 꼽힌다. 그는 “B 씨 등의 지나친 간섭으로 울분을 술로 달랬는데 아내는 그런 나를 오히려 냉대하기만 했다”고 밝혔다는 것. 현재 전 부인 이 씨는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