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각료들이 칼국수를 먹는 모습. 94보도사진연감 | ||
이 책에는 이 씨의 요리 인생과 함께 우리 고유의 발효음식,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전직 대통령의 식단에 얽힌 다양한 뒷얘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통령 내외가 먹는 음식이 옛날 임금님에게 올라오던 궁중 수라상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러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씨에 따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평소 대통령 내외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은 김치를 비롯한 기본적인 밑반찬과 서너 가지 일품요리뿐이라고 한다. 간혹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갈비찜이나 전골 같은 것이 추가된다는 것. “대통령 내외분들은 누구나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양도 적게 준비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이 이 씨의 얘기다.
하지만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듯 대통령 내외가 선호하는 음식 역시 각기 다르게 마련. 대부분의 경우 대통령과 영부인의 입맛 역시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의 특색을 따라간다는 것이 이 씨의 말이다.
산골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양식도 즐기던 김옥숙 여사와는 달리 유독 된장류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 씨는 “노 대통령은 멸치국물에 푹 익은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넣고 콩나물과 떡점 또는 쌀밥을 곁들여 낸 ‘갱시기’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이 씨가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바닷가 출신답게 해물을 무척 좋아했다고. 미역국조차 ‘우럭미역국’ ‘광어미역국’ ‘대구미역국’ 등 생선을 넣고 끓인 것을 좋아할 정도로 그의 ‘생선사랑’은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이 씨는 “생선의 참 맛을 아는 분답게 생선머리 부위를 즐겼는데 특히 도미를 가장 좋아했다”고 밝혔다.
YS의 ‘칼국수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얼마나 칼국수를 좋아하시는지 2~3년 동안 거의 매일 점심으로 칼국수를 올렸는데도 한 번도 물린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이 씨의 얘기다.
YS의 칼국수는 재임 당시 ‘서민적인 대통령’ ‘소박한 청와대’의 이미지를 대변해주는 기특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청와대표 칼국수’가 탄생하기까지 조리팀의 힘겨운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조리팀을 고민스럽게 했던 것은 ‘우리밀을 적극 사용하라’는 대통령의 분부. 수입밀에 비해 탄성이 적고 점도가 약해 반죽이 잘 뭉쳐지지 않는 우리밀을 사용해 쫄깃하고 금방 불지 않는 면발을 뽑아내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이다.
▲ 이근배 씨 | ||
그러나 대통령 내외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다. 그중 하나가 ‘기미’로 대통령 내외가 음식을 먹기 전 경호실 소속의 검식관이 수저로 직접 먹어보는 절차다. 검식관은 상에 오르는 모든 음식을 고루 맛보아 독의 유무와 함께 식자재의 문제점이나 간, 신선도, 맛 등을 확인한다.
그런데 검식관으로서도 고민스러운 것은 야채류의 점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야채를 티 안 나게 먹어보고 체크를 할까. 가령 풋고추의 경우에는 맨 아랫부분을 칼로 잘라먹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그 탓에 청와대 연회장에 오르는 풋고추에는 꼭지가 없다고. 또 고추의 맛도 신경 쓰는 부분인데 식사 중 대화가 중단될 것을 우려, 너무 매운 고추는 올리지 않는다는 것.
일반 가정집과 마찬가지로 청와대에서도 11월 말경 김장을 시작하는데 김치맛은 영부인의 입맛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령 영부인이 젓갈을 많이 넣어 김치를 담그는 지방 출신이면 젓갈을 듬뿍 넣고, 그렇지 않으면 젓갈 양을 줄이는 식. 김장철에는 외부 인원까지 동원해 보통 사나흘에 걸쳐 배추 800~900포기씩을 담그는데 김치공장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고 한다. 이때만큼은 영부인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함께 김장을 돕는다는 것도 일반인들에게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청와대 조리사의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내로라하는 조리사들이 항상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요리에 임한다 해도 ‘십년감수’할 만한 사건들이 간간이 터지기도 한다는 것.
전두환 대통령 시절 한 아프리카 국가원수 내외가 방한했을 때의 일. 양국 대통령 간에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조리팀은 따로 담소를 나누던 영부인들을 위해 다과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찻잔 속에 당연히 차가 담겨 있을 것으로 생각한 서빙 담당자가 그만 비어 있는 찻잔을 두 영부인 앞에 내놓는 실수를 저지른 것. 찻잔에 따뜻한 차가 들어있으리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뚜껑을 열며 상대에게도 권했을 영부인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또 그 사실을 안 주방에서는 얼마나 식은땀을 흘려야 했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긴급한 일이나 국가 중대사가 터지는 바람에 식사 스케줄이 불시에 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YS가 집권하던 1994년 7월의 어느날, 조리팀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찬 메뉴로 칼국수를 준비했다고 한다. 서빙 사인이 떨어지고 서빙을 하려던 찰나 의전비서관이 메모지 한 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대통령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빙은 중단되고 모두들 긴장한 상태로 상부의 지시를 기다렸지만 20분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는 것. 준비한 칼국수는 다 불었고 결국 차린 음식을 다 걷어내고 한참이 지나서 다시 상을 차려야 했다는 것. 대통령의 식사를 중단시킨 그 사건은 나중에 알고보니 김일성 사망 소식이었다고 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