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숙 | ||
이런 가운데 당시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숨겨진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실체를 벗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정 씨의 친아버지는 정일권 전 총리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 전 총리는 정 씨 측의 요구로 생전에 적잖은 금전적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정 여인의 살해범은 그 가족들조차 넷째오빠로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970년 3월 17일 발생한 정인숙 씨 피살 사건 직후 경찰은 “정 여인의 운전기사이자 넷째오빠인 정 아무개 씨가 돈 문제로 동생과 다투다 우발적으로 경호용으로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여동생을 살해한 것”이라며 정 씨를 살인범으로 구속했다. 하지만 19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89년 5월 가석방으로 출소하자마자 정 씨는 “나는 여동생을 살해하지 않았으며 가족을 위해 희생된 것”이라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정 여인의 살해 진범을 놓고 청와대 배후설과 중정 배후설, 정 전 총리 사주설 등의 루머가 나돌았다.
또한 정 여인이 남긴 사진에 등장한 세 살배기 아기를 놓고 그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느니, 정 전 총리라느니,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라느니 하는 소문들도 무성했다.
이런 가운데 기자는 골프장 사장 납치 사건을 계기로 정성일 씨의 주변을 취재하던 중 전직 국회의원 등 여러 관계자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몇 가지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정 씨의 친아버지는 정 전 총리일 가능성이 높으며 94년 타계하기 전까지 적잖은 금전적 도움을 줬음에도 정 씨 측이 자주 손을 벌려 관계가 상당히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 여인의 살해범은 넷째오빠가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 공통된 얘기였다.
60~70년대 중정에 몸담았던 이 아무개 전 의원은 “정인숙의 둘째오빠와 고교 동창생으로 아주 친한 사이여서 비교적 그 집안 사정을 잘 안다. 선친은 대구부시장을 지낼 정도로 집안이 괜찮았고 형제들도 모두 똑똑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넷째가 변변한 직업이 없었고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서 좀 따돌림을 당했던 것 같다. 그런 오빠를 안되게 여겨 정인숙이 운전기사로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돈 씀씀이가 헤퍼 형제들은 물론 여동생과도 불화가 잦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 전 의원은 “사고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친구를 비롯한 그 가족들 모두 넷째오빠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다. 가족들이 그렇게 확신하는데 무슨 다른 의문이 있을 수 있나. 그래서 지금도 넷째는 가족들과 왕래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 친구는 ‘어떻게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나. 오빠가 동생을 돈 때문에 쏴 죽이다니. 정말 집안 망신이다’라며 심하게 자괴했다”고 전했다.
▲ 정인숙과 정성일의 아기 적 모습. | ||
정성일 씨 또한 93년 펴낸 자신의 자서전에서 ‘넷째외삼촌의 출소 직후 함께 친자확인소송을 준비하는 등 가깝게 지냈다가 이후 넷째외삼촌이 나를 돈을 벌 목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정 씨의 친아버지 논란 역시 정 전 총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이어져 취재진을 놀라게 했다. 이 전 의원은 “우리 친인척 중의 한 분이 정 전 총리 부인과 이웃에 살며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정 전 총리 부인이 친구에게 자기 집 남편을 가리키며 ‘어디서 아들 하나를 만들었다’고 한숨짓고는 했다고 한다. 실제 4대 독자였던 정 전 총리에게는 딸만 셋뿐이었기에 생전에 그 모친의 아들 독촉이 아주 성화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 관계자는 “정 전 총리의 측근인 김 아무개 전 의원과 얼마 전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최근 납치범으로 보도된 정 씨에 대해 고개를 흔들더라. ‘(금전적으로)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도 툭하면 손을 내밀고 하더니, 그 못된 버릇을 못 버리고 이런 흉악한 범죄까지 저질렀다’고 분개하더라”고 전했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 전 의원은 앞서의 관계자가 전한 ‘금품 지원설’에 대해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니 나 말고 정 전 총리의 비서를 지냈던 신 아무개 전 의원이나 김 아무개 전 의원 등에게 물어보라”며 즉답을 피했다.
비서를 지낸 또 다른 김 전 의원 역시 기자의 질문에 “어쨌거나 정확한 DNA 검사를 하지 않았으니 (친아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정 씨가 넷째외삼촌과 함께 돈을 얻을 요량으로 정 전 총리를 직접 지목하면서 친자확인소송을 하느니 소동을 벌여 상당히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정 씨는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외가는 물론 정 전 총리 측과도 완전 결별하다시피 했다. 91년 그가 한국에 와서 친자확인소송을 한다고 했을 때 정 전 총리 측에서 거액을 주고 일단 무마시켰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또 한국에 나타나서 방송 인터뷰니 뭐니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 정 전 총리 측에서 아주 고개를 흔들 정도로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상종해선 안 될 놈’이라는 막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정 전 총리의 측근인 신 전 의원은 외유 중이어서 통화가 안됐다.
한편 정 씨는 2005년 귀국하기 전까지 15년 이상 미국 LA에 머물렀는데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비교적 정 씨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교포사회의 한 관계자는 “이곳 현지 명문대 출신으로 화술이 좋고 생김새가 번듯했던 정 씨는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하는 일에 비해서 씀씀이도 컸고, 스캔들도 제법 많았다. 자신을 ‘정 전 총리의 아들’이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항간에는 정 전 총리로부터 많은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전했다.
현지 교포사회 한 언론은 최근 보도에서 “정 씨와 사귀던 한 여인이 ‘정 씨가 91년 친자확인소송 취하로 80만 달러를 생부에게 받았다는 것만 들었다’고 전화인터뷰에서 밝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정 씨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 전 총리와 만나지는 못했지만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눈물의 부자상봉을 했으며, 외삼촌 등의 만류로 친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 소 취하를 스스로 했다’고 밝혔을 뿐 금전적 요구나 지원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