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보면 장영두 씨는 대출받은 돈이 연체되고 집이 경매될 상황이라 과수원 주인 하 영감을 죽이고 그 소유 땅을 처분하기로 계획했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대출금은 노력하면 내 능력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제가 남의 토지를 어떻게 처분할 수 있겠습니까? 영감님 땅은 100억 원대의 넓은 땅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남인 제가 어떻게 영감님 땅을 팔아먹을 수 있겠어요?”
“공범인 랭가는 살인 한 달 전에 죽은 영감님 집에 두 번이나 사전정찰을 갔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하 영감님 집 근처에 전에 살던 제 집이 있었습니다. 내 물건들이 거기 남아 있어서 갔습니다. 내 집에 내 물건 가지러 가는 게 무슨 정찰입니까?”
“하 영감님 집에 들어갈 때 흉기를 가지고 갔어요?”
죽은 영감은 항상 방 벽에 장전된 스웨덴제 공기총을 두고 있었다. 장영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살의가 있었다면 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다. “일할 때 쓰던 비닐봉지하고 테이프 가지고 들어갔어요.”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건 살인청부를 받은 범인들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죽은 영감님 집에 들어간 때가 낮이었죠?”
2억 원을 노린 살인청부업자의 침투 시점이 아니라는 걸 말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집은 창문이 열려 있었고 양쪽 옆은 도로였다. 지나가는 마을사람들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장영두의 스타렉스가 죽은 영감의 집 문 앞에 정차해 있었다.
“그렇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백세주를 샀던데 왜 그랬죠?”
은밀히 살인을 하려면 목격자가 없어야 했다.
“할아버지에게 그래도 인사로 선물을 드리려고요.”
“방글라데시인 랭가를 그 집으로 데려갔던 이유는요?”
“나도 사람을 부린다고 영감님한테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대충 장영두에 대한 신문을 끝냈다. 이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이봐 장영두! 외국인 랭가에게 할아버지를 죽이라고 했어?”
재판장의 눈에는 분노의 기운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부인하거나 헛소리를 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섬광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 적 없습니다.”
장영두가 낮은 어조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장영두의 표정에도 이미 단호한 어떤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러면 랭가는 왜 장영두가 청부살인을 시켰다고 할까?”
재판장의 질문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랭가가 자신도 불리해지면서까지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얘기였다. 이미 재판장은 랭가의 말을 확신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랭가는 지금 자기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장영두가 대답했다.
“랭가가 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나?”
재판장이 다시 물었다.
“제가 작년 과수원에서 방글라데시인 노동자들을 일 시킬 때였어요. 점심 먹고 쉬는 시간에 랭가가 방글라데시의 치안상태를 많이 말했습니다. 살인사건이 수시로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너희들 혹시 돈이라도 주면 사람을 죽여도 주겠네’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진심이 아니고 농담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 무렵 장영두의 마음은 하 영감을 죽여 버리고 싶은 분노도 있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농사짓던 배밭의 임대료를 두 배나 올려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영감은 그가 밭을 빌려 농사를 지을 때 개인운전이나 시장심부름까지 시키면서 앞으로 뭔가 해줄 듯 해줄 듯 기대를 주면서 그를 부렸었다고 했다. 장영두로서는 배신감과 증오가 생겼을 건 사실이었다.
“랭가에게 칼도 줬다면서?”
재판장이 물었다.
“제 차인 스타렉스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있습니다. 운전석 옆 공구박스 안에는 칼이 있었습니다. 길이가 7센티 정도 되는 접는 칼이었어요. 그걸로 배도 깎아먹고 했습니다. 전 살림살이를 차에 많이 싣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랭가는 제가 그 칼을 줬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기야 그 칼로 죽인 건 아니니까….”
재판장이 혼잣말처럼 질문을 끝냈다. 그때 옆에 있던 랭가의 국선변호사가 손을 쳐들으면서 말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세요.”
재판장이 승낙했다. 국선변호사가 랭가에게 물었다.
“랭가는 방글라데시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어떤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범죄전력이 없다는 걸 확인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재판장이 말을 가로 막았다.
“이봐요, 그거야 당연히 없다고 하겠지 그런 걸 왜 묻습니까?”
그때 랭가가 화가 난 표정으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뭔가?”
재판장이 물었다. 통역이 랭가와 얘기를 한 후 대답했다.
“장영두가 준 칼은 차 안 공구박스에 있던 게 아니고 조수석 바닥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저 친구 처음부터 한국말 다 알아듣고 있었잖아?”
“이보세요, 변호인. 뭘 그렇게 공책에 막 씁니까?”
재판장이 내가 메모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내뱉었다. 못마땅하고 짜증스런 얼굴이었다.
“랭가의 답변을 적고 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불쾌감이 떠올랐다. 변호사들은 법정에서의 일들을 저마다 간단히 기록하는 게 보통이었다. 재판장의 과민한 반응 같았다.
“법원의 공판조서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 말입니까?”
재판장의 말은 완전히 시비조인 것 같았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나를 모욕하고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나름대로 매일의 일들을 업무일지같이 적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법정에서 변론한 사건을 수십 권의 공책에 써 왔습니다. 왜 그게 재판장님에게 지적당하고 불쾌한 사항이 되는지 이해하지를 못하겠습니다. 그 업무일지들까지 다 가져다 입증을 해야 할까요?”
내가 재판장에게 말했다. 변호사로서 자기의 권리는 자기가 찾아야 했다. 봐주지 않을까봐 비굴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 경우 사임하면 되는 것이다.
“하여튼 탐탁지 않다는 말입니다.”
재판장은 자신의 심기를 있는 그대로 툭 내뱉었다. 아무리 재판장이라도 개인적인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지나친 것 같았다. 나는 사법부와 법의 권위에 복종하는 거지 한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아니었다. 천재성을 가진 판사들을 보면 특이한 습성이 있었다. 자기가 결론지은 것과 다른 방향의 말들이 나오면 즉각 거부반응이 나왔다. 또 머리회전이 느린 다른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 신문할 사항이 없죠? 이제 증거조사로 들어갑니다.”
재판장이 일방적인 재판 종료 선언을 했다. 이미 심증이 굳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결론을 내겠다는 행동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더 물을 게 있는데요. 공범인 랭가를 신문하고 싶습니다.”
“어떤 걸요?”
재판장은 계속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다.
“2억 원대의 살인청부 범인치고 너무 엉성한 면이 많습니다. 현장에 칼도 있고 둔기도 있는데 랭가는 주먹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시체도 치우지 않고 그냥 도망을 쳤습니다. 정말 살인청부가 맞는지 의문이 많습니다. 그런 걸 랭가와 따져봐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재판장과는 다른 의견이었다. 재판은 천재가 수학문제를 풀듯이 수사기록만 보고 형량을 정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또 우수한 머리보다는 판사의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이 더 훌륭한 판관을 만든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물으시려고요?”
재판장의 내게 물었다.
“어떻게 묻다뇨?”
내가 되물었다. 변호사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패턴들이 있었다. 엉뚱한 질문 같았다.
“상피고인으로 물을 수도 있고 증인으로 물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 종류의 신문방법이 법에 있죠.”
재판장이 빙긋이 웃었다. 소송법 지식을 가지고 나를 혼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형식도 상관없습니다. 진실만 물을 수 있다면. 선택을 하라면 상피고인으로서 묻겠습니다.”
고시공부 할 때 법률책에서 논문들을 열심히 봤던 대목이었다. 재판장의 뇌리에는 그 지식들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이보세요, 변호인. 앞으로 입증계획이 어떻습니까?”
재판장이 나를 보면서 다시 물었다.
“피해자인 죽은 영감의 아들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죽은 영감의 아들을요?”
재판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비호해야 할 아들을 법정으로 끌어온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 같다는 눈치였다. 내가 재판장을 보면서 말했다.
“장영두에게 일심에서 내린 징역 15년이나 지금 검사가 주장하는 무기징역형은 사실상 청부살인에 대한 형량입니다. 과연 그런 형을 받을 만한 청부살인인지 아닌지 변호사로서도 진실을 밝히고 싶습니다.”
“허, 그거 참.”
재판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나는 전혀 다른 선입견을 가진 듯한 재판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판장의 강하고 일방적인 소송 진행을 보면서 한 가지 새로운 의식이 떠올랐다. 권위의식이나 선입견과 싸우는 것도 변호사의 임무란 발견이었다.
“랭가에 대한 신문사항을 준비했는데 허락하시겠습니까?”
내가 재판장에게 말했다. 사정에 따라 다음 재판기일에 해도 되고 몇 달 후에 해도 상관없었다. 일단 질문의 기회는 싸우더라도 확보해 두어야 했다.
“지금 뒤에서 기다리는 변호인들이 많이 계시는데 혼자만 재판받는 게 아니잖아요?”
재판장이 질타하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 아니고 언제든지 좋다는 겁니다.”
“정 그러면 좋습니다. 신문은 3주 후 오후 3시 30분으로 하겠습니다. 제일 마지막 사건으로 돌려서 하는 겁니다.”
재판장이 인심을 썼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재판장 역시 누구보다도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같이 밝혀 보도록 하십시다.”
재판장의 태도가 바뀌고 있었다. 길이 열리고 있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