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물었다.
“당시 제가 판단하기로는 그 사건은 1년 이상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죠. 절대 우발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근거로 우발적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아버님은 집에 절대 현금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장영두는 오랫동안 아버지 심부름을 해서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아버지의 등기문서를 장영두가 찾아서 명의이전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장영두가 아버지와 어떤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장영두를 시켜서 한 치밀한 계획살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장영두에게 직접적인 살인의 동기가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또 땅을 팔아 돈을 챙기기 위한 강도의 목적도 불가능한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청부살인이 아니면 우발적으로 하 영감을 죽인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 땅 문서를 어떻게 취급하셨죠?”
“워낙 관리를 철저히 하셔서 아들인 저조차 아버지의 인감도장이나 등기권리증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증인은 장영두가 누군가의 교사를 받고 아버님을 살해했으니 그 범인을 꼭 잡아달라고 하셨죠? 확신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 누군가 청부하지 않고는 장영두가 아버지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중죄를 받는 거 아닙니까? 장영두는 그걸 알고도 감행했습니다. 어느 정도 징역을 살 걸 알고 지금 이 순간 이런 것까지 감안하고 범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범인이 누군지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증언 역시 그 범인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가는 중이었다. 검찰이나 경찰뿐 아니라 가족마저도 하 영감의 죽음을 청부살인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 범인도 아들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굳어져 있었다. 단지 아들 두 명 중 누구냐의 문제였다. 동생은 형을 범인으로 탄원서에서 은근히 지목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장영두의 한마디였다.
그러나 장영두는 범인이 영감의 큰아들이라고 자백하지 않았다. 큰아들과 장영두의 뒷거래가 의심받으면서 장영두가족들의 계좌가 낱낱이 추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범인은 큰아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상속재산이 흐른 곳이라야 아버지를 죽일 이익이 있었다. 나는 법정에 둘째아들을 불러서 힘겹게 신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변호사를 통해 많은 자문을 받고 나와 있었다. 게다가 박사학위를 가진 머리가 비상한 엘리트였다.
“여기 직접 쓰셔서 검찰에 보낸 탄원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누가 범인인지를 아시는 듯이 쓰셨는데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내가 뭐라고 썼는데요?”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부분을 보세요.”
내가 탄원서에서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부분을 보여주었다. ‘불행하게도 이 청부살인은 누구나 짐작이 가지만 증거가 없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그 부분을 보았다. 그는 이미 경찰에 가서 은밀히 형 하봉식을 범인이라고 노골적으로 지목한 적이 있었다.
“범인이 누구라고 주장하십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그건 검찰에서 잡아주셔야죠.”
그는 딱 잡아떼면서 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안다고 쓰셨죠? 그게 누굽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그건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나같이 생각할 거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가 매끄럽게 질문을 피해나갔다. 그때 내 시선이 장영두에게 갔다. 청부한 사람과 살인자 사이에는 뭔가 텔레파시가 순간적으로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영두는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상했다. 그의 말대로 우발적 살인이라면 증인으로 나온 둘째아들에게 분노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는 흥분해야 할 장면에서 의외로 피하는 모습이었다.
“단지 상식적으로 추측한 걸로 탄원서에 청부살인이라고 쓰셨다는 얘깁니까?”
내가 따졌다. 순간 그가 당황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검찰에서 누군가한테 그렇게 들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검찰의 추리를 듣고 그는 그걸 기존의 사실로 확신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변호인석 책상 위에 있던 기록 중에서 그가 경찰서에서 진술한 부분을 가지고 다시 증인석으로 왔다. 그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었다.
“증인은 아버님이 돌아가시자마자 경찰서에 가서 진술하신 적이 있죠? 그때 작성한 조서가 이게 맞죠?”
진술조서 사본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형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왜 법정에서 그 얘기를 다시 해야 하죠? 왜?”
그가 소리쳤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짐승처럼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같은 말을 굳이 여기서 해야 하냐 이 말입니다.”
그가 계속 나를 공격했다. 나는 묵묵히 서 있었다. 이럴 때 변호사는 가만히 있는 게 좋다. 그의 표정과 행동 자체가 대답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재판장이 중간에 나섰다.
“원래 그런 진술들 다 재판정에서 해야 하는 겁니다.”
그는 재판장의 말을 듣고서야 기가 한풀 꺾였다. 내가 계획한 대로 질문을 계속했다.
“증인은 경찰에 가서 처음 김경만이라는 사람을 언급했었는데 그 사람은 어떤 분인가요?”
그는 김경만과 형의 공모 가능성도 진술했다.
“아버지가 60년대 이리에서 막걸리공장을 할 때 회사원이었습니다. 서로 연락이 없던 그 사람이 7년 전 다시 아버지를 만나 과수원을 빌렸다는 소리를 들었죠. 그런데 그 사람은 유기농을 한답시고 배나무에 비료도 주지 않고 그랬어요. 그리고 아버지하고 사이가 아주 나빠졌죠. 아버지는 김경만 그 사람이 땅세를 내지 못하니까 그 사람이 쓰던 농기계를 가지고 와 버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아버지를 업무방해죄로 고소했었죠. 원수지간이 됐습니다.”
“여기 탄원서를 보면 ‘그런 원한 관계는 있지만 김경만 그 사람이 아버지를 죽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용의자에서 배제하는 말까지 쓰셨었죠?”
“그렇습니다.”
탄원서를 보면 그는 배제할 사람과 조사할 사람까지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변호사에게 의뢰해서 작성한 완벽한 수사결론서 같기도 했다. 나는 좀 더 핵심부분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탄원서에 증인이 쓴 결론 부분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탄원서 끝의 형광펜으로 줄 그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그에게 지적해 보였다.
‘아버지는 형님과 김경만이 요 근래 너무 자주 어울리고 친하게 지내는 걸 걱정하셨죠. 아버지는 성격이 철두철미하고 의심이 많은 편인데 소송 문제로 사이가 나쁜 김경만과 형님이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뭔가 꾸미는 것이 있지 않나라는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는 형의 살인공모를 직접 고발하는 것이었다.
“김경만과 형님이 친하게 지내는 걸 어떻게 아셨죠?”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둘이 친하다는 걸 아셨습니까?”
다시 물었다.
“김경만과 소송 중인데 기가 막히게 아버지 과수원 땅 평수를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게 등기부상 평수와 실제 평수가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형님 이외에는 그걸 김경만에게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는 거죠.”
그의 허점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검찰과 법원에 써 내신 서류 중에 형님이 뭔가 꾸몄다는 얘기는 살인청부와는 관련이 있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가 꼬리를 내리고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조서에 기록된 그의 진술을 들이대면서 압박했다.
“증인은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담당 형사에게 형이 아버지를 거의 찾아오는 일이 없는데 이번 설에는 형님 아들이 찾아왔더라고 얘기했었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형님도 조카도 명절 때면 아버지를 찾아뵙곤 했습니다.”
그가 말을 바꾸었다. 형제간에도 배를 쓸어주고 등에 칼을 꽂는 그런 성격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형님이 김경만을 만나 뭔가 꾸몄다고 하셨는데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난 겁니까?”
“저는 직접 모릅니다. 아버지에게 들은 겁니다.”
그는 죽은 하 영감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목격하신 적이 있어요?”
“그게 아니고 김경만이 아버지 땅에 대해 자세히 아니까 형이 그랬으리라고 추측하신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짐작과 추측으로 형과 장영두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나는 다시 진술조서에서 그의 말 한 대목을 지적했다.
‘이러한 청부살인은 현재로서는 장영두와 청부살인을 시킨 자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청부살인을 그렇게 단정하셨습니까?”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거였습니다.”
그가 태연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어떤 논리였죠?”
“장영두는 직접 아버지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현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버지의 땅을 법률적으로 자기 앞으로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게 청부살인의 근거죠. 둘째로는 아버지 땅에 도로가 나고 개발이 계획되어 가격이 급상승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계획적으로 범한 게 아니겠어요?”
그는 형사 콜롬보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유언장을 쓴 걸 아시죠?”
“압니다.”
“거기서 형은 상속에서 배제됐는데 아십니까?”
유언장 사본을 들이댔다.
“압니다.”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현재 아버지의 부동산들은 모두 누구에게 갔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가 잠시 멈칫하는 표정이었다.
“형은 상속을 포기하고 나머지는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공동상속됐습니다.”
그는 자신이 상속했다는 걸 그렇게 우회해서 대답했다.
“아버님은 유언장에서 재산으로 장학재단을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땅만으로는 재단을 만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증인 앞으로 부동산 등기명의를 옮기셨나요?”
“그렇습니다.”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장학재단을 만들면 안 되나요? 그건 가능하지 않습니까?”
“….”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그를 예민하게 살피고 있는 랭가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사람은 아버지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시켜서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두 아들 중 누군지는 모르지만 진실이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들인 증인이 이익을 보지 않았나요?”
“….”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 탄원서 끝부분에 있는 가족들 이름과 도장에 대해 물었다.
“모든 가족이 탄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형은 이 탄원서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형의 이름이 적히고 도장이 찍혀 있죠?”
“형에게는 전화를 걸어서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막도장을 새긴 겁니다. 나머지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수회의를 열었습니다.”
탄원서 역시 그의 일방적 작품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