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록은 그의 말만 그대로 적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대사관을 통해 현지에 확인한 바도 없었다. 어쩌면 랭가라는 실존 인물이 전혀 다른 도시에서 버젓이 활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앞에 있는 랭가의 눈빛을 볼 때마다 섬뜩하다. 눈에 비치는 붉은 기운은 살기가 틀림없었다. 그의 정체부터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고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어요?”
내가 물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칼리지까지 나왔어요. 싸이컬러지를 공부했어요. 학교에서 축구하고 크리켓을 했어요.”
전문대학 출신에 운동도 많이 했다. 심리학 전공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직업이 뭐였어요?”
그는 이미 능숙하게 한국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그만 옷장사를 했어요. 내가 장남이고 여동생이 두 명, 남동생이 세 명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친구들이 사기 쳐서 아버지 돈을 다 가져가 버렸어요. 우리 집은 거지가 된 거죠. 그래서 내가 돈 벌기 위해 나섰어요. 말레이시아하고 한국을 생각 했어요. 그러다 한국이 돈을 더 벌 것 같아서 들어왔어요.”
“고향에 있는 가족한테 연락했어요?”
“안 했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여기 와서 사건 낸 거 알면 ‘넌 내 아들 아니야’라고 욕할 거예요. 동생도 지금은 여기 한국에 와 있는데 불법체류 때문에 걸릴까봐 면회 못 오고 있어요.”
그가 가족 생각이 나는지 말을 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꺽꺽 울고 있었다.
“이 사건의 진실이 뭔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물었다.
“나 여태까지 한 번도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죽여주면 그 아들이 돈 준다고 했어요.”
그의 얼굴에는 확신의 표정이 어렸다.
“그게 확실해요? 장영두는 처음에 농담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물었다.
“그건 맞아요. 배 밭에서 장영두가 우리 일꾼들한테 할아버지 얘기를 했어요. 할아버지는 아무나 보고 ‘야, 이 새끼야 이리와 봐’ 하는 식으로 욕하고 무시한대요. 그러면서 장영두가 그 할아버지는 ‘씨발 놈 나쁜 놈’이라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깜둥이 새끼라고 욕하고 무시하는 바람에 주먹으로 깐 건 아니에요?”
내가 랭가에게 물었다. 그는 몽골인이 기도를 방해한다고 때려서 혼자 징벌방에도 갔다 왔다.
“그게 아니에요. 죽이러 갔어요. 할아버지가 나더러 깜둥이라고 욕한 적은 없어요.”
중요한 핵심이었다. 두 사람의 말이 전혀 상반된 부분이었다. 랭가는 그렇게 말하는 편이 차라리 동정을 얻을 수 있는데도 단호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며칠 전 통역은 랭가가 돈을 받기 위해 함께 절벽에 떨어져 죽는 물귀신 작전을 펴는 것같이 말을 했었다.
“왜 도망가지 않았어요?”
내가 물었다.
“도망가면 당장 의심을 받고 추적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경찰이 와도 내가 그런 일 없다고 부인하면 증거가 없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
갑자기 그의 말투가 매끄러워졌다. 게다가 법률용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했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그는 상당한 지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장영두의 휴대폰에서 죽은 영감과의 통화기록을 먼저 지우기도 했었다. 그가 계속했다.
“사실 할아버지 죽인 다음날 비행기 티켓을 사서 삼일 후쯤 방글라데시로 얼마든지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장영두가 나보고 자기가 잡혀도 너는 사건에 관여됐다고 말을 안 할 테니 안심하고 있으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도망 안 가고 집에 있었는데 장영두가 형사들 데리고 와서 나를 잡았어요. 장영두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
랭가는 장영두에게 이를 가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장영두가 갑자기 자수를 하고 변심해서 랭가를 체포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장영두의 자백으로 잡힌 랭가가 청부살인이었다고 하는 새로운 진술을 하는 바람에 둘 다 중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게 이 사건의 특이한 점이었다. 왜 그랬을까?
“할아버지를 어떻게 죽이려고 계획했었죠?”
내가 수첩을 꺼내 기록하기 시작했다. 랭가는 배신에 대한 복수로 사실을 털어놓았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랭가가 긴 검은 팔을 뻗어서 내 수첩과 볼펜을 빼앗아 갔다.
“이거 보세요.”
“여기 ‘에이’가 죽이라고 한 할아버지 아들, ‘비’가 장영두, 그리고 ‘씨’가 나, 그리고 ‘디’는 돈 받으면 방글라데시에 달러를 송금해 줄 사람이에요.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세 번 정찰 갔어요. 세 번 다 칼도 가지고 갔어요. 첫 번째 정찰 갔을 때 앞집에 사람이 있었고 배 밭에도 사람이 세 명 있었어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두 번째 갔을 때 그 근처에 있는 장영두 친구 집에 갔지만 사실 정찰하러 간 거예요. 그때 배 밭 사이로 가로 질러서 할아버지 집에 몰래 간 적도 있어요.”
랭가는 다시 수첩의 한 페이지에 과수원 부근의 약도를 그렸다. 그는 자기가 갔던 집과 죽은 영감집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직사각형의 과수원에 사선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상당히 자세하고 현실적이었다. 신뢰가 갔다. 그가 계속했다.
“할아버지 집 근처에 있는 장영두 친구 집에 갔을 때 일을 조금 해 주고 그 집에 있었어요. 그 집에서 여자가 김치찌개 만드는데 나 그거 맛있어서 배우려고 열심히 봤어요.”
그 집이란 내가 찾아갔던 김일식의 숙소였다. 예전에 장영두가 축사였던 그곳을 개조해서 살았었다. 랭가가 계속했다.
“할아버지 죽여주면 2억 원 준다는 거 백퍼센트 사실이에요. 장영두는 1월 12일쯤 나한테 물었어요. ‘그 돈을 받으면 아파트가 좋아? 빌라가 좋아? 어떤 거 살 거야?’라고 물었어요. 내가 빌라가 좋다고 대답했어요. 장영두가 그 다음에는 ‘한국여자 좋아?’ 하고 물었어요. 나 한국여자 싫다고 했어요. 마지막에 장영두는 2억 원을 받으면 자기한테 500만 원을 떼 달라고 했어요.”
랭가의 살인에 대한 얘기는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그의 말에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랭가는 이런 얘기도 했다.
“장영두가 법원으로 가서 할아버지 땅 서류 뗐어요. 나 그때 장영두 차 안에서 등받이 눕히지 않고 그냥 기다리면서 보고 있었어요. 장영두가 할아버지 땅 서류 네 장 뗐어요. 평택법원 두 번째 갔을 때 장영두 엄마도 와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한 명 있었어요. 그 여자는 ‘어머 세상에, 어머 세상에’라고 그런 말 잘하는 여자예요. 어디선가 본 사람이에요. 그날 장영두하고 중국집에서 짬뽕하고 볶음밥 먹었어요.”
랭가는 사전에 그들 사이에 땅을 뺏을 어떤 모의가 진행 중이라는 걸 설명하려는 것 같았다. 말은 더듬거리지만 묘사는 정확했다. 그래서 검사는 강도의 혐의도 공소장에 기록한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장영두가 영감을 죽이고 땅을 판다는 건 불가능했다.
“할아버지를 어떻게 죽였어요?”
내가 물었다. 장영두의 말과 하나하나 비교하고 싶었다.
“변호사님 잠깐 일어나 보세요.”
랭가가 나보고 말했다. 내가 일어났다. 그가 옆으로 다가와 내 옆에 섰다. 말이 잘 안 되니까 행동으로 내게 당시 상황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장영두의 역할이다.
“내가 뒤따라갔는데 거실에 들어가서 장영두가 나를 할아버지한테 소개하면서 옆으로 나를 보면서 이렇게 했어요.”
랭가가 나를 보면서 눈을 꿈쩍거렸다. 이어서 그는 기다란 팔로 내 옆구리를 두르고는 손가락 끝으로 등을 살짝 찔렀다. 장영두가 랭가에게 그렇게 했다는 의미였다. 랭가가 다시 돌아서서 나를 보고 말했다.
“내가 할아버지를 주먹으로 때려서 쓰러뜨렸어요. 그때 장영두가 할아버지 발을 잡고 ‘에이 씨발 놈’ 하고 욕을 하면서 나보고 ‘빨리 죽여’라고 소리쳤어요. 그리고 장영두가 할아버지 두 번 찼어요.”
그가 답답한지 다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반보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한쪽 발을 무예 동작을 하듯 번쩍 든 채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장영두가 할아버지 머리 이렇게 한 번 찼어요.”
그는 발뒤꿈치로 사람의 머리를 찍는 흉내를 냈다.
“그때 할아버지 코에서 피 흘렀어요.”
랭가는 양손가락을 자기 콧구멍에 대고 피가 흘러나오는 흉내를 냈다. 그가 계속 설명했다.
“장영두가 할아버지 머리를 발로 다시 한 번 찍었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기절했어요.”
그는 다시 한번 발을 번쩍 들어 이마를 찍는 모습을 했다. 동시에 고개를 옆으로 픽 쓰러뜨리면서 기절하는 흉내를 냈다. 일인 다역의 모노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사건 현장의 모습은 랭가가 명확히 표현하고 있었다. 보통 살인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지우고들 싶어 했다. 그런데 랭가는 너무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다. 랭가의 눈에 도는 핏빛 살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전에 방글라데시에서 사람 죽여본 적 있죠?”
내가 물었다.
“사실 저 마약 해봤어요. 그런데 사람은 안 죽였어요.”
그가 고개를 흔들면서 부인했다.
“뒤에서 누가 시켜서 할아버지를 죽인 건 맞아요?”
내가 청부살인의 점을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들이 시켜서 죽인 건 백퍼센트 사실이에요.”
“아들이 둘인데 어떤 아들이 시켰어요?”
내가 물었다.
“어느 아들인지 그건 장영두한테 안 물어봤어요.”
“검사한테 살인을 시킨 그 아들이 나이가 많고 빚이 있다고 했죠? 맞아요?”
내가 물었다.
“장영두가 한 아들은 부잔데 살인시킨 그 아들만 빚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 사람을 형이라고 부른다고 했어요.”
죽은 영감의 두 아들 중 동생은 빚이 없다고 했다. 큰아들은 빚이 수십억 된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큰아들이라는 소리였다. 랭가가 주위 눈치를 보더니 비밀을 털어놓듯 이렇게 덧붙였다.
“장영두가 할아버지 죽이고 나서 얼마 있다가 한 사람 더 죽여 달라고 했어요. 내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농담이라고 그래요. 할아버지 죽이자는 것도 농담, 전부 농담, 농담 하면서 할아버지 죽였어요. 할아버지 아들이 돈 안 주니까 다시 죽이자고 한 것 같아요.”
나는 랭가의 세부적인 얘기들을 들으면서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