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실에서 장영두를 만났을 때 사실대로 다 얘기하자고 그랬어요. 나 빨리 방글라데시 우리 가족한테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장영두가 그렇게 얘기하면 둘 다 죽는다고 했어요. 그래도 검사한테 나 사실대로 다 말했어요. 그랬더니 검사가 나 착하다고 밥 먹고 먼저 가라고 했어요.”
확신을 가지고 하는 랭가의 말을 나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아들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랭가의 얼굴에는 살인교사범을 꼭 잡아야 하겠다는 결의가 굳어 있었다. 검사는 랭가의 말을 믿고 공소장에 강도 혐의와 청부살인 혐의를 적어놓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걸 추적해서 수사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랭가의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증거가 없었다.
나는 일단 랭가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변호사라고 장영두의 말만 맹신하면 진실을 그르칠 수 있는 것이다. 검사가 하지 않으면 나라도 법정에 두 아들을 내세워 끝까지 추궁해 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두 아들에게서 청부살인의 의심이 없어지면 장영두에 대한 좋은 변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랭가의 머릿속에 있는 사실들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입력됐는지도 좀 더 살펴야 할 것 같았다.
“면회 오는 사람 없어요?”
내가 물었다. 다른 나라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는 그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아무도 면회 오지 않아요.”
“동생이 한국에 있다면서?”
“동생도 불법체류라 오지 못해요.”
“내가 작지만 영치금을 넣어줄게요.”
내가 말했다. 그 말에 랭가는 이슬람식으로 양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눈빛이 애절했다. 내가 접견을 끝냈다고 담당 교도관에게 말하자 랭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어느새 접견실 벽에 걸린 둥근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사무를 보는 교도관의 자리로 가서 말했다.
“지금 장영두를 불러주셨으면 하는데요.”
교도관의 눈길이 벽시계 쪽으로 갔다. 퇴근시간이 가까운데 이제 시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불만의 빛이 스쳐갔다.
“미안합니다. 봐주세요.”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얼굴 두꺼운 인사를 했다. 검사는 수사권을 가지고 시간 제한 없이 사람들을 부르고 경찰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에 대응하려면 공권력이 없는 변호사로서는 집념과 두꺼운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물러서지 않자 교도관이 멋쩍은 듯 씩 웃더니 할 수 없이 전표를 뗐다. 마치 식당의 음식주문같이 수감번호가 적힌 전표를 대기하고 선 경교대원에게 주면 재소자를 불러내 오는 것이다.
나는 접견실에 앉아 기다렸다. 무거운 공기가 답답했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철창 앞 화단의 후박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10여 분쯤 기다리자 장영두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랭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장영두가 내게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순간 고와 보이지 않았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누가 범인이라는 힌트가 있고 암시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전혀 감을 잡기 힘들었다. 거짓말을 한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말이 진실이라고 버티는 게 일반적이었다. 내가 앞에 앉은 장영두에게 물었다.
“랭가가 왜 할아버지 아들이 살인을 시켰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 더 불리해지는데 말이죠?”
랭가의 확신은 절대적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검사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랭가를 회유한 것 같아요. 그렇게 끝까지 진술하면 방글라데시로 돌려보내준다고 검사가 속였을 것 같아요. 랭가 바보 같은 놈이 검사가 꾀는 그 말을 끝까지 믿고 저러지 않나 모르겠어요. 그게 둘 다 죽는 지름길인데요.”
장영두의 눈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에 대해 그렇게 더 불리하게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랭가는 자기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하는 것보다 내가 시켜서 심부름만 했다고 하는 게 가벼운 줄 알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게 말이 됩니까? 우발적으로 죽였다면 과실치사죄로 가볍고 청부살인이면 살인죄의 공동정범인데.”
“검사님도 그 비슷한 소리를 하던데 검사같이 많이 배운 사람 상식하고 못 배운 저희 같은 놈 생각이 같은가요, 뭐?”
장영두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랭가와 장영두 그리고 법조인들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장영두가 체념조로 말을 이었다.
“검사한테 다시 불려갔었다면서요?”
내가 그의 형한테서 들은 얘기를 다시 꺼내어 물었다.
“예. 검사실에 갔더니 검사가 나보고 많이 변했다고 그래요. 이제는 순진하게 떨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검사보고 ‘이제 변해야 하지 않겠수?’라고 했죠. 검사님은 청부살인죄로 똘똘 묶고 변호사는 그저 비굴하게 기고 판사는 검사가 요구한 그대로 판결을 때리고 하니 어떻게 안 변할 수 있느냐고 덤벼들었죠. 이제 검사에게 더 봐달라고 할 것도 없는 거 아닙니까? 내가 오히려 검사에게 한마디 해 줬어요. ‘봐주는 척하면서 부대항소까지 해서 날 무기징역에 처하라고 했다면서요’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검사가 얼버무리더라고요.”
장영두의 얼굴에는 반항기가 가득했다. 속았다는 표정도 들어 있었다.
“조서에는 말이 흔들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백을 한 걸로 되어 있던데?”
내가 물었다.
“흔들린 것도 없어요. 검사가 그렇게 쓴 거죠. 포승에 몸이 꽁꽁 묶여서 밤 10시까지 조사받았어요. 검사가 마지막에 프린트한 조서를 여러 장 내놓고 손도장 찍으라고 하는데 묶인 채 어떻게 봅니까? 맨 뒷장 뒤척이는 시늉만 냈지요. 검사랑 서기 그리고 여직원이 모두 피곤해 하는데 거기서 어떻게 서류들을 보자고 할 수 있어요? 찍으라는 대로 찍었죠.”
장영두에게서도 범죄를 부인하는 교활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영두가 잠시 우울한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이번에 검사한테 불려가니까 검사 눈치가 이제는 진짜 상황을 아는 것 같아요. 청부살인을 확신했다가 이제는 아닐 수도 있구나 하는 것 같았어요. 눈동자가 흔들리고 표정이 불안한 듯했어요.”
장영두의 얼굴에는 검사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랭가의 화석 같은 말이 가슴속에 있었던 나는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랭가의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거죠? 장영두의 거짓말에서 온 건가? 아니면 다른 데서 온 건가?”
“제 생각으로는 형사나 검사가 청부살인이나 강도를 의심하면서 계속 이럴 수도 있지 않느냐 물었는데 그게 기정사실로 바뀐 거 같아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반복해서 묻는 과정에서 랭가가 세뇌된 거 아닌가 합니다. 저도 처음에 겁먹고 있을 때 형사나 검사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자꾸만 얘기하니까 나중에는 마치 내가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랭가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검사도 역시 자기가 의심을 한 거를 반복해서 물어보다가 랭가나 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인정하니까 자기 의심이 이번에는 확신이 된 거죠. 감옥 안에서 뒤늦게 곰곰이 생각하니까 그래요. 검사까지 모두 최면에 걸린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검사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생사람을 청부살인범이나 강도로 몰겠어요?”
장영두의 말과 같은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집중적으로 여러 번 조사를 받고 엉뚱한 조서를 쓰면 나중에는 자기 행동은 망각하고 조서상의 내용을 자기가 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난 장영두의 청부살인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고 넘겨짚으면서 그를 더 추궁해 갔다.
“장영두 씨, 혹시 가난한 집안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요?”
큰아들의 부탁을 받고 죽인 게 아니냐는 간접적인 질문이었다. 그가 단번에 뜻을 알아채고 펄쩍 뛰면서 말했다.
“아이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집에서 나 혼자만 일해도 얼마든지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저 그렇게 남의 돈 탐내는 사람 아니에요.”
“죽은 영감의 아들 중에서 말을 해 본 사람은 누구예요?”
“둘째아들이 검사실에 있는 저한테 와서 살인청부한 사람을 털어놓으면 합의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형이 끝장날 거라고 말이죠. 그렇지만 뭐 털어놓을 게 있어야죠?”
만약 살인청부가 사실이라면 큰아들이라는 소리였다.
“지금 분위기는 장영두가 아들 중 한 사람이라도 찍어 말하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살인교사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을 상황이네.”
사실이었다. 검찰의 선입견은 바위같이 굳었다. 랭가의 진술이 있었다. 이제 장영두의 말 한마디면 죽은 영감의 아들은 청부살인을 한 범인의 올가미를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지금까지 장영두는 상황에 따라 적당히 말을 하고 있었다.
“하 영감이 죽으면 상속받는 사람이 누구죠?”
내가 물었다.
“둘째아들이었어요. 할아버지 재산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권한은 둘째아들 하교식에게 있어요. 재산도 전부 둘째아들한테 가게 돼 있죠.”
“그런 둘째아들이 범인을 얘기해 주면 합의서를 써 주겠다고 검사실에서 말했단 말이죠?”
“그랬어요.”
난 둘째아들이 피해자가족으로 경찰에 와서 처음 한 진술이 기록된 조서를 가방에서 꺼냈다.
“여기 둘째아들 하교식이 한 진술을 보면 형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수사해 달라고 부탁했던데, 그리고 탄원서에도 역시 비슷한 내용을 써서 내고.”
“그런가요?”
장영두가 처음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큰아들은 어때요? 알아요?”
내가 말했다.
“한두 번 멀리서 봤는데 유순한 것 같아요.”
나는 다시 큰아들이 경찰에 가서 진술한 조서를 장영두에게 내보였다.
“여기 보면 큰아들은 아버지가 죽고 경찰서에 가서 범인은 아무래도 가까이 지내던 장영두 같으니까 조사해 달라고 했던데 알고 있었어요?”
“그랬어요? 난 몰랐는데….”
장영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큰아들이 살인교사범이라면 굳이 장영두를 특정해서 수사해달라고 형사에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둘째아들이 이제 법정에 등장할 차례였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