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죽은 영감의 둘째아들을 증인으로 신문을 하는 날이다. 어쩌면 나는 살인을 청부한 배후인물과 전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목숨을 걸고 도망가는 자였다. 나는 열심히 쫓아가는 입장이었다. 장영두의 입을 지금까지도 다물게 하는 인물이라면 지독히 교활한 성품일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까지 살인을 한 잔인한 인물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사람과 싸우는 이 재판의 가장 힘든 순간일 것 같았다.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일곱 명가량의 방청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백발의 노파가 쐐기 눈으로 재판장을 살피고 있었다. 그 옆에 딸같이 보이는 사십대쯤의 여자가 노파의 갈퀴 같은 손을 잡고 있었다. 죽은 영감의 부인과 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저는 강간을 당한 일이 없는데요.”
증인인 여자가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아마도 강간범이 범죄를 부인하니까 검사가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했던 것 같았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던 대머리 남자의 얼굴에서 묘한 미소가 스쳤다.
“아니 유일한 증인이면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합니까?”
검사가 화난 얼굴로 얼굴이 벌게지면서 소리쳤다. 민주화가 되면서 고문이 많이 없어졌다. 그 틈에서 교활한 말장난이 활개치고 있기도 했다. 몽둥이 없는 세상에서 판검사는 말장난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검사가 계속했다.
“은밀한 장소에서 둘 사이에서만 일어났던 강간사건입니다. 여자가 처음에 강간당했다고 하다가 지금 이 법정에 와서 말을 바꾸어 그런 일 없었다고 하면 도대체 검찰에서 어떻게 입증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검사는 못해먹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말장난이 난무하는 법정에서 뭐가 진짜인지를 구별하기는 하나님도 힘들 것 같았다. 검사가 작성한 조서 역시 그랬다. 장영두 사건도 그가 조금 있다가 아들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시켰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아들의 운명은 그걸로 끝날 수도 있었다. 법정에서의 말이란 칼보다 무서운 흉기였다. 검사가 의심을 하고 있는 가운데 그런 말은 핵폭탄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변호사인 나는 내 재판 순서를 기다리면서 다른 사건의 재판 광경을 구경하며 세상을 배우곤 한다.
다시 나의 시선이 방청석을 훑어보고 있었다. 머리통이 큰 작달막한 사내가 혼자 앉아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앞에서 말하는 증인의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죽은 영감의 아들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능이 상당히 높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때 옆자리에서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변호사님, 오늘 신문할 내용이 많습니까?”
돌아보니 랭가의 국선변호사였다.
“예,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나왔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며칠 전 교도소에서 랭가를 만나셨다면서요?”
랭가의 국선변호사는 탐색하는 눈길이었다.
“예, 그랬습니다. 이 사건이 정말 청부살인인지 아닌지 밝혀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랭가의 말을 가서 직접 들어봤죠.”
내가 솔직히 대답했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국선변호인으로서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가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너무 검찰이나 재판부와 사사건건 따지며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 같았다. 지친 재판장이 귀찮아해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법정은 판사의 모노드라마 무대가 아니었다. 결과가 잘못 나올까봐 재판장의 심기만 눈치 보다가는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다음번 재판 준비되신 분 나오시죠.”
재판장이 말했다.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됐다. 나와 국선변호사는 법대 위 변호인석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장영두와 랭가가 터벅터벅 걸어나와 피고인석에 섰다.
“증인 하교식 씨 나오세요.”
재판장이 방청석 쪽을 바라보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앞뒤 짱구에 작달막한 사나이가 증언석 앞으로 나왔다. 가늘게 찢어진 눈이 반짝이고 입술은 얇았다. 갈색 재킷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가 선서를 하고 증인석에 앉았다.
“변호인 신문하시죠.”
재판장이 나를 보고 말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으로 나온 죽은 영감의 아들 하교식을 보았다. 그 역시 힐끗 옆눈길로 나를 세심하게 살폈다. 적대감과 경계의식이 서려 있는 눈이었다. 먼저 그의 날이 선 적대감을 누그러뜨리는 게 필요했다. 나 역시 내 임무를 수행하는 거지 그와 감정은 없다.
“아버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아프실 줄 압니다. 죄인 장영두의 변호사로서 신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대신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그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피해자 가족은 살인범의 변호사를 원수같이 취급했다. 의사는 살인범을 치료해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호사는 달랐다. 심지어 판사들까지도 감정의 돌을 던지곤 했다. 조금은 피해가야 했다. 내가 그에게 설명을 계속했다.
“몇 가지 사항들을 간단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경계하시는 변호사가 묻는 것이지만 진실이 밝혀지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장영두 편만 들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가 청부살인의 배후인물이 아니면 오히려 면죄부를 얻는 순간이다.
그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이 조금 더 사라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카로운 지성적인 변호사를 생각하고 긴장했다가 나를 보면 안심하는 것 같았다. 내가 둔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기록 속에서 서류 한 장을 찾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항상 한 박자쯤 늦춰야 했다. 이윽고 서류 사이에서 죽은 영감의 가족들이 작성한 탄원서를 꺼냈다. 그걸 들고 변호사석을 빙 돌아 증인석 앞으로 가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모두의 시선이 서류 쪽으로 갔다.
“이 서류는 탄원서인데 서초동의 김명래 변호사에게 부탁해서 작성하신 게 맞나요?”
내가 물었다. 탄원서를 변호사에게까지 의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법적 검토와 치밀한 수사를 요청하기 위한 경우는 그렇게들 하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현재 증인의 연세와 직업은 무엇입니까?”
내가 기계적으로 물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것들만 묻는다.
“현재 쉰네 살이고 과학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견의 엘리트 과학자였다.
“그 정도 훌륭한 경력을 가진 분이 굳이 변호사에게 탄원서를 맡기신 이유는 뭡니까?”
탄원서는 형식과 절차도 없었다. 자유로이 써도 됐다. 그가 나를 살피는 표정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쓰고 제출만 변호사에게 맡겼습니다.”
안경 뒤의 그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교활한 건지 순박한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이다.
“아무리 그래도 변호사에게 제출만 해달라고 맡기시진 않았을 텐데요? 제출하려면 등기우편으로 그냥 보내면 되죠?”
내가 다시 물었다.
“변호사에게 내용검토가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그는 내가 묻는 내용에 따라 즉석에서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화제를 돌렸다.
“좋습니다. 그러면 직접 쓰셨다는 그 탄원서의 내용에 대해 묻겠습니다.”
나는 서류 속에서 미리 형광펜으로 표시해 온 부분을 가리키면서 계속 물었다.
“여기 직접 쓰셨다는 내용 중에 말이죠, ‘장영두는 지난 4년 동안 아버님의 배밭을 빌려 농사짓던 사람으로 평소에 아버님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라고 쓰셨는데 기억하십니까?”
그는 탄원서에서 처음부터 범인으로 아예 장영두를 배제하고 바로 형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기억합니다. 그렇게 썼었죠.”
“장영두하고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없습니다.”
“없는데 어떻게 장영두에 대해 그렇게 아는 것처럼 쓰셨죠?”
“그건 돌아가신 아버님한테 들었습니다. 다른 소작인하고는 소송도 하고 고소도 당하고 하셨는데 장영두와는 그런 문제나 감정적인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은근히 장영두의 혐의를 풀어주고 감싸주는 셈이었다.
“증인은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경찰서에 갔을 때 담당 형사에게 사건 경위를 들으신 적이 있죠?”
“그렇습니다.”
“당시 어떤 형사한테서 어떤 내용을 들었죠?”
“어떤 경찰관인지는 지금 모르겠고요. 저는 장영두가 범인이라는 그 형사의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죠. ‘도대체 왜?’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아들 하교식은 장영두가 절대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가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 덧붙였다.
“제가 여기 증인으로 나오기 전에 아버지 배밭에서 일하는 마을주민 김일식이라는 사람이 말해준 게 마음에 걸리긴 했습니다.”
마을주민 김일식은 얼마 전 살인 현장에 갔을 때 만난 인물이었다. 그는 죽은 영감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했었다. 초동수사에서 용의선상에도 올랐었다. 그는 찾아간 내게 흥정조로 “유리하게 말해줄까요? 불리하게 말해줄까요?”라고 묻던 수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늘 증인으로 나온 둘째아들을 지목하면서 “잔인한 놈”이라고 내게 흉을 봤었다. 아마도 그는 새로 과수원의 주인이 된 영감의 아들 하교식에게는 또 다른 말을 한 것 같았다. 사건 주변에는 종종 그런 엉뚱한 인물들이 흙탕물을 뿌리고 수사에 혼선을 주기도 했다.
“김일식 그 사람이 뭐라고 했기에요?”
내가 물었다.
“장영두가 배밭에 있는 자기 집에 여러 번 사전답사를 왔는데 낌새가 이상했다는 겁니다.”
“그 김일식이라는 인물은 변호사인 저한테도 둘째아들이 잔인한 놈이라고 욕하던 사람인데 친하신가 보죠?”
내가 사실대로 얘기해 버렸다. 교활한 인간들은 보호할 가치가 없었다.
“그랬습니까?”
그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가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